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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제야 좀 대등해졌네
30 이제야 좀 대등해졌네
그날 밤.
-대상의 무의식 상태를 확인.
-대상의 주도권이 [????의 그림자]에게로 넘어갑니다!
-대상과의 동기화율을 확인.
-현재 동기화율······ [14%]
-동기화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의 그림자]가 다소 낮은 분별력과 기억의 일부가 깃든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의식에 각인된 [스킬]이 활성화됐습니다!
···
···
···
그림자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스륵-
알 수 없는 물체가 그의 복부에서부터 흘러내렸다.
“······?”
그림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 밑쪽을 살폈다.
거기엔 익숙한 공책 한 권이 떨어져있었다.
주워드는 순간 특정 페이지의 끝자락이 큼직하게 접혀있는 게 눈에 띄었다.
“쯧.”
짧게 혀를 차며 건성건성 공책을 펼쳤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메모들 가운데, 첫 줄을 보는 순간.
“······!”
그림자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돋아났다.
이유는 다름 아닌 내용 때문이었다.
-반드시 대답할 것. 이번에도 무시한다면 더 이상 너의 소임에 협조는 없다.
도전적인 뉘앙스. 이는 차라리 경고에 가까웠다.
그림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결국 그는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나머지 메모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윤설하 내기에 관한 전말
그가 부탁한 윤설하의 트라우마 해결 과정에 대한 내용과 4개의 질문이 적혀있었다.
상당히 장문인 까닭에 그의 미간이 한 번 더 구겨졌다.
하나 읽으면 읽을수록.
“······.”
그림자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갔다.
내용을 전부 확인한 그림자는 이채를 띤 눈빛으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걸 벌써 해결했을 줄은.”
내기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트라우마 해결을 위한 초석일 뿐.
본래 목적은 소원에 있었다.
훗날 다시 다뤄야 할 문제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나아가 벌써 해결해 버린 것이다.
분명 계획과는 다르지만,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대 이상······.”
때문에 그림자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남은 메모, 그를 향한 질문들을 살피고 난 다음 펜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사각사각-
본격적으로 질문들에 대한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간 모든 답변을 적어놓은 다음, 슬슬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어나기 직전에 페이지를 넘기고는 마지막으로 메모 하나를 추가로 남겼다.
“······.”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그림자는 곧장 기숙사를 벗어났다.
*
다음날 아침.
나는 눈을 뜨기 무섭게 책상으로 한달음에 다가갔다.
이내 공책이 펼쳐져 있음을 확인하고는.
씨익-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어젯밤, 자기 전에 녀석에게 남긴 4개의 질문의 바로 밑줄.
일부러 비워 둔 칸이 녀석의 답장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까닭이었다.
“후우, 어디 보자.”
나는 첫 번째 질문부터 차근차근 살폈다.
1. 윤설하의 트라우마 해결, 설계인지. 아닌지. 설계가 아니라면 본래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전개. 본래 완전한 해결은 소원을 바탕으로 훗날에서야 이뤄낼 계획이었음.
첫 번째 답장을 확인한 순간,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역시 녀석도 예상치 못한 건가. 그런데 나중에나 해결할 계획이었다니.’
대체 어떤 식으로 해결할 지.
정작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녀석의 계획은 물론, 세삼 정체가 궁금해졌으나 일단 참았다.
‘어차피 정체에 관한 질문도 해놨으니까.’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한 채 두 번째로 넘어갔다.
확인한 순간.
“······!”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2. 네가 지니고 있는 소임의 정체, 궁극적인 목적은?
-다가올 격변에 대비하는 것.
다가올 격변에 대비한다.
이 말은 곧 녀석이 소임이란 이름 하에 벌인 행동.
그 초점이 현재가 아닌, 미래에 찍혀있다는 뜻과 다름없는 까닭이었다.
‘······설마 녀석은 앞으로 벌어지는 일, 그러니까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건가?’
떠올린 순간, 문득 이전에 교관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미래 예지, 진짜로······?’
