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혼을 앗아가는 일섬(一閃)
다음 날, 저녁.
“일한이, 오늘 저녁에는 무슨 단련을 할 거지?”
“무기 훈련실,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나는 임강철에게 대답을 돌려주는 한편.
머릿속으로 그림자 녀석이 전해준 무공을 떠올렸다.
‘탈혼지(奪魂指), 혼을 앗아가는 지법이라.’
권법에 이어서 이번에는 지법(指法)이었다.
다소 생소하게 다가왔으나, 이전 고태식 교관의 시범을 떠올리니 제법 기대가 됐다.
게다가 녀석이 덧붙인 설명에 따르면, 이 무공은 내가 필요로 하는 목적에도 적합해 보였다.
-본래 탈혼지는 비장의 한 수, 즉 구명절초(救命絶招)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대상의 허를 찌르는데 특화된 무공이다.
따라서 가급적 결정적인 순간에 활용하기를 권한다.
위급한 순간, 목숨을 구제해 줄 비장의 절초.
자연히 특징 또한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데 특화된 모양이었다.
‘과연 그 괴물 같은 양반에게 허점이 있을까 싶지만.’
고태식 교관은 A급 초인이다.
만에 하나 그에게 허점이 있다고 한들, E급에 불과한 내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실전 대련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수행평가의 일환이니.’
고태식 교관과의 대련은 공식적인 시험의 일환이다.
분명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춰 줄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영 없지는 않을 터.
적당히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을 때, 임강철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알겠다! 그럼 이따가 보자고!”
“어, 고생해.”
그렇게 아쉬운 기색의 임강철을 뒤로한 채, 무기 훈련실을 향해 갔다.
동시에 머리로는 계속해서 탈혼지에 관해 생각했다.
‘구명절초라 그런가? 좀 특이했지?’
현천강기부터 흑영보, 복마구권까지.
그림자 녀석이 내게 스킬을 전수해 줄 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가장 먼저 몸에 각인시키고, 그다음에야 명칭과 구결을 전해 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러모로 달랐다.
곧바로 무공의 명칭과 더불어 한 줄짜리 구결을 알려 준 것이다.
‘게다가 동작도 겨우 한 번 보여 줬을 뿐이고.’
아침에 영상으로 확인해 본 결과, 녀석은 처음 마력 단련실에 들어섰을 때 딱 한 번.
탈혼지로 추정되는 동작을 선보였다.
과연 무공의 명칭만큼이나 느껴지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후로는 현천강기나 흑영보, 복마구권을 반복해서 수련할 뿐이었다.
‘거기에 뭔가 의미가 있는지.’
무기 훈련실을 향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초식은 하나에 구결도 한 줄이다.
그러니 고민하는 것보단 차라리 직접 시험해 보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며 무기 훈련실에 들어서는 순간.
“어? 안일한?”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윤설하였다.
보아하니 그녀도 저녁 단련을 위해 무기 훈련실에 온 모양이었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녀는 반가운 기색으로 맞이해 줬다.
“가상 대련하러 온 거야?”
“어. 시험해 볼 게 있어서.”
“흐응, 그렇구나.”
“너는?”
“나도 비슷해.”
“그런 것 치고는 안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무덤덤하게 되묻는 말에 윤설하는 난처한 듯 웃었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가상 대련실 입구 쪽에 있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익숙한 사람이 가상 대련을 진행 중이었다.
“차은월? 둘이 같이 있었구나.”
다름 아닌 차은월이었다.
나를 포함, 우리 넷 중 유일하게 마법 계열을 선택한 그녀의 가상 대련이라 그런 걸까.
흥미가 동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가상 대련 수업 때였나? 심화 과정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윤설하와 나란히 선 채로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때마침 모니터 속 차은월의 정면에 푸르스름한 장막이 생성됐다.
마치 보호막 같은 장막에 더미 데이터의 일격이 튕겨 나가는 순간.
“저건…….”
무의식적으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 반응에 윤설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력 역장, 그게 은월이가 가진 특성이래.”
“마력 역장? 그보다 특성이라니.”
