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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남은 시간 [659 : 59 : 59]
32 남은 시간 [659 : 59 : 59]
잠시 후.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씀해 주신 부분, 유념해서 지도하겠습니다.”
안주해가 정중히 인사하자, 진태진은 마주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안주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행정실을 벗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진태진은 굳은 낯빛으로 지금까지의 대화를 돌이켜 봤다.
-혹시 녀석이 초인을 지망하는 이유, 알고 계십니까?
-제 아들은 조금 다를 겁니다.
서두에서부터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색에 진태진은 생각을 바꿨다.
미구현 특성의 걱정을 잠시 미뤄 두고 눈앞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이내 안주해로부터 안일한 생도의 목표, 그 충격적인 뒷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제가 비각성자라 잘은 모르겠지만 초인은 등급이나 소속 길드의 위치에 따라 주어지는 권한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비슷합니다. 단순하게 대우부터, 주어지는 임무까지 천차만별이지요.
-그 말씀은 높이 올라갈수록 더 높은 등급의 임무를, 보다 위험한 게이트의 출입도 가능하다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만······, 설마.
진태진은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을 떠올렸다.
침음을 흘리며 떠올린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럼 생도의 목표, 그 원동력이 설마 몬스터들을 향한 증오심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반응에 안주해는 정확하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리 분별은 잘하는 녀석이라 아마도 내색하진 않았겠지만, 그게 맞을 겁니다.
그렇게 안주해는 씁쓸한 기색으로 말을 끝맺었다.
대화를 되새기고 난 진태진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생도의 원동력이 몬스터들을 향한 증오라면······.’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땐 결코 바람직하다곤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에겐 교관으로서의 책무.
비단 전투 능력뿐 아니라, 생도를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훈육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생도의 사정을 알게 되니 본래 품고 있던 걱정은 자연히 줄어들었다.
‘그만큼 목표가 명확하면, 특히 그 대상이 몬스터라면.’
적어도 사회 질서의 붕괴와 혼란을 목표로 하는 빌런 세계와는 양립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대신 새로운 걱정, 불안요소가 생겨났다.
‘증오와 같은 감정은 결국 양날의 검이니.’
훗날, 생도가 가슴 속에 품은 칼날은 필히 수많은 몬스터들을 도륙할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생도의 몸과 마음에도 무수히 많은 생채기가 쌓일 터였다.
‘······하나 그만한 사정이 있다면, 건전한 목표를 강제할 수도 없겠지.’
과하게 매몰되지 않게 옆에서 조절해 줄 수는 있어도, 올바른 목표를 강요하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교관으로서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양날의 검이라면, 그 칼날이 생도 스스로가 아닌 적을 오롯이 향할 수 있도록.’
칼을 쥐는 법부터 활용하는 방법 등.
생도가 품은 칼날의 예기를 보다 날카롭고, 치명적으로 세워 주는 것.
이로 하여금 전투는 압도적으로, 호신은 탄탄하게 만들어 주는 건 가능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진태진은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생도가 택한 무기는 건틀렛. 그렇다면 1학기 기말 과정부터는 그분께 지도를 받게 되겠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선배이자, 초인계의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한 사람.
때마침 그분이 건틀렛 수업을 전담하고 계셨다.
그분이라면 그가 생각한 바를 누구보다 제대로 지도해 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분께 인정받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진 않겠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안일한 생도라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진태진은 다음 면담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
9교시.
다른 학부모들의 면담이 진행되는 사이.
나는 간만에 아버지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 3주 뒤에 중간고사라고?”
“네.”
“오늘처럼 그 가상인지 뭔지 하는 대련도 하는 거고?”
“네, 그거 말고도 몇 가지 더 있어요.”
“보니까 곧잘 하더구나.”
무심한 칭찬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그렇죠? 제 호적수답게 일한이가 좀 잘합니다!”
왠지 옆에서 함께 있던 임강철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주접은 한 차례 더 이어졌다.
“매일매일 새벽까지 단련을 하더라고요! 하여튼, 정말 대단한 녀석입니다!”
어떻게 말릴 수도 없어 나는 그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런 나를 향해 아버지는 묘한 기색으로 말씀하셨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네, 그럴게요.”
“항상 몸부터 챙기는 거 잊지 말고.”
“네.”
오늘따라 유난히 걱정이 많은 듯했다.
‘오랜만에 봬서 그런가?’
고개를 기울이고 있을 때.
“아,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다름 아닌 차은월이었다.
한 시간 전, 노신사와 여성과 함께 있던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혼자서 내 쪽을 찾아온 듯싶었다.
‘부모님은 아닐 테고, 얘도 뭔가 사정이 있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아버지가 그녀의 인사를 받아 줬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무심하게 질문하셨다.
“친구니?”
“네, 임강철 하고 이 친구도 항상 같이 다녀요. 한 명 더 있는데, 지금은 부모님과 함께 있는 것 같네요.”
“너랑? 별일이구나.”
“그러게요.”
확실히 중학생 시절 혼자 다닐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다.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는 나와는 달리.
“그렇지 않아요!”
왠지 차은월이 나서서 항변하듯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임강철과는 또 다른 형태로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수업도 그렇고, 수행평가도 그렇고. 매번 일한이가 도와줘서 큰 힘이 되고, 또······.”
열심히 칭찬을 늘어놓는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반면 아버지는 한결 느슨해진 입가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좋은 친구를 뒀구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답하는 순간.
찰싹-!
별안간 임강철이 내 어깨를 쳤다.
“그렇게 칭찬하면 부끄럽지 않나! 하핫!”
“?”
칭찬이랄 게 있나?
그런 생각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왠지 차은월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유난히 이상한 반응에 고개를 기울이고 있을 때, 입구 쪽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주목.”
