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녀석은 모든 걸 예측했어, 그러니까
김재학은 거울의 마탑에 들어선 순간 깨달았다.
‘벌써 유물을 획득한 모양이군.’
마탑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방어 마법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게다가 미미한 진동까지 느껴지는 게, 벌써 게이트의 붕괴가 이뤄지는 듯했다.
그 말은 곧 마녀가 이미 보스 몬스터를 처리했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즉 마녀는 최소 유물에 다가섰으며, 어쩌면 이미 수중에 넣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씨익-
김재학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불필요한 수고를 덜어주는군.’
불타는 숲에서의 탐색도 번거로웠다고는 하나, 아무렴 마탑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외부에 존재하는 방어 마법 이상의 방어 체계가 곳곳에 깔려 있는 건 물론.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유물을 얻을 틈도 없이 마탑이 붕괴될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그런 수고로움이 없어진 만큼 김재학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찾아서 죽이고 빼앗는다.’
마음을 정한 즉시 방법을 고민했다.
직접 찾아내서 죽일지,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지.
입맛을 다시며 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
“……호오.”
문득 아래쪽에서부터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가진 특성, ‘초감각’이 여전히 활성화돼 있는 덕분이었다.
‘분명 내가 이곳에 이르렀다는 걸 모를 리는 없을 텐데.’
마녀는 A급 초인이자, 그토록 희귀하다는 A급 마법사였다.
마나의 예민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큼, 초감각 수준으로 기척을 읽는 것 또한 가능할 터.
그럼에도 순순히 다가오는 의미는 다름이 아니었다.
‘정면으로 붙어 보자 이건가?’
김재학은 미소와 함께 슬슬 워 해머를 꺼내 쥐었다.
그 상태로 어두컴컴한 정면을 바라보자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재앙의 마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본 순간, 김재학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마녀의 등 뒤로 생도 한 명이 마법에 속박당한 채 끌려온 까닭이었다.
‘……인질이라.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김재학에게 있어 납치당한 생도는 형편 좋게 둘러대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때문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안 했다.
‘설마 살려 뒀을 줄이야. 추적을 예상했다는 건가?’
꽤나 골치 아파졌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찰나.
“강철의 기사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마녀는 나른한 미소와 함께 빈정거렸다.
도발적인 말투에 화답하듯, 김재학은 대책을 궁리하는 한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아무리 인의를 저버렸다지만 설마 후배까지 인질로 삼을 줄이야. 치졸하구나, 마녀여.”
“아, 이 녀석?”
마녀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더니, 속박당한 생도를 힐끔 곁눈질했다.
그러고는 다시 김재학을 향해 선심 쓰듯 말했다.
“게이트가 붕괴될 때까지 얌전히 있어 준다면, 무사히 풀어줄게. 어때?”
“네 녀석 같은 해악을 세상에 풀어준다? 어림도 없는 소리.”
“흐응, 그럼 이 녀석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김재학은 잠시 침묵했다.
그 모습이 즐겁다는 듯, 오윤진의 미소는 더욱더 진해졌다.
추측건대 마녀는 그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실상 김재학은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
‘마냥 불리하진 않다.’
눈앞의 마녀는 인질 때문에 그가 섣불리 공세를 펼치지 못할 거라 여기고 있을 터.
그리고 이는 절반 정도만 맞는 말이었다.
‘다른 초인들이 지금 상황에 끼어든다면 정말로 손쓸 도리가 없겠지만.’
현재 그는 어디까지나 수호자 길드의 강철의 기사이자, 인솔자인 김재학으로서 이곳에 왔다.
따라서 가면을 유지하기 위해선 생도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당장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갑작스러운 침식 현상에 대응하느라 다른 초인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다면 생도 한 명을 죽이는 것쯤이야, 그에겐 일도 아니었다.
김재학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마녀는 분명 인질로 인해 내 손발이 묶여 있다고 생각하겠지.’
이를 바탕으로 마음을 놓고 있을 터.
바로 그 점을 노릴 셈이었다.
‘타이밍에 맞게 단숨에 처리한다.’