“마법 계열을 택한 생도들은 아예 처음부터 특성을 다루는 법부터 배우나 봐.”
커리큘럼의 차이부터 마나 활용의 차이까지.
윤설하의 설명은 제법 흥미로웠다.
이를 귀담아듣는 도중,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리 잘 알아?”
“아, 이거? 그러니까…….”
별안간 난처한 웃음과 함께 우물쭈물하는 윤설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그게, 사실 은월이가 도와달라고 했거든. 대련을 좀 봐달라고.”
“……대련을?”
“응, 나도 잘 몰라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주저하니까 일단 설명해 줬어. 그래서 알게 된 거야.”
그녀의 대답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이것 때문에 근래 들어 표정이 계속 안 좋았던 건가?’
여태껏 차은월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던 이유.
그게 지금 윤설하가 설명해 준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듯했다.
이제야 납득이 가는 한편,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차은월이 마력, 마법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 상상이 잘 안 되는데.’
예전에 한번, 차은월에게 마나 호흡법을 가르쳐 주며 깨달았다.
그녀는 마력 스텟의 성장뿐 아니라 습득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라는 걸 말이다.
그런 그녀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
의아하다는 생각과 함께 모니터를 보는 순간, 때마침 차은월의 행동이 급변했다.
타닷-
마력 역장을 거둬들이는 것과 동시에 다급하게 간격을 벌리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이 살짝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찰나.
우우웅-!
이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둥둥 떠있는 오브에서 시퍼런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 상태로 마나는 구체를 이루며 그녀의 체구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내 그녀는 마나의 구체를 그대로 더미 데이터를 향해 떨궜다.
콰앙-!
굉음과 함께 빛무리가 일순간 화면을 뒤덮었다.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는 위력.
탄성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문제 있는 거 맞아?”
내 혼잣말에 윤설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음, 마법이나 마력 활용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실전 대련은 조금 다른가 봐.”
“그런가? 근데 왜 여태 말을 안 했지?”
“음, 일한이 너도 최근까지 정신없었잖아? 괜히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일종의 배려를 해 준 모양이었다.
이에 잠시 고민해 본 결과.
‘당장 뾰족한 수가 없으니, 적어도 본인이 부탁할 때까진 모르는척해주는 게 맞겠지?’
괜히 그녀가 무안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정도로 생각을 정리했다.
때문에 나는 윤설하에게 간단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라도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달라고 전해 줘.”
“응, 그렇게 할게.”
그녀의 대답을 뒤로한 채, 나는 차은월과 떨어진 가상 대련실로 들어섰다.
장비를 착용하고, 가상 대련을 시작함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탈혼지의 동작을 떠올렸다.
그대로 재현하듯.
휘익-!
검지를 쭉 뻗었다.
그렇게 수십 회를 반복했다.
동작이 슬슬 몸에 익었을 무렵.
‘이쯤에서 한번 시도나 해 보자.’
속으로 탈혼지의 구결을 읊조렸다.
그 순간 한 줄짜리 선문답에 온전히 빠져들었다.
오묘한 이치가 온몸에 새겨지는 듯한 느낌.
이는 스킬을 체득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감각이었다.
천천히 눈을 뜨며 곧바로 상태창부터 살폈다.
그곳에는.
-탈혼지(B+)
혼을 앗아가는 일섬(一閃).
무려 B+급의 스킬이 생성되어 있었다.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으나, 일단 눈앞에 집중했다.
끼익-
삐그덕거리며 짓쳐 드는 목각 인형.
녀석을 향해 곧장 스킬, 탈혼지를 발동시켰다.
그 순간, 불그스름한 반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점들은 도대체.’
녀석의 전신 곳곳에 나타난 반점.
수십 개의 점이 불규칙적으로 찍혀 있는 광경은 꽤나 징그러웠다.
‘위치로 보아 급소만 가리키는 건 아닌 듯한데.’
의문을 뒤로한 채 일단 한번 써 보기로 했다.
목표는 녀석의 오른쪽 어깻죽지에 새겨진 반점.
그대로 검지를 들어 올리자 알 수 없는 기운이 일었다.
