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더 이상 이전 같을 순 없겠지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과 모처럼 나들이를 했던 어느 날.
허공이 거미줄처럼 갈라졌고, 그 비좁은 틈새로 이형(異形)의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범람.
사람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가운데.
아비규환 속에서 침착하게 움직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초인.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존재라고 어머니께서 알려 주신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일한아, 아빠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해! 알겠지?!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신께선 아버지와 나를 대피시킨 다음, 망설임 없이 뛰쳐나가셨다.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면서도 어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참혹함으로 끝났던 나들이.
그날의 기억은 뇌리에 화인처럼 새겨졌다.
또한 그 기억이야말로 여태 나를 움직이게 만들어 준 단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그만큼 강렬했으나.
‘……이 광경은 대체.’
참혹했던 그날의 기억조차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단 하나의 균열로부터 비롯된 몬스터는 도심 한복판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만한 재앙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
하나가 아닌 수십, 수백 개가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세상의 균열…….’
화마와 마물로 가득 찬 세상.
지옥이 실존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눈앞의 광경은 말 그대로 종말 그 자체였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기억 속의 참사는 결코 이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면 진즉 세상은 멸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이건 꿈이다.’
꿈, 정확히는 ‘계승’ 현상이었다.
즉 눈앞의 광경은 내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자, 경험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출처는…….
‘……그림자겠지.’
녀석에게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가닿는 순간, 나는 문득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녀석의 기억, 경험은 미래에 기반한 것들일 텐데. 그렇다는 건…….’
결국 눈앞의 재앙은 녀석의 경험이자, 미래에 닥쳐올 사건이라는 의미였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진실이었다.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왠지 손발이 덜덜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는 것조차 버거워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허억!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터뜨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역시 꿈이었구나.’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떨쳐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내가 꾸는 꿈은 결코 평범하다곤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한 끝에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로 가서 찬물 세수를 하며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우선 꿈은 잠시 미뤄 두고. 내가 남긴 질문에 녀석이 답변했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
다짐과 함께 맑은 정신으로 병실을 향해 갔다.
나는 들어서자마자 침대 옆쪽의 선반에 펼쳐진 공책을 집어들었다.
그곳에는 내가 원하는 내용, 이번 사건에 관한 경위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재앙의 마녀, 오윤진과의 유물 탐색을 위한 동행부터.
그 과정에서 습득한 새로운 스킬과 마나 수정을 통한 마력 스텟 증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도주를 도왔다는 부분까지.
그제야 내가 병실에서 눈을 뜬 이유를 깨달은 한편.
어처구니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제아무리 목적이 있었다지만, A급 초인의 일격을 맨몸으로 받아낼 생각을 하다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녀석다웠으나, 그걸 내 몸을 바탕으로 펼치니 참으로 아니꼬웠다.
그나마 녀석이 사죄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면 진지하게 대책을 고민했으리라.
더욱이 이번 사건의 의도와 전리품 등.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는 점도 기분을 풀어주는 데 한몫했다.
‘재앙의 마녀라고 했나? 그 여자가 나를 위해 마련된 안배라니.’
A급 초인이자, 마법사인 오윤진.
녀석은 그녀의 존재가 바로 안배의 일환이라 말했다.
다만 언제, 어떤 식으로 내게 도움을 줄지에 관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A급, 그것도 빌런을…….’
A급 초인이면 고태식 교관과 동급이다.
그런 괴물이 훗날 나를 도와준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했다.
다만 그뿐으로, 오윤진에 관한 부분은 현시점에서 더는 알 수 없는 만큼 지체없이 다음 화두로 넘어갔다.
‘혼의 각성이라. 일단 이것도 A급 스킬인데.’
녀석의 설명에 따르면, 특성의 효과를 일시적으로 강화시켜 주는 모양이었다.
내 경우에는 그림자 녀석과의 동기화율이 상승하는 식으로 적용되는 듯했다.
‘마나 소모가 극심하다지만, 이거 잘만 쓰면…….’
상당히 유용한 무기가 될 것 같았다.
여태 동기화율이 5% 단위로 오를 때마다 새로운 현상, 이로운 작용이 나타났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강렬한 호기심이 차올랐다.
‘한번 써보자.’
동기화율만 상승하는 거라면, 병실에서 써도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정한 즉시 상태창을 살폈다.
[특성]
-????의 그림자
동기화율 33%
계승 1단계 –미약한 링크-
‘현재 동기화율은 33%.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오를까.
생각과 함께 다른 스킬을 사용할 때처럼 속으로 ‘혼의 각성’을 발휘했다.
그 순간.
“……!”
코어의 마나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는 가운데.
극심한 마나 소모의 영향인지 탈력감이 엄습해 왔다.
가까스로 동기화율을 확인한 순간.
동기화율 34%
나는 탈력감과는 별개로 맥이 쭉 빠졌다.
고작 1% 상승해 34%가 된 것이다.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33%로 원상복귀했다.
‘……이거 진짜 A급 스킬 맞는 거야? 아니면 내가 사용법을 아직 잘 모르는 건가?’
