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아직은 때가 아니다
잠시 후.
“일한아, 그럼 내일 봐!”
배시시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주는 차은월.
그녀는 근래 들어 가장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내 조언, 정확히는 그림자 녀석의 조언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낸 덕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좀 더 연습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줬다.
“어. 먼저 들어갈게.”
그대로 차은월을 뒤로한 채 기숙사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러고는 여태 미뤄뒀던 의문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꿈속에 나온 여성은 정말로 차은월인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림자 녀석은 대체 그녀와 무슨 관계인지.
마지막으로 녀석의 정체부터, 궁극적인 목적까지.
‘한번 제대로 물어봐야겠어.’
즉, 녀석에게 필담을 시도하기 위해 질문할 내용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녀석에게 온전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에 관해선 확신이 잘 안 섰다.
그럼에도 구태여 질문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김한석 교관님에게서 느꼈던 기묘한 감각.’
정확히는 어딘가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는 점.
그 부분이 가장 컸다.
속으로 계속해서 의문들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기숙사에 도착했다.
들어선 즉시 책상 앞에 마주 앉았다.
그러고는 생각해 둔 질문들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이 정도면 됐겠지.”
당장 오늘 느꼈던 의문부터, 녀석의 온전치 못한 의식으로 인해 여태 풀지 못했던 근본적인 의문까지.
그야말로 생각나는 내용을 전부 적고 나니 후련한 마음이 드는 한편.
가슴 한구석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확실한 건 녀석의 기억, 그 출처가 미래를 바탕으로 한다는 건데.’
이는 곧 미래를 파고드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앞날의 사건들을 알게 됐을 때.
과연 일개 개인에 불과한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당장 녀석이 남긴 메모의 뉘앙스만 봐도 그랬다.
‘격변부터 제거까지.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만일 그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면?
그 너머에 감히 내가 상상조차 못 할 최악의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걸 알게 됐을 때, 과연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런 생각들이 번뇌처럼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이를 의식한 순간.
“……후우.”
나는 일부러 크게 심호흡을 했다.
동시에 각오를 다지듯, 마음을 다잡았다.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간에, 이미 내 일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해.’
적어도 그림자 녀석과 몸을 공유하는 이상, 어떤 일이 닥치든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모를까, 알 수 있음에도 이를 외면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철저하게 파악하는 거야.’
나아가 이점으로 활용하고, 마땅한 대비를 갖추는 것.
그게 지금의 내가 지녀야 할 올바른 마음가짐이었다.
마치 세뇌하듯,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자 불안감도 서서히 옅어져 갔다.
동시에 객관적으로 내가 가진 무기들에 생각이 닿았다.
‘그림자 녀석이 알고 있는 건 단순히 미래 지식뿐만이 아니야.’
녀석은 무려 소임이라 일컬을 만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더하여 그걸 위한 대비책 또한 갖추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좋은 성적, 압도적인 성장을 이뤄낸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게 나는 마음의 준비를 갖췄다.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
…
그날 밤.
“…….”
그림자는 다시 한번 공책에 적힌 내용을 정독했다.
여전히 그림자처럼 일렁이는 눈빛에는 한 줄기 이채가 서려 있었다.
그만큼 질문들이 날카로운 한편, 그로부터 모종의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녀석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심리적인 문제라기보단 능력, 가진 바 역량이란 측면에서 그랬다.
더욱이 그의 정체, 궁극적인 목적에 관한 대답은 애초부터 간단명료한 답변 자체가 불가능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납득하려면, 과정 전체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 동기화율이 발목을 잡았다.
‘애초에 시간이 필요하고, 모든 건 그에 맞게 계획되어 있으니.’
때문에 오히려 그림자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녀석 또한 그러길 바랐다.
그런 마음으로.
사각사각-
답변을 작성했다.
대답해 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급적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말이다.
그렇게 쭉 써 내려간 끝에.
“……!”
마지막 질문에서 멈춰 섰다.
내용은 다름이 아니었다.
-김한석 교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는지.
김한석.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름 석 자가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감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그게 아니면…….’
그림자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한동안 마지막 질문을 주시했다.
사실 그의 정체를 밝히는 것 또한 앞선 질문과 마찬가지였다. 아직 이른 것이다.
하지만.
‘경거망동하진 않을 테니.’
여태 지켜본 녀석의 성향을 믿고 펜을 들어 올렸다.
그렇기에 다시금 답변을 써 내려갔다.
-김한석. 그가 바로 다가올 격변의 시발점이자,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존재다.
그리고 그는…….
* * *
다음 날, 7교시.
“후우.”
차은월은 심호흡과 함께 3층, 마법 대련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
찌릿-
한 쌍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늘상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무기술 심화 수업이 시작된 이후부터는 그랬다.
때문에 차은월은 상대의 정체에 의문을 떠올리는 대신, 적의로 가득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러고는 상대의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오윤서…….’
실전 대련 수업에서 항상 수위를 차지하는 생도이자, 이번 수행평가의 1등.
동시에 차은월, 그녀 자신을 무참히 꺾은 당사자인 오윤서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오윤서의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라.’
소중한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를 되새기며 새삼스레 다짐했다.
‘오늘이야말로 설욕하는 거야……!’
속으로 투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
“다들 모였나요?”
서글서글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마법 수업을 전담하는 김한석 교관이었다.
그의 등장에 차은월은 천천히 오윤서를 향한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 사이 김한석은 인원 파악을 끝마치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1학기 기말고사까지 앞으로 한 달쯤 남았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무기술 심화 수업의 실기는 총 두 종목, 전부 대련으로 치르게 될 테니 오늘도 수업은 마법 공방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마법 공방.
