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번에도 역시 활용은 네 몫이다
다음 날.
“지금부터 4교시 수업을 시작…….”
평소와 다름없이 4교시 수업이 시작된 가운데.
나는 뜻밖의 문제로 인해 1교시부터 지금까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원인은 그림자 녀석이 남겨 놓은 메모 때문이었다.
‘이게 참.’
어젯밤, 나는 녀석에게 필담을 시도했다.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심인욱의 전후 사정에 관한 질문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과연 이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말이다.
때문에 나는 여태껏 몇 번이나 확인한 내용을 다시금 살펴봤다.
첫 내용은 무난했다.
-일단 상황 자체는 썩 나쁘지 않다. 고생했다.
심인욱의 감정 문제, 환영 마법 사용자와의 연관성 등. 너의 추측은 대체로 타당하다.
치하의 말과 내 추측들에 대한 인정.
이어지는 내용부터가 진짜였다.
특히나.
-그럼에도 해결책으로써 네게 승리를 요청한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 번째는 그의 권태로움을 없애 환영 마법이 파고들 틈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
내게 심인욱과의 일전에서 승리를 요구한 두 번째 목적이 그랬다.
-그리고 두 번째, 승부를 통해 심인욱의 역량, 강점, 약점을 미리 파악하는 것.
이는 훗날 최악의 상황이 닥쳐왔을 때 그를 효과적으로 상대하고, 나아가 제거하기 위함이다.
효과적으로 상대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강경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한 내용이었다.
‘제거라니. 그림자, 이 녀석은 대체…….’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편, 저번에 이어 또다시 언급된 환영 마법에 관한 의문이 몸집을 부풀렸다.
다행히 이어지는 내용에 환영 마법의 부연 설명이 담겨 있었다.
-환영 마법은 일종의 씨앗처럼 마음의 틈을 파고든다.
발아하고, 일정 수준 성장할 때까지도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교묘하게 작용한다.
그렇기에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특히 심인욱, 혹은 그 이상의 자질을 갖춘 이들이 노출될 경우, 훗날 막심한 피해로 돌아온다.
환영 마법의 작동 원리와 난점, 그리고 폐단까지.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폐단’ 부분이었다.
‘……내용은 일단 환영 마법을 방지하지 못했을 경우 나타나는 결과인 것 같긴 한데.’
구체적으로 심인욱이 언급됐다는 점부터, 묘하게 확정적인 어조까지.
꼭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생각이 가닿은 순간, 여태 그림자 녀석이 언급해 왔던 키워드 하나가 떠올랐다.
‘격변에 대비한다는 게 이런 위험한 느낌이었을 줄은.’
훗날 닥쳐올 격번.
처음 접했을 땐 단지 범상치 않은 정도였으나, 이제는 위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녀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는 격려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당연히 걱정되겠지. 하지만 괜찮다.
모든 건 계획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안배도 마련되어 있으니.
더욱이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네 설명대로라면 현재 상황은 나쁘지 않다.
반응을 보아하니, 가장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권태로움은 이미 사라진 모양이니까.
다만 앞으로도 상황 공유를, 그리고 체급을 키우기를 부탁한다.
부탁을 마지막으로 녀석의 메모는 끝을 맺은 반면.
고민은 끝없이 깊어져만 갔다.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얽히는 가운데, 나는 일부러 한 생각에 집중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이번 메모를 통해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적어도 그림자 녀석의 목적이 미래의 알 수 없는 위험을 대비하는 데 있다는 것.
게다가 윤설하부터 심인욱까지.
내 주변 인물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 또한 영향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하는 일.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다름이 아니었다.
‘미래에 무엇이 닥쳐오든 거기에 대처하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해.’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녀석에게 집요하게 매달려 미래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들 마찬가지였다.
결국 위험에 처하는 건 내가 될 것이며, 해결하는 것 또한 내 몫이 될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겐 녀석이 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미리 알고 대비가 가능한 데다가, 녀석의 지식은 나를 보다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특히 후자 쪽에 생각을 집중했다.