스스스-
어디서 비롯됐는지 모를 음산한 기운.
추측건대 스킬 자체적으로 발휘되는 특수한 효과인 듯했다.
이내 검보랏빛 기운은 팔을 타고 검지로 흘러들었다.
완전히 손가락을 뒤덮은 순간, 그대로 내질렀다.
푸욱-!
검지는 너무나도 수월하게 녀석의 어깻죽지를 꿰뚫고 들어갔다.
마치 두부를 가르는 듯한 감각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호오, 이런 게 지법이구나.’
상대가 더미 데이터로 이루어진 목각 인형임을 감안해도 위력은 상당한 듯했다.
게다가 복마구권을 처음 펼쳤을 때처럼 검보랏빛 기운의 효과 또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일시적으로 행동불능 상태에 빠뜨리는 거라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이를 증명하듯, 손을 거둬들이자 녀석의 상체가 삐거덕거렸다.
끼, 익-
마치 에러가 걸린 양, 운신이 부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스킬의 위력부터 부가적으로 발휘되는 효과까지, 느낌은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구명절초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음…….’
그림자 녀석이 밝힌 탈혼지의 목적, 의도에 부합하는지는 살짝 의문이 들었다.
정확히는, 위력적일지언정 허를 찌르는 데 용이하다는 느낌은 다소 약한 것이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탈혼지도 결국 상대를 정확히 노려서 타격을 성사시켰을 때나 의미가 있을 테니까.’
애초에 녀석에게 무공을 요구한 이유는 간단했다.
괴물 같은 고태식 교관을 상대로 단 한 번.
그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혼지라는 무공의 원리 자체는 어딘가 정직한 느낌이었다.
‘초식도 하나뿐이고, 역시 우직하게 역량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찰나.
불현듯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혹시 그림자 녀석이 탈혼지를 딱 한 번만 보여 준 이유가 있는 거라면?’
녀석은 단 한 번의 시범 이후, 곧장 다른 무공의 연습으로 넘어갔다.
만일 거기에 녀석의 의도가 숨어 있다면.
가능성을 떠올린 즉시 마음을 먹었다.
‘일단 시험해 보자.’
…
…
…
잠시 후.
삐거덕-
부자연스럽게 온몸을 뒤트는 더미 데이터.
엎어진 채 꿈틀거리는 녀석을 옅은 미소와 함께 내려다봤다.
동시에 실감했다.
‘……이렇게 쓰는 거구나.’
탈혼지의 묘리.
진정한 쓰임새를 깨우쳤음을 말이다.
* * *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흘러 월요일.
어느새 수행평가를 치르는 날이 찾아왔다.
5, 6교시, 이론 수업의 쪽지시험을 거쳐 7교시.
실기 수업의 첫 번째 수행평가는 마력 스텟의 활용 테스트로 시작됐다.
팀 단위가 아닌, 단독으로 스텟 서킷 트레이닝의 마지막 코스를 완주하는 것.
분명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다소 연습에 소홀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현천강기만큼은 꾸준히 수련했으니까.’
기본적인 스텟은 물론, 마력 스텟도 어느새 23스텟을 찍었다.
여전히 마나량은 부족했지만 현천강기의 진가의 발휘, 그리고 제어는 상당히 늘었다.
그 덕분일까.
“안일한 생도, 384점으로 수행평가 점수는 96점이다.”
96점, 윤설하를 비롯하여 최상위권 생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점수를 획득했다.
“일한이, 제법인데?!”
“고마워.”
엄지를 치켜세우는 임강철.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력 과목의 점수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부분이니까. 정작 문제는 다음 과목이다.’
8, 9교시, 총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무기술 심화 수업의 수행평가.
특히 내가 속한 건틀렛 과목은 괴물 같은 고태식 교관과의 대련이었다.
지옥 코스 수업부터, 개인 교습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유효타는커녕 그를 스쳐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감을 더했다.
‘아직 비장의 무기는 단 한 번도 드러낸 적 없으니.’
탈혼지의 진정한 위력.
이를 확인할 순간이 머지않았음을 느끼며 나는 임강철과 함께 소훈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