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패왕(霸王)의 걸음으로
“그건 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해라.”
고태식 교관은 영문 모를 소리와 함께 손가락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자 그의 곁에 서 있는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심인욱이었다.
‘내가 아니라 심인욱한테 하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한편.
문득 고태식 교관이 수업 시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불만이 많아 보이는군. 더 듣고 싶거든 방과 후, 소훈련실로 찾아와라.
아무래도 심인욱은 그 말을 듣고 찾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둘이서 별말 없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아, 대화는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심인욱의 사정에 관해 뭔가 듣겠거니 싶었는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일한이, 들어가자고!”
임강철이 뒤에서 나를 채근했다.
그에게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곧장 소훈련실로 들어갔다.
그 순간부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일단 고태식 교관의 앞으로 다가갔다.
“왔냐.”
“네. 그나저나 교관님, 심인욱 생도는……?”
입구에서부터 교관님의 앞에 마주 서기까지.
심인욱은 계속해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눈빛에 담겨 있는 기색은 수업 시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일단 적개심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새삼 심인욱과 고태식 교관, 둘이 나눴을 대화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뭐, 대충 참관한다고 생각해라.”
고태식 교관은 단지 무성의하게 손을 휘저을 뿐.
딱히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에 입맛을 다시던 도중, 잠시 잊고 있던 질문이 떠올랐다.
‘마침 심인욱도 같은 자리에 있겠다.’
지금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 교관님. 질문 있습니다.”
“음? 질문?”
“네. 오늘 수업 시간에 심인욱 생도에게 말씀하신 내용에 관한 부분입니다.”
“호오, 그래서?”
내 대답에 고태식 교관은 물론,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던 심인욱도 반응했다.
반응 정도만 살짝 살피고 난 다음, 계속해서 본론을 꺼내들었다.
“심인욱 생도와의 실전 대련. 언제쯤 가능한지 알고 싶습니다.”
그림자 녀석의 소임 문제부터, 오늘 대련이 불만족스러웠다는 점까지.
이유는 여럿 있었으나 사실상 후자, 호승심 때문이라는 점이 가장 컸다.
‘분명 심인욱에겐 감정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그 기준이 상당히 모호했다.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런 내 질문이 가소롭다는 듯.
“크핫! 이거 완전 웃긴 놈일세?”
고태식 교관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돌연 진지한 낯빛으로 나를 향해 되물었다.
“오늘 대련, 정말로 네놈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결과와 무관하게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심인욱이 호신을 쓰지 않았더라면 유효타 한 번은 얻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동점이었다.
‘더욱이 그때 심인욱에겐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었으니.’
즉, 운이 좋으면 무승부.
사실상 나의 패배로 끝났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고태식 교관은 이 점을 들어 재차 내게 물었다.
“이미 깨달았을 텐데?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그런데도 다시 붙고 싶다?”
“네.”
“이유는?”
“대련을 통해 때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가장 강한 사람이 상대여야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야 더욱더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내 대답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고태식 교관의 입매가 사정없이 요동쳤다.
이내 그는 입가를 사납게 비틀며 내게 말했다.
“일단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럼…….”
“단, 네놈에게도 조건을 달도록 하지. 저 심인욱이란 애송이와는 다르지만, 네 녀석 또한 준비가 안 된 건 마찬가지니까.”
“경청하겠습니다.”
“이제 수행평가까지 대략 2주 남았나?”
그의 말에 수행평가 날짜를 한번 헤아려 봤다.
‘다다음 주 월요일이니, 벌써 2주밖에 안 남은 건가?’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행평가의 시험 방식과 채점 기준, 기억하고 있냐?”
“교관님과 대련이며, 단 한 번이라도 교관님을 스칠 수 있다면 만점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만점을 받아라. 그럼 심인욱과의 대련을 허락해 주지.”
“……!”
만점, 즉 대련에서 최소 한 번 이상 스치는 것.
고태식 교관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 그는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양, 못을 박았다.
“애초에 대련은 네놈들의 승부욕이나 채워 주려고 실시하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모든 대련은 정규 수업의 일환이라는 걸 명심하도록.”
지극히 정론이었다.
때문에 나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그럼 네 녀석부터 개인 교습을 시작하도록 하지. 그전에 간단하게 오늘 있었던 대련을 이야기해 볼까?”
고태식 교관은 손을 우드득 꺾으며 뼛소리를 냈다.
“일단 네 녀석의 임기응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본래라면 결코 닿을 수 없는 상대에게 닿았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네놈은 결정적으로 한 가지,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 말씀은…….”
“대련이란 결국 실전 전투를 위한 훈련이다. 적을 잘 죽이는 것만큼 피해를 최소화하여 무탈하게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다는 거지. 그런데 네놈은?”
그제야 고태식 교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피해를 신경 쓰지 않고 공격에 매몰됐습니다.”
“물론 때때론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도 필요한 법이지. 하지만 그런 전략은 근본적으로 상책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상책이란 무엇일 것 같나?”
상책(上策).
왠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태식 교관으로부터 예상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적에게 살을 내줄 필요도 없을 만큼 강한 무력을 보유하는 것! 결국 네놈은 약하기 때문에 그런 임기응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우드득, 고태식 교관으로부터 재차 뼛소리가 들려왔다.