스텟을 넘어 보법, 마나 호흡법에 무공 스킬까지.
녀석은 내게 있어 일종의 무고(武庫)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무엇일까.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이걸로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다들 식사 맛있게 하고, 내일 수업에서…….”
어느새 수업이 끝났다.
이에 나는 슬슬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눈앞에 있는 일부터.’
심인욱의 문제.
그와의 대련을 위해선 수행평가 만점을 받아야 했다.
일단 거기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라도 그림자 녀석에게 필요한 힘, 능력을 요청해야겠지.’
한층 적극적으로 부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정리를 끝마쳤을 무렵.
“으어, 잘 잤다! 일한이, 점심 먹으러 가자!”
때마침 임강철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대로 잽싸게 몸을 일으키더니.
“애들 불러올게! 기다리고 있어, 일한이!”
곧장 윤설하, 차은월을 향해 달려나갔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에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슬슬 몸을 일으키는 순간.
“하여간! 심인욱 그 싸가지는!”
복도에서부터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인욱?’
여태 골몰하고 있던 이름이 언급돼서 그런지, 흥미가 동했다.
서둘러 출입구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이자 대화 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들려왔다.
“사람이 기껏 권해 줬는데, 대답은커녕 고개도 안 드는 건 대체 무슨 경우야!”
“아하하, 진정해 윤서야. 많이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하여간 유진이 넌 사람이 너무 착해서 탈이야!”
확인 결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평소 심인욱과 함께 다니는 두 사람.
오윤서, 그리고 백유진이었다.
‘심인욱과 함께 있는 건 아닌가 보네.’
그대로 관심을 거두려는 찰나.
“그나저나 유진아, 괜찮아?”
“응?”
“아까부터 계속 인상 쓰고 있잖아? 몸 상태가 안 좋은가 해서.”
오윤서가 별안간 팔꿈치로 백유진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 순간 백유진의 웃는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윽, 거긴 만지지 마.”
“어, 엇?! 미안! 다쳤어?!”
“……별거 아니긴 한데 그냥, 어젯밤에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거든. 아하하.”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백유진.
오윤서는 의아했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악몽은 아니고, 으음. 대련하는 꿈을 꿨다고 할까?”
“대련? 그래서?”
“으응, 상대가 꽤 강해졌더라고.”
“으음……?”
백유진의 미묘한 어조에 오윤서는 물론.
‘강한 게 아니라 강해졌다?’
나까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순간.
“일한이, 가자!”
임강철이 내게 다가왔다.
‘……희한하네.’
일순 의문이 들었으나, 채근하는 임강철 때문에 잠시 미뤄 두기로 했다.
그러고는 친구들과 함께 식당을 향해 갔다.
* * *
6교시가 끝난 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7교시.
무기술 심화 수업을 위해 소훈련실로 이동했다.
들어서는 순간, 한 사람이 바로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심인욱이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팔뚝에 붕대? 게다가 얼굴도 좀 이상한데?’
양 팔뚝에 칭칭 감아둔 붕대와 오른쪽 뺨을 깊게 가로지르는 자상(刺傷)까지.
마치 날붙이를 든 누군가와 한바탕 격전을 벌인 듯한 흔적이 눈에 띄었다.
묘하게 눈길이 가는 까닭에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스윽-
별안간 심인욱의 고개가 돌아갔다.
정확히 내 쪽으로 말이다.
의도치 않게 눈이 마주친 상황,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저벅저벅-
어째선지, 심인욱은 제 친구들을 뒤로한 채 나를 향해 말없이 다가왔다.
내 앞에 마주 섰을 때.
“난 이미 해결했다. 이제 남은 건 너뿐이다.”
별안간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놨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게도 분명 설욕하고 싶은 부분이 있겠지. 하나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
“강해져라. 만점을 받아 조건을 달성해라. 그리고 다시 내게 도전해라.”
그렇게 일방적으로 제 할 말을 마친 심인욱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느닷없는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했으나.