미구현 특성의 상식을 벗어난 능력을 고려하면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존재했다.
‘내가 직접 미래를 보는 게 아닌데. 이런 것도 예지라고 할 수 있나?’
녀석의 답변이 진실이라 가정한다면 미래를 알고 있는 건 녀석이지, 내가 아니다.
그러니 내 능력을 ‘미래 예지’라고 보긴 힘들다.
그렇다면 내 미구현 특성의 능력은 정확히 무엇일까.
또한 그림자는 대체 정체가 뭐길래 미래를 알고 있는 걸까.
‘······게다가 격변이라니. 앞으로 뭔가 사건이 발생한다는 건가?’
의문이 증폭되는 가운데, 나는 세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다.
3. 그녀의 트라우마 해결이 네 소임과 관련된 이유는?
-마음의 균열은 환영(幻影) 마법의 좋은 먹잇감. 이는 격변의 대비를 어렵게 만들 것. 필히 막아야 함.
이번 답변 역시 의문스럽게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환영 마법? 격변에 대비?’
둘다 영문을 모르겠다.
환영 마법의 경우, 마법의 한 계통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맥락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반면 두 번에 걸쳐 언급된 ‘격변’에 이르러선 짐작가는 바가 전무했다.
‘그림자 녀석은 대체······.’
마른침을 삼키며 마지막 질문.
녀석의 정체에 관한 물음으로 시선을 향했다.
4. 네 정체는?
-명확한 답변은 불가능함. 아직까지는 기억과 의식이 온전치 못한 상태.
확인하고 나니 왠지 온몸에 힘이 빠졌다.
‘답변이 불가능하다니.’
처음엔 대답을 회피하나 싶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녀석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아직 기억과 의식이 온전치 못한 거라면. 여태 녀석의 행동이 점진적으로 바뀐 이유와도 맞아떨어진다.’
단순히 스텟을 단련하는 것부터, 최근에 이르러 육성으로 대화를 나누기까지.
녀석의 행동변화가 기억과 의식의 점진적인 회복에서 비롯됐다면, 답변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구태여 아직이라고 사족을 붙였다는 건.’
언젠간 녀석도 제 기억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때가 되면 녀석의 정체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기억이 온전치 못하면 제대로 된 미래 예지라 보긴 힘들 테고.’
녀석의 정체, 격변의 구체적인 정보.
더하여 녀석이 나와 함께하는 이유 등.
모든 의문을 해소하기엔 아직 요원한 듯싶었다.
‘이쯤에서 만족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찰나.
문득 다음 페이지의 끝자락이 접혀있음을 눈치챘다.
‘뭔가 할 말이 더 남아있는 건가?’
곧장 페이지를 넘겨봤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추가로 남긴 메모가 적혀있었다.
‘이건 메모라기 보다는······.’
녀석이 내게 전하는 전언에 가까웠다.
-트라우마를 해결한 방식, 아주 인상깊었다.
이게 본래 계획보다 그녀의 심신 안정에 효과적일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이후에도 소임을 이루는데 협조를 청한다.
물론 사전에 예고는 하겠지만, 아직은 기억과 의식이 온전치 못함을 참고하길 바란다.
앞으로도 수단은 충분히 제공하겠다.
내용을 전부 확인한 순간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좀 대등해졌네.’
내 의도는 아니었으나, 결국 문제는 해결됐고 녀석은 이를 인정했다.
그 결과로써, 사후 통보가 아닌 협조를 요청해왔다.
‘물론 여전히 녀석의 소임은 따라줘야 하겠지만.’
최소한 녀석의 독단에 휘둘릴 일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내게도 이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수단이라면, 그거겠지?’
마나 호흡법, 보법 등.
내 입장에선 바라마지않던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녀석과의 관계는 단순했다.
녀석은 나로 하여금 제 소임을 이룬다.
그리고 나는.
‘녀석으로 하여금 내 목표에 한 발짝 다가선다.’