둘씩 짝을 지어 마법으로 공격과 방어를 교환하는 식의 대련을 의미했다.
공방은 자유이며, 대련은 한쪽에서 패배를 시인하거나 교관의 재량으로 승부를 결정지을 때까지 이어졌다.
한동안 같은 방식으로 수업이 이뤄진 만큼, 김한석은 설명을 생략하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럼 지금부터 두 명씩 짝을 이루세요. 원하는 상대가 있다면 합의 하에 짝을 짓고, 남은 인원은 제 임의대로 파트너를 구성하겠습니다.”
김한석이 싱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말을 맺었다.
그의 지시에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반면, 차은월은 가만히 선 채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 생도는 다름 아닌 오윤서였다.
“넌 나랑 해.”
강압적인 말투로 쏘아붙이는 오윤서.
그녀에게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윤서 생도? 오늘도 은월 생도랑 하려는 건가요?”
김한석이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다가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를 향해 오윤서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네. 문제없죠?”
“으음, 엄밀히 말해서 문제는 없지만, 혹시 계속해서 은월 생도를 상대하려는 이유가 있을까요?”
“교관님도 아시다시피, 차은월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잖아요. 단지 그뿐이에요.”
뛰어난 상대를 향한 승부욕, 내용은 그랬으나 말투에는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마치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에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심지어 오윤서는 이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은월 생도는 어때요?”
김한석은 딱히 제지할 생각이 없다는 듯 차은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면 차은월은 잔뜩 위축된 채로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는 그랬지만.
“저도 오윤서 생도와 맞붙고 싶어요.”
오늘은 달랐다.
말투, 태도, 거기에 눈빛까지.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라진 모습에 김한석은 일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이채를 띤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둘 다 우수한 생도이니만큼 따로 주의는 필요 없겠죠?”
김한석의 물음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답을 들은 즉시 물러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선공은 윤서 생도부터. 시작하세요.”
허가가 떨어진 즉시.
타닷-
오윤서는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간격을 벌렸다.
이내 왼손에 쥔 오브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웅-!
제법 강렬한 기세로 모여드는 마나와 함께 오브가 허공에 떠올랐다.
이어서 그녀의 오브로부터 시퍼런 마나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공에서 구의 형태를 이뤄 가더니.
“하압!”
빠른 속도로 두 배, 네 배, 여덟 배.
순식간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진 특성, ‘마력 확산’이 발현된 것이다.
이에 맞서 차은월은 방어 마법이 아닌, 특성.
마력 역장을 전개했다.
화아앗-!
마나의 장막이 차은월의 코앞에 펼쳐졌다.
반원 형태의 마력 역장, 이를 확인한 오윤서는 코웃음을 쳤다.
“그깟 느려터진 장막 따위!”
외침과 함께 수십 개에 달하는 마나의 탄환을 일시에 쏟아냈다.
콰앙-! 쾅!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포화 속에도 차은월의 마력 역장은 끄떡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쯤은 예상했다는 듯.
타닷-
오윤서는 빠르게 차은월의 측면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곧장 두 번째 공격 마법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녀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차은월의 치명적인 단점, 공격 마법과 특성 발현 사이에 존재하는 딜레이를 말이다.
‘벌집을 만들어 주지!’
입꼬리를 올린 채 마법을 전개하려는 순간.
쿠구구궁-!
별안간 차은월 쪽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불어 어마어마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
오윤서는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계산은 완벽했다. 여태까지의 경험상 그랬다.
하지만 피부에 와닿는 감각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찰나지간 고민하던 오윤서는.
“……이익!”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공격 마법에서 방어 마법으로 전환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마나의 순환 경로를 수정, 간신히 방어 마법을 구현했을 때.
후웅-!
거대한 무언가가 엄청난 기세로 날아들었다.
마나의 포탄. 그런 표현이 절로 떠오를 만큼 무지막지한 규모였다.
그로 인해 오윤서의 두 눈에 경악의 빛이 서린 순간.
콰-앙!
그대로 마나 방벽에 작렬했다.
쩌적-!
충격을 이기지 못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는 방벽.
더불어 충돌의 여파로 오윤서는 주르륵 밀려났다.
그런 와중에도 차은월의 공격 마법은 조금도 세가 줄지 않았다.
때문에 오윤서는.
“……끄윽!”
이를 악문 채로 코어의 마나를 뽑아낼 수밖에 없었다.
신음을 흘려가며 마나를 쏟아낸 끝에서야 간신히 막아 냈다.
잘게 떨리는 어깨를 왼손으로 감싸 안은 채 겨우 고개를 드는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어서.
쏴아아-!
또다시 어마어마한 마나의 파동이 감지됐다.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말이다.
“……아.”
오윤서는 멍하니 탄식했다.
지근거리, 거기에 이만한 위력과 규모라면 더는 손쓸 도리가 없는 까닭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이번에는 네가 졌어.”
어느새 다가온 차은월이 무감정한 어조로 확인사살을 가했다.
그녀의 말대로였으나, 오윤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답 없는 모습에 차은월의 눈빛이 일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그만. 이번 승부는 은월 생도의 승리네요.”
김한석이 순식간에 다가와 마나의 포탄을 손짓 한 번으로 흩어 버렸다.
그제야 차은월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녀를 향해.
“혹시 은월 생도는 본인이 가진 마력 역장의 고유 효과를 찾아낸 건가요?”
김한석이 어딘가 미묘한 기색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