‘만점? 조건? 설마…….’
불현듯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름 아닌 고태식 교관이 했던 말이었다.
-단, 네놈에게도 조건을 달도록 하지.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받아라. 그럼 허락해 주지.
대련을 위한 선결과제.
심인욱은 바로 그 점을 말하고자 한 듯했다.
‘내용 자체는 이상하지 않은데.’
정작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다름 아닌 그의 태도였다.
적개심을 넘어 살기를 일으켰을 때와는 180도 달랐다.
그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임강철이 신기하다는 듯 내게 물어왔다.
“뭐야, 일한이. 둘이 언제 친해졌지?”
“……글쎄.”
이상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상 행동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들 모였나? 빨리 집합해라, 애송이들!”
어김없이 시간에 맞춰 나타난 고태식 교관.
그의 지시에 각 코스별 집합을 마쳤을 때.
“교관님, 질문 있습니다.”
별안간 심인욱이 손을 번쩍 들어올린 것이다.
평소 그의 행실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상한 행동이었다.
하나 고태식 교관은 별다른 감흥 없이 그저 심인욱을 위아래로 훑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꿈틀-
입가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하룻밤 새 눈빛이 꽤나 쓸 만해졌군. 그래서?”
“……수업 코스를 변경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흐음, 초급자용을 원할 리는 없고. 왜, 네놈도 지옥을 맛보고 싶어졌나?”
“네.”
심인욱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극을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좁히고자 합니다.”
마치 선언하듯, 물음에 답하는 심인욱.
그의 태도에 고태식 교관의 입가가 사납게 요동쳤다.
“좋다! 네 녀석도 이쪽에 와서 서라!”
그는 호탕하게 허가를 내리고는.
“또 지옥을 맛보고 싶은 애송이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지원하도록!”
다른 생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나둘씩 고태식 교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가운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심인욱한테 심경의 변화가 있는 모양인데.’
일단 심인욱의 태도가 변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정확히 어떤 식의 변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딱히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일단 지켜봐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문득 그림자 녀석이 남긴 메모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효과적으로 상대하고, 나아가 제거하기 위함이다.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좋은 방향이길 바라는 수밖에.’
그림자 녀석에게 남길 메모를 생각하며 수업에 임했다.
* * *
그날 밤.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22%]
-[????의 그림자]가 평범한 수준의 분별력과 온전한 기억의 절반이 깃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깨어난 그림자는 가장 먼저 방을 둘러봤다.
이내 책상 위에 공책이 펼쳐져 있음을 확인하고, 그대로 다가갔다.
저벅저벅-
그곳에는 적지 않은 분량의 전언이 적혀 있었다.
내용은 두 가지였다.
심인욱의 심경 변화, 그리고 한 가지 요구.
이를 단숨에 읽어내린 그림자는 묘한 기색으로 탄성을 흘렸다.
“……호오.”
계획과 실상 사이에는 언제나 오차가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계획에는 최악의 상황과 그에 따른 행동 강령도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대 이상으로 일이 잘 풀렸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나이 또래가 이상한 건지, 그게 아니면.
‘녀석이 대단한 건지.’
그림자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속으로 한 가지 선택지를 지웠다.
‘제거는 보류.’
그러고는 녀석이 요구한 내용을 다시금 더듬어 봤다.
-괴물 같은 존재를 상대로 유효타를 가할 수 있는 비책이 필요함.
당돌하기 짝이 없는 내용.
하나 그림자는 기꺼이 머릿속에 담긴 여러 가지 옵션들을 헤아렸다.
그중에서 한 가지 적당한 옵션을 찾아냈다.
‘혼을 앗아가는 지법.’
본래 이는 위기의 순간, 한 번 정도는 목숨을 보존케 할 구명절초(救命絶招)에 해당했다.
그만큼 상대와의 수준 차이가 극심한 상황이라면, 전략적으로 충분히 활용할 여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전투에 미친 스승에게 그렇게 배웠다.
새삼스럽게 이를 떠올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활용은 네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