이쯤 되면 적응할 법도 하건만, 여전히 암담함이 밀려들었다.
그런 조건반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충분히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하기야, 실력을 갖췄더라면.’
임기응변에 의존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쓴웃음과 함께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더욱더 강해지면 되는 일이니까.’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수행평가의 만점은 물론.
심인욱과의 다음 대련에선 온전히 실력만으로 그를 꺾으리라.
다짐과 함께 자세를 취하는 순간, 고태식 교관이 달려들었다.
* * *
“커……헉!”
“그런 굼벵이 같은 움직임으로는 어림도 없다!”
안일한은 개인 교습이란 미명 하에 계속 얻어터졌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보던 심인욱은 생각했다.
‘……역시 저 녀석은 이상해.’
지금까지 쭉 지켜본 결과, 그는 고태식 교관의 평가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안일한, 그는 분명 천재가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한 건 그렇다 쳐도, 반사 속도나 동체 시력 등. 전부 평범한 수준이다.’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의 일격을 허용했다.
기본적인 수법에 당할 때도 간혹 있었다.
하나같이 심인욱, 그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피하거나, 되받아칠 수 있는 상황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단점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고태식 교관이 지적한 부분을 빠르게 체화시키고 행동으로 보여 준다.’
그렇게 실수를 차근차근 줄여나가는 한편, 때때로 배운 점을 센스 있게 응용하기도 했다.
즉, 정리하자면 창의성, 과감함, 판단력 등. 안일한은 주로 전략적인 부분에 강점을 보일 뿐.
‘천재적인 재능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어.’
본래라면 그저 무시하거나, 의식조차 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심인욱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벌써 끝이냐?”
“……아니, 아닙니다.”
벌써 5번째였다.
안일한은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면서도,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게다가 이 정도로 맞았으면 고통 때문에라도 주저할 법하건만.
안일한은 도리어 고통의 근원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강해지려는 이유가 뭐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동시에 불현듯, 뇌리에 고태식 교관의 말이 스쳤다.
-네놈과는 목적의 근간이 달라.
목적의 근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한번 머릿속으로 헤아려 봤다.
‘내 목적…….’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없었다.
오래전, ‘그 녀석’과의 대결에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부정당한 이후부터는 그랬다.
심인욱은 그렇게 까마득한 기억을 한동안 더듬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진짜로 넘어설 수만 있다면…….’
걸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다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먼저 그 녀석과의 간극을 다시금 가늠해 보는 것.’
심인욱은 결론을 내린 즉시 스마트 워치를 조작했다.
그러고는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심인욱 : 유진, 오늘 밤에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나?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
…
…
그날 밤, 무기 훈련실.
“왔나.”
심인욱은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한 청년을 향해 무뚝뚝하게 말을 건넸다.
“인욱아, 무슨 일 있어?”
변함없이 웃는 낯으로 묻는 청년.
그는 다름 아닌 백유진이었다.
“네 말대로 윤서에겐 비밀로 했고, 일단 무기도 가져왔는데,”
백유진의 손에는 기다란 창이 쥐어져 있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저 아카데미에서 기본 제공되는 무기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심인욱은 백유진의 손에 들린 창이 사뭇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가까스로 시선을 돌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진, 우리가 마지막으로 대련을 했을 때가 언제인지 기억하나?”
“갑자기? 그거 되게 어렸을 때 아니야? 우리는 각성하기 전부터 무기를 다뤘으니까.”
“10살 때다.”
“와, 그럼 7년 전인가?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다니.”
백유진은 그립다는 듯,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반면 심인욱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져 갔다.
“그때가 처음이다.”
“응?”
“처음으로 처참하게 패배한 날이자, 목적을 잃어버린 날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말투.
하나 그 속에 담긴 내용 때문인지, 백유진은 난처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내 그는 다시금 미소를 띤 채로 입을 열었다.
“에이, 어렸을 때잖아?”
“그래서 한번 확인해 보고 싶다.”
심인욱은 대답과 동시에 자세를, 기수식을 취했다.
“지금의 너와 나. 그 사이의 간극이 어느 정도인지.”
그의 행동과 선언에는 명백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를 알아차렸는지, 일순 백유진의 웃는 얼굴에 실금이 갔다.
이내 그는 얼버무리듯, 난처한 웃음을 띤 채로 말했다.
“……인욱아. 꼭 그래야겠어? 교관님의 허가 없는 대련은 징계 사유가 되는 거 너도 알잖아.”
“부탁한다.”
백유진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이윽고 완전히 무표정으로 변모했을 때.
스윽-
백유진은 창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 어울려 줄 수는 없어.”
그의 창끝이 정확히 심인욱의 심장 부근을 향한 순간.
고오오-!
백유진의 창날이 청록색 빛무리로 뒤덮였다.
마나의 유형화.
이를 확인한 심인욱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짤막한 감사와 함께 심인욱은 체내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윽고 그의 건틀렛이 회색 빛무리에 휩싸였을 때.
쿠웅-!
심인욱은 백유진을 향해 발을 굴렀다.
마치 진군하듯, 패왕(霸王)의 걸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