83화 내 적이자, 세상의 적
그날 밤.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36%]
-[????의 그림자]가 정상적인 수준의 분별력과 온전한 기억이 깃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이 활성화됐습니다!
…
…
…
그림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별다른 변화가 없는 메시지들을 슬쩍 확인하고는, 곧장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안일한이 요구해 온 부분에 관한 기억이었다.
-가장 먼저 오윤진에게 연락해 줘.
이는 곧 지난 꿈 속에서 요청했던 오윤서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녀석의 의견이었다.
녀석이 제시한 큰 흐름은 그림자가 생각했던 것과 얼추 비슷했다.
다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를테면.
-아무래도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는 게 먼저겠지.
차분하게 우선순위부터 정하는 점.
-네 말대로 만일 오윤진이 동생을 아낀다면, 그 점을 파고드는 게 좋을 것 같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접근법을 제시하는 점.
마지막으로.
-필요하다면 김한석에 관한 이야기를 밝혀서라도 승낙을 받아내.
정보들을 알맞게 활용하는 점까지.
물론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안일한의 진가는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포인트를 꼼꼼하게 짚었다는 점이었다.
즉, 처음에 기대했던 디테일을 채워 준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역시 여태까지 수월하게 문제를 해결해왔던 게 마냥 요행은 아니었다는 거겠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만족스러웠다.
때문에 그림자는 지체 없이 곧장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가장 먼저 기억을 더듬어 오윤진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 알려 준 연락처가…….’
그러고는 이전 생에서 당사자가 직접 알려 준 대로 연락을 취했다.
몇 차례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됐다.
다만 그뿐으로.
-…….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때문에 그림자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안일한이다. 회신을 기다리도록 하지.”
그 말만을 남긴 채 바로 끊어 버렸다.
이 또한 과거 오윤진이 알려 준 방식 중 하나였다.
그녀의 입장 상, 가급적 흔적을 남기는 일은 지양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때문에 그림자는 그녀의 정체를 드러내는 언급은 삼가고, 이름 석 자만 내세웠다.
잠깐 기다리자 처음 보는 번호로 다시 연락이 왔다.
받는 순간 스마트 워치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일한? 역시 살아 있었구나.
다름 아닌 오윤진이었다.
그녀를 향해 그림자는 묵묵하게 답했다.
“확인할 길이 있었을 텐데?”
-직접 목소리를 듣진 않았으니까.
“그래, 보다시피 살아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법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니?
황당함이 묻어나는 말투, 어찌 보면 그녀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최대한 흔적이 노출되지 않게끔 특수한 회선으로 전화가 다시 오는 걸 기다리는 것.
이는 뒷세계에서나 자주 활용되는 방식으로, 일개 생도가 알고 있을 리 만무한 까닭이었다.
그녀의 의문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보다 할 이야기가 있다.”
그림자는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특유의 화법에 익숙해졌는지, 오윤진은 한숨과 함께 되물었다.
-하아, 말해 봐.
“소원, 기억하고 있나?”
-기억하고 있어, 다만 이렇게 빨리 요구할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다행이군.”
-그래서? 네 소원은 뭐지? 미리 말하지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범위여야 해.
“네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림자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난 다음, 천천히 목적을 입에 담았다.
“네 동생. 오윤서와 대화하는 것. 그녀에게 네 사정을 전하고, 오해를 푸는 것. 그뿐이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는지, 오윤진은 침묵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기를 수 초.
이내 스마트 워치 너머로 날 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목적이 뭐야.
“말했다시피, 네가 동생과…….”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오윤진의 쏘아붙이는 말에 그림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내 개인 사정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 주제넘은 요구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낱낱이 말해.
역린을 건드렸을 때 나오는 반응이 이러할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가시 돋친 말투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 능력을 통해 알게 됐다.”
-미래 예지로 알게 됐다? 내가 나중에 개인사를 떠벌리게 될 거라는 거야?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슬슬 그녀의 언성이 높아지고 있건만, 그림자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마저 대답했다.
“오윤서가 위험하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 그게 내 목적이다.”
또다시 오윤진은 침묵했다.
그녀의 침묵은 이전보다 길게 이어졌다.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는 만큼 그림자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자세히 설명해 줘.
“아카데미에 환영 마법사가 존재한다. 녀석이 오윤서를 노리고 있다.”
-환영 마법……!
그녀는 A급 마법사답게, ‘오윤서가 위험하다’라는 이유를 단번에 납득한 듯했다.
이내 오윤진은 빠득, 이를 갈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녀석을 쳐 죽이는 게 더 빨라. 그런 같잖은 마법사 따위,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아니, 넌 그럴 수 없다.”
-이유는?
“네가 당장 김재학을 축출할 수 없는 이유와 동일하다. 환영 마법사가 위장하고 있는 신분은 아카데미의 교관이니까.”
-……!
“그리고 녀석은 이미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 그 전에 오윤서의 문제를 해결하면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거다.”
그림자의 침착한 대답에 오윤진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환영 마법사라는 녀석이 대체 왜 내 동생을 노린다는 거지?