상태창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테니, 아무래도 후자인 듯싶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녀석에게 구체적인 사용법을 물어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질문할 거리를 생각하자, 여태까지 잠시 미뤄 둔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꿈속에서 본 종말…….’
인세의 지옥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범람 사태.
그게 진짜 녀석의 경험인지, 실제로 미래에 벌어질 일인지.
꿈 속에서 본 종말에 관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급선무였다.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써 감정을 추스렸다.
‘……녀석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
여태 그림자의 답변이나 어휘 선택에서 이따금 이질적인 느낌을 받은 적 있었다.
모종의 사명감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당시에는 그저 고개를 기울였으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알아보자, 확실하게.’
이미 예전에 마음을 다잡은 바 있었다.
미래에 어떤 일이 닥쳐오던 간에 겁을 집어먹기보단 이점으로 활용하기로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새삼스럽게 다짐하며 녀석에게 남길 질문을 쭉 써 내려갔다.
* * *
그날 밤.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33%]
-[????의 그림자]가 일정 수준의 분별력과 온전한 기억이 깃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이 활성화됐습니다!
…
…
…
변함없는 메시지 세례와 함께 그림자는 눈을 떴다.
간단하게 동기화율 정도만 확인한 다음,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병실이었다.
‘퇴원은 아직인가.’
그렇다면 할 수 있는 행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테면 마력 스텟의 단련이라든지.
물론 아카데미 내 마력 단련실에서 하는 단련에 비하면 효율이 상당히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대략 8시간 가량을 멍하니 보내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감으려는 찰나.
“음?”
선반 위에 펼쳐진 공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질문할 거리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내용을 확인한 순간.
“……!”
그림자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걸 봤나.’
세상의 종말.
정확히는 종말이 시작되는 시점에 관한 질문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까닭이었다.
그림자는 잠깐 동안 말없이 공책을 바라봤다.
다시금 내용을 훑어내리며 생각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야 할 이야기였다.’
단지 알려지는 시점이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을 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때문에 고민은 찰나에 불과했다.
-네가 본 광경, 종말은 훗날 실제로 닥쳐올 미래다.
일필휘지로 첫 문장을 적어내렸다.
이어서 펜을 쥔 손에 힘을 더한 채로 한 문장을 추가로 적었다.
-다만 이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미래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물론, 그의 손에 세상의 명운을 맡긴 채 스러져간 이들은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그는 진심을 다해 현재 기억나는 내용들을 적어내렸다.
이어서 예정된 종말을 막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가장 먼저 김한석.’
앞으로 일주일 뒤면 2학기가 시작된다.
환영 마법사 김한석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며, 주요 인물들에게 마수를 뻗을 터였다.
거기에 대비하여 현재까지 총 세 명.
윤설하, 차은월, 심인욱의 문제를 해결했다.
남은 인물은 총 두 명.
‘그중 오윤서의 문제는 이미 해결이나 마찬가지고.’
오윤서의 문제의 근간은 오윤진에게 있다.
이미 이번 사태를 통해 그림자는 오윤진에게 소원권을 얻은 상태였다.
이를 바탕으로 접근한다면 어렵지 않게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 백유진의 경우에도 대책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로써 격변의 첫 번째 대비책은 충분히 갖춰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론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답변을 적는 작업도 슬슬 끝나갔다.
그림자는 마지막으로 적은 내용을 검토하고는 페이지의 끝자락을 접어 둔 채 선반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생각을 전환했다.
‘더 이상 이전 같을 순 없겠지.’
종말을 알게 된 이상, 더는 예전 같이 지낼 순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그 녀석이 침착하다한들 사람인 이상, 마음 한 구석에 조급함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
그만큼 훗날 닥쳐올 종말은 일개 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수준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조급함의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는 건 불가능했다.
감정의 원천이 예정된 종말이라는 미래에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니 녀석이 감내해 줬으면 하고 바랐다.
이유는 더할 나위 없이 간단했다.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니까. 그리고.’
오직 우리 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조급한 마음 자체는 당장 어찌할 수 없겠지. 하지만.’
달래주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그림자는 그 수단으로써 ‘성장’을 떠올렸다.
‘격변이 됐든, 뭐가 됐든. 힘이 있다면.’
무슨 일이 닥쳐도 당당하게, 겁없이 맞설 수 있는 바탕으로 작용하리라.
이를 위해 녀석에게 상식을 뛰어넘는 성장 속도를 제공하는 것. 그게 바로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그림자는 속으로 온갖 옵션들을 헤아렸다.
그러고는 다시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가장 먼저……, 그게 좋겠지.’
마음을 정한 즉시 코어를 일깨웠다.
혼원과 현천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가운데, 현천의 마나를 끌어냈다.
쏴아아-!
현천의 마나가 노도와도 같은 기세로 체내를 순환했다.
흐름이 점점 외부를 향해 가는 가운데, 이윽고 은회색의 마나가 체외로 흘러나왔다.
‘여기까지가 호신.’
그 상태에서 오른손에 마나를 집중했다.
마치 와류처럼. 나선의 형태로 줄기차게 뿜어낸 끝에.
우우웅-!
현천의 마나는 영롱한 구체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