마녀와 생도, 둘을 한꺼번에 죽이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화염과 바람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
생도의 죽음에 그의 흔적이 남는다 한들, 요란한 화염 마법으로 얼마든지 덧씌울 수 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김재학은 왼쪽 팔목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팔목에 찬 아티팩트가 반응했다.
우우웅-!
새하얀 마나로 이뤄진 사각 방패.
거기에 오른손에 쥔 워 해머에도 마나를 덧씌웠다.
그 모습에 마녀의 낯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설마 싸울 셈?”
“대의를 위해서다.”
대답과 함께 김재학은 속박당한 생도를 살폈다.
생도의 표정은 마치 음영이라도 드리운 것처럼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김재학의 모습에 마녀는 재차 빈정거렸다.
“그래, 이제 슬슬 가면을 벗어던지겠다 이거지?”
“쓸데없는 소리.”
“강철의 기사가 아니라 사도로서 본 모습을 드러내려는 거잖아. 이 자리에는 나와 불쌍한 인질, 그리고 너밖에 없으니까.”
마녀의 비아냥이 뜻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그게 정답이든, 아니든. 김재학으로선 더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헛소리는 저승에 가서 마저 하도록……!”
굵직한 목소리로 일갈하며 지면을 박찬 것은 말이다.
쩌-엉!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지면에 균열이 일었다.
짓쳐드는 속도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초인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화륵-!
만만치 않은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김재학의 도약과 동시에 반응하여 화염계 마법을 전개한 것이다.
시야가 온통 시뻘건 화마로 뒤덮인 상황.
그럼에도 김재학은 멈추지 않았다.
그 대신.
처억-
왼손의 새하얀 방패를 앞세웠다.
그러자 순백색의 보호막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때마침 마녀가 전개한 화염계 마법이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발과 함께 메케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그 속으로부터 뛰쳐나온 김재학은 수직으로 워 해머를 내리찍었다.
쩌-엉!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 속에 마녀는 없었다.
대신 그의 등 뒤쪽에서부터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탑을 아예 박살 내 버릴 셈이야?”
다름 아닌 마녀의 것이었다.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눈앞으로 세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화르륵-!
화마를 두른 돌개바람.
바람과 화염, 무려 두 가지 계통의 조화를 이뤄낸 마법이었다.
한 줄기 바람이 닿는 곳마다 모조리 불살라 버리는 위력은 마탑의 붕괴를 한층 가속시켰다.
재앙과도 같은 위력에 김재학은 혀를 짧게 차며 지면을 박찼다.
“네놈이 할 말은 아니다.”
그렇게 김재학은 마녀를 쫓고, 그녀는 물러나며 마법을 전개했다.
고작 두세 번 합을 교환한 것만으로 마탑은 속절없이 붕괴됐다.
그래서인지, 전장은 자연스럽게 마탑에서 불타는 숲으로 옮겨갔다.
의도치 않게 대치하게 된 상황 속에서 김재학은 마녀를 무감정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그의 두 눈에 넋이 나갔는지, 비틀거리는 생도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감은 없다.’
김재학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금 전투 준비를 갖췄다.
이내 본격적으로 코어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 순백으로 이루어진 천사의 형상이 강림했다.
무도 차원이 아닌, 마도 차원에서 비롯된 몇 안 되는 근접 계열 스킬. ‘성휘의 화신’이었다.
“제대로 해보자 이거지?”
김재학의 진신절기와도 같은 스킬 발현에 마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반응했다.
이내 그녀 또한 이에 질세라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에 시뻘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뿐만 아니라 불타는 숲을 뒤덮고 있던 화마까지도 그녀의 마법에 반응했다.
화륵-!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치솟는 불길.
‘용오름’이었다.
무려 다섯 개의 불기둥이 그를 향해 짓쳐들었다.
이를 향해 김재학은 순백색 마나를 짙게 두른 워해머를 그대로 지면에 내리찍었다.
“흐읍!”
그로부터 성광이 치솟는 가운데.
쩌-엉!
서로 간의 절예(絕藝)가 충돌했다.
* * *
같은 시각.