“녀석은 네 동생을 포함해서 우수한 생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생도들을 노린다.”
-그러니까, 어째서?
“녀석 또한 김재학과 같은 조직에 속해 있으니까.”
-미래의 사도를 키워 낸다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광적으로 추종하는 건가……?
“비슷하다.”
뜻밖의 진실에 오윤진은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런 거라면 협조할게. 하지만.
“하지만?”
-윤서가 과연 대화에 응할지…….
그녀는 자조적인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거기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지금 내 상황에 섣불리 동생을 만나면 우리 둘 다 위험해져.
“다짜고짜 만나면 그렇게 되겠지.”
오윤진은 지난번 게이트 침식 사태로 인해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만큼 비밀리에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안전하다곤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거기서 오윤서가 난동이라도 부렸다간 두 사람 모두 낭패를 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 부분은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따라서 그림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윤서는 내게 맡겨라.”
-맡기라니. 대체 어떻게 하려고.
“생각해 둔 방법이 있다. 그녀와 대화가 끝나면 다시 연락하지.”
-……알겠어.
그대로 연락을 끊으려는 순간.
-잠깐만.
오윤진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물은 내용은 다름이 아니었다.
-너는 사도를, 그러니까 조직에 관해 전부 알고 있는 거야? 리더가 누구인지도?
그녀가 본 미래. 예정된 재앙의 원흉이자, 최종적으로 말살해야 할 존재.
동시에.
‘내 적이자, 세상의 적.’
물론 그림자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동기화율이 올라간다면 지금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진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충돌하기엔 아직 이르다.’
오윤진은 A급 마법사답게 충분히 강력하다.
하지만 ‘조직’은 일개 개인으로 상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집단에는 똑같이 집단으로 맞서야 하는 법이었다.
‘안배와 계획은 이미 갖춰져 있고, 일의 진척도 아직은 순조롭다.’
그러니 지금은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생각들을 속으로 삼킨 채 침묵하고 있자, 오윤진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연락 기다릴게.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잠깐 동안 스마트 워치를 바라보던 그림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기숙사를 벗어나며 생각을 정리했다.
‘첫 단추는 제대로 채웠다.’
다음은 안일한의 차례였다.
그가 오윤서의 문제 해결을 위해 움직이는 동안 그림자는 또 다른 준비에 임할 생각이었다.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사이, 그림자가 도착한 장소는 다름 아닌 마력 단련실이었다.
‘혼원현천신공도 앞으로 수일이면 완성된다.’
그럼 당장 필요한 세 가지 능력 중, 한 가지가 충족되는 셈이었다.
그림자는 이 사실을 속으로 갈무리한 채 차분하게 자세를 갖췄다.
그러고는 곧바로 명상에 들어갔다.
* * *
다음 날.
“일한이, 가자! 7교시는 마력 수업이다.”
“그래.”
나는 나직하게 대답하며 임강철과 함께 반을 나섰다.
곧장 무기 훈련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낯익은 면면들과 마주쳤다.
‘심인욱, 그리고 오윤서.’
C반의 심인욱과 오윤서였다.
두 사람 또한 내 쪽을 확인했는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심인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체를 하는 반면.
“……!”
오윤서는 크게 흠칫하며 나를 노려보듯 눈매를 좁혔다.
그녀의 표정을 접한 순간 자연스럽게 그림자의 전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윤진과의 대화는 잘 마무리했다. 이젠 네 차례다.
내 차례. 이는 곧 오윤서와의 대화를 의미했다.
대강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나눌지, 구상은 이미 끝내 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오윤서를 바라보던 중.
“……!”
문득 그녀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됐다.
정확히는 그녀의 왼쪽 팔뚝에 일렁이는 불길한 색채의 마나가 눈에 보였다.
처음 접하는 감각이었으나, 정체만큼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환영 마법. 역시 김한석이 벌써 손을 썼구나.’
새삼스럽게 소름이 끼치는 한편, 뒤늦게 감각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조금 더 집중하자 이번에는 오윤서의 체내를 순환하는 마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대체…….’
새로운 경험에 고개를 기울이던 찰나,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름 아닌 혼원현천신공.
현재 그림자 녀석이 내게 제공하려는 능력은 그것뿐이었다.
‘방과 후에 기회를 봐서 그림자 녀석에게 물어봐야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심인욱과 오윤서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일한이, 뭘 멍때리고 있나. 빨리 가자!”
임강철 또한 나를 채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천천히 움직이며 오윤서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너, 나랑 얘기 좀 해. 방과 후에 기숙사 뒤뜰로 와.”
오윤서가 빠르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저만큼이나 멀어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여태 벼르고 있었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제법 날이 서 있었다.
‘방과 후 기숙사 뒤뜰이라.’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나는 차분하게 그녀와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
…
…
방과 후.
약속대로 나는 오윤서와 대면했다.
그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생각해 둔 바를 입에 담았다.
이에 오윤서는.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사정없이 표정을 구긴 채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