다름 아닌 교관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덧 수업이 끝날 무렵이었다.
“이걸로 수업을 마치겠다. 오늘 이후, 특별한 행사나 추가적인 진도는 없다고 봐도 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1학기 중간고사의 시험 기간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교관이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 시험 준비에 정신이 없을 테니, 오늘은 어렵게 시간을 내주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외식할 생도들은 저녁 8시까지만 복귀하면 된다. 이상.”
전달사항을 모두 마친 교관은 그대로 입구에 선 채로 학부모들을 정중하게 배웅했다.
슬슬 움직이려는 찰나, 임강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드디어 시험 기간이구만!”
“그러게.”
“일한이, 자신 있나?”
“실기는 뭐, 그럭저럭? 이론이 문제지만.”
1학기 중간고사의 실기 시험 범위는 총 세 가지였다.
스텟 서킷 트레이닝, 마력, 그리고 가상 대련이었다.
전부 첫 수업 때부터 지금까지, 골고루 준비하고 있는 만큼 그다지 걱정되진 않았다.
‘다만 이론 시험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별다른 걱정이 없을 정도로 실기 준비에 매진하는 만큼, 이론을 대비할 시간이 적었다.
물론 강제 전출의 기준에서 수행평가와 더불어 단 20%로, 반영 비율이 적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최상위권 길드는 성적을 종합적으로 보는 편이니.’
길드 입사와 같은 미래를 생각하면 이론 시험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집중해서 공부를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찰나.
“내가 도와줄게······!”
별안간 차은월이 조력을 자청해왔다.
이어서 그녀는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 이론 공부는 조금 자신 있거든.”
평소의 내성적인 모습과는 달리 자신감이 느껴졌다.
덕분에 귀가 솔깃해져 무어라 물어보려는 찰나, 임강철이 선수를 쳤다.
“호오, 입학 시험 때 몇 점 나왔지?”
“으응, 필기 말하는 거지? 다 맞긴 했는데······.”
“마, 만점?!”
그녀의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임강철은 물론, 나까지도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는 검지를 꼼지락거리며 나를 향해 말했다.
“나도 실기가 걱정이었는데 일한이, 네가 많이 도와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강철이 순식간에 훅 하고 다가갔다.
“고맙다! 은월이!”
우렁찬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의 고운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 넌 안 도와줄 거니까.”
“뭐?! 서운하다!”
온몸으로 서운함을 표출하는 임강철과 그럴수록 더더욱 질색하는 차은월.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과는 달리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얘는 진짜 천재였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이론 시험에 대한 걱정도 크게 줄어든다.
그야말로 뜻하지 않은 행운에 시험 대비 계획을 수정하고 있을 때.
“슬슬 저녁 먹으러 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더불어 내 친구들에게도 권유해 주셨다.
두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그렇게 넷이서 저녁 식사를 위해 아카데미를 벗어났다.
*
그날 밤.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그림자는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직감했다.
-현재 동기화율······ [15%]
-[????의 그림자]가 낮은 수준의 분별력과 온전한 기억의 일부가 깃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상태가 한층 더 온전해졌음을.
의식에 새겨진 소임이 보다 명료하게 되살아나고 있음을 말이다.
그 와중에도 메시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이 활성화됐습니다!
-동기화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의 효율이 대폭 하락합니다!
-스킬 [초진화(SS)]가 [급속 성장(C)]으로 변경됩니다!
-모든 종류의 단련 효과가 4배 상승합니다!
-스킬 [초재생(SS)]이 [급속 회복(C)]으로 변경됩니다!
-모든 종류의 휴식 효과가 4배 상승합니다!
언제나처럼 [스킬]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동기화율이 일정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의 이식이 시작됩니다!
-완전한 이식까지 남은 시간 [659 : 59 : 59]
새로운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완전히 회복됐다.
그림자는 책상 위의 달력을 살폈다.
동시에 메시지에 나타난 시간을 헤아렸다.
‘대략 28일.’
이는 훗날 닥쳐올 ‘격변’에 마주하고, 나아가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체급을 만들어줄 것이다.
이어서 그는 소임의 첫 번째 단계에 관련된 인원들을 손으로 꼽았다.
‘총 5명. 그중 한 명은 해결됐으니 4명.’
마지막으로 그림자는 첫 단계에 있어 요주 인물이자, 반드시 제거해야 할 한 사람.
환영 마법의 사용자에 관한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쯧.”
가장 중요한 대상의 정보는 마치 기억 속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모호했다.
현시점의 행적부터, 이름, 얼굴, 인상착의까지.
전부 마찬가지였다.
그는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고 말이다.
끼이익-
그림자는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언제나처럼 그의 발걸음은 마력 단련실을 향해 갔다.
텅 빈 단련실 내부를 그대로 가로지르며 생각했다.
체급을 만드는 데 있어 앞으로 갖춰야 할 능력들.
그리고 그 순서를 말이다.
‘급선무는······, 이것부터.’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쏴아아-
여느 때와 같이 마나가 체내에 물결치는 가운데.
그는 흐름의 고삐를 쥔 채 천천히, 조심스레 한 곳을 향해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충분히 모였을 때.
‘지금.’
흐름에 의지를 더했다.
체내의 어느 한 지점.
굉장히 협소한, 차라리 막혀 있다고 봐도 무방한 길을 향해 거칠게 마나를 쏟아부었다.
쉴 새 없이 두들기고, 부딪혔다.
그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쩌-엉!
굉음과 함께 뚫어냈다.
노도와도 같이 흘러 서서히 길을 넓혀 가는 마나.
그 속에 한 줄기.
현천(玄天)의 기운이 미약하게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