이해의 일치, 상호호혜적인 관계. 그 정도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나는 흡족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책을 덮었다.
아니, 덮기 직전에 다음 페이지의 끝자락이 접혀있는 걸 목격했다.
‘음? 메시지가 더 남아있나?’
페이지를 넘기자 녀석이 남긴 추신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P.S. 그녀의 문제는 마무리만 남은 듯하니, 사후 처리도 부탁한다.
‘사후 처리, 아.’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도권 문제로 인해 자리를 파하기 직전에 그녀는 선언했다.
아버지와 똑바로 마주해 보겠다고 말이다.
‘대화까지 무사히 이뤄져야 비로소 해결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가장 좋은 그림은 대화가 원활하게 풀리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결과를 낙관하기도 어려웠다.
‘윤설하는 그렇다 쳐도, 아버지 쪽은 성향이나 상황을 내가 알 길이 없으니.’
한참을 생각해 봐도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의 방향을 살짝 틀어봤다.
‘적어도 윤설하의 상처가 여기서 더 벌어지지 않게, 즉 최악을 면하게끔 하는 거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림자의 말을 빌려 마음의 균열이 커지지만 않는다면.
녀석이 가진 해결책으로 나중에라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과 함께 한 주의 마지막 날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
다음날.
“6교시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A반의 참관 수업은 7교시에 진행될 예정이니, 바로 무기 훈련실로······.”
초인 이론 담당 교수의 지시와 함께 6교시가 끝났다.
슬슬 몸을 일으키자 임강철이 내게 달라붙었다.
“일한이, 너는 부모님이 오셨나?”
“아버지만. 너는?”
“우리 할아버지는 아마 안오실 것 같군.”
“음.”
부모님에 관해 물어보려다 말았다.
뭔가 사정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난 바로 내려갈건데, 너는?”
“같이 가지! 너희 아버지께 인사도 드릴 겸!”
“그래.”
그렇게 나는 임강철과 함께 학부모들이 모여있을 1층, 무기 훈련실을 향했다.
거기서 어렵지 않게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
“잘 지냈냐.”
“그럭저럭요.”
“그래 보이는구나.”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안녕하세요! 저는 일한이의 친구, 임강철임다-!”
임강철은 우렁찬 인사와 함께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셨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구니?”
“네.”
“크구나.”
“네, 좀.”
나직하게 수긍하자 임강철이 번쩍 상체를 들어올렸다.
“으하! 칭찬 감사합니다!”
“······.”
그렇게 아버지가 임강철을 상대해주는 사이.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한 사람을 찾았다.
‘저기 있네.’
다름 아닌 윤설하였다.
그녀는 마치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내 발견해 냈는지, 살짝 움찔거렸다.
시선을 따라가보니, 그녀와 꼭 닮은 중년 남성이 굳은 낯빛으로 서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음? 일한이?”
아버지께 나에 관한 열변을 토해내던 임강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윤설하 이야기, 기억하지?”
“음? 아버지에 관한 사정 말인가?”
“어. 도와줘.”
“오, 말만해! 내가 뭘 하면 되지?”
“이따가 참관 수업 끝나고 만약에······.”
간략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피할, 그런 계획을 말이다.
이를 전해 들은 임강철은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런 건 내가 전문이지!”
···
···
···
한 시간 후.
“7교시 가상 대련 수업은 이걸로 마치겠다. 8교시부터는 학부모 면담이 있을 예정이니, 쉬는 시간 동안 부모님들과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이상.”
교관의 지시를 마지막으로 학부모 참관 수업이 끝났다.
이는 곧 윤설하,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시간임을 의미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한 사람의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변한 모습의 아버지가 있었다.
“······아.”
5년,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 때문일까.
얼굴은 많이 초췌해 보였고 뺨은 옴폭 패여있었다.
제대로 바라보는 순간.
‘어떤 말씀을 하실까······?’
문득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꾹 참고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사과해야지. 그리고 앞으로는 믿어드리는 거야.’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간 끝에 마침내 마주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