콰앙-!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단숨에 집중됐다.
생도들은 저마다 마른침을 삼켰고, 인솔자를 맡은 초인들은 침음을 흘렸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대지의 혼 길드의 허정민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몇 분은 가서 김재학 초인님께 힘을 보태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제안에 나머지 두 명의 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마녀와의 전투는 격렬해 보였고, 반대로 생도의 목숨이 심히 위태로워 보였다.
때문에 세 사람은 즉시 역할 분배에 나섰다.
그 결과.
“저는 신수연 초인님과 함께 불타는 숲 쪽으로 가보겠습니다. 하승태 초인님, 부디 생도들을 부탁드립니다.”
대지의 혼 길드의 허정민, 그리고 환영검가에서 파견 나온 신수연.
두 사람이 김재학을 도우러 가고, 스페셜리스트 길드 출신의 하승태가 남기로 했다.
“맡겨 주시지요.”
하승태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 허정민과 신수연은 걸음을 서둘렀다.
어두컴컴한 숲을 빠져나와 칠흑 같은 초원을 가로지르자 금세 불타는 숲에 닿을 수 있었다.
들어서기 전, 허정민은 하늘을 한번 바라보며 신수연에게 입을 열었다.
“붕괴가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현실로 돌아가면 마녀를 추적하는 일이 더욱 난처해질 겁니다.”
“그럼 붕괴되기 전까지 납치당한 생도를 무사히 확보해야겠군요.”
“네, 그 점을 최우선 사항으로 두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구체적인 계획까지 정하고 나서야 불타는 숲에 들어섰다.
숲 전체를 둘러싼 화마는 생각보다 세가 약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겠어.’
허정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결 수월하게 걸음을 서둘렀다.
* * *
강철의 기사라는 이명은 과연 허명이 아니었다.
오윤진은 용오름 하나가 광휘를 휘감은 일격에 흩어져 버리는 광경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감상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쩌-엉!
화마를 뚫고 김재학이 순식간에 짓쳐드는 까닭이었다.
“치잇!”
오윤진은 혀를 짧게 차며 마나를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지근거리를 워프하는 것과 동시에 안일한을 살폈다.
속박의 끈을 길게 늘어뜨린 덕분일까.
얼굴이 살짝 그을렸을지언정, 그의 상태는 멀쩡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그가 전해 준 계획을 되새겼다.
‘……정말로 괜찮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안일한이 제시한 계획은 터무니없었다.
다만 불안한 감정과는 별개로 상황은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안일한이 예측한 대로 김재학은 인질의 안위 따윈 고려하지 않고 전력을 발휘했다.
더하여 그녀는 안일한이 요구한 대로 마법을 최대 규모로 펼쳤다.
그 결과.
‘가까워지고 있어.’
가까워지는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총 두 사람. 이를 확인한 순간 오윤진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길 안내, 유물 탐색, 그리고 김재학의 태도까지. 녀석은 모든 걸 예측했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의 예측은 맞아떨어질 것이다.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마땅한 시기를 가늠했다.
기척이 충분히 가까워졌고, 김재학이 반격해올 타이밍이 겹치는 순간.
‘……지금!’
오윤진은 그대로 안일한을 방패막이처럼 앞세웠다.
그럼에도.
“어림없다!”
김재학의 기세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대로 안일한은 물론, 그녀 자신까지 뭉개 버릴 기세로 워 해머가 날아들었다.
오윤진은 마치 이때를 노렸다는 듯.
고오오오-!
순간적으로 필요한 마법들을 전개했다.
마지막으로 워프를 시도한 순간.
쩌-엉!
새하얀 광휘가 안일한을 뒤덮어 버렸다.
때마침 오윤진은 여파가 미치지 않는 거리에 착지했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단어는 하나였다.
즉사(卽死).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고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제발, 제발……!’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며 고개를 돌렸을 때.
사그라드는 빛 너머로 그녀는 목격했다.
꿈틀-
즉사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한 일격을 정통으로 맞은 안일한.
그가 김재학의 어깻죽지를 붙든 채 꿈틀거리는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