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9 정말 나보다 강하구나, 너는
29 정말 나보다 강하구나, 너는
‘이제 곧 7시네.’
윤설하는 멍하니 시계를 바라봤다.
약속 시간까지 불과 몇 분밖에 남지 않은 까닭일까.
그녀는 자연스럽게 안일한을 떠올렸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당시에는 몰랐으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날 밤의 대화가 조금 이상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느닷없이 내기라니.’
그는 구태여 미구현 특성의 한계까지 언급하며 내기를 제안해왔다.
동시에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자신은 다르다고.
때문에 그녀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여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치만······.’
생각이 깊어지는 가운데.
“기다렸지, 미안.”
안일한은 팀원들과 함께 시간에 딱 맞춰 나타났다.
그를 시작으로 임강철, 차은월이 다가왔다.
친구들 중에서도 차은월의 표정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설하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이유는 금방 알 것 같았다.
친구끼리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괜히 죄책감이 밀려드는 까닭에 윤설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할게.”
도망치듯 선공을 택한 것이었다.
그녀의 제안에 안일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로 곧장 윤설하는 가상 대련실로 들어갔다.
대련을 준비하는 가운데, 그녀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였다.
‘승부는 승부야, 그러니 이겨야 하지만······.’
한편으론 그가 이겼으면 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패배가 곧 그가 했던 말의 증명이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제 마음을 눈치 챈 윤설하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눈앞에 집중하자.’
그녀는 검의 손잡이를 바투 잡았다.
그러고는 힘 있게 쇄도해 갔다.
타닷-
그녀의 움직임에 더미 데이터가 반응했다.
빠른 속도로 마주 달려들며 주먹을 지르는 것이다.
본래라면 피하고 반격을 노렸을 터였다.
하지만.
“······흐읍!”
그녀는 자세를 최대한 낮추며 검을 올려 벴다.
때문에 녀석의 일격은 어깨를 스쳐갔고.
츠츳-
그녀의 검은 녀석의 상체를 사선으로 베어갈랐다.
윤설하는 그대로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스걱-!
회피를 최소화한 채 공세에 집중하는 전투 방식.
평소보다 한층 거칠고, 날카롭다.
그게 꼭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자연히 피격 횟수는 늘어났으나, 그만큼 속도는 빨라졌다.
덕분에 평소 이상으로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쿠웅-!
허물어지는 것과 동시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목각 인형.
그녀는 스마트 워치를 통해 점수를 확인했다.
-C+ Rank
점수를 확인하며 대련실을 벗어나는 순간.
“오, 역시 윤설하!”
임강철이 감탄과 함께 그녀를 맞이했다.
차은월 또한 눈동자에 이채가 서려있었다.
하나 그 속에는 안일한을 걱정하는 기색도 섞여있었다.
반면 정작 당사자인 그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수고했어.”
나직한 목소리로 맞이해 주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단 한 마디만을 남긴 채로 말이다.
“똑똑히 봐줘.”
그렇게 그는 가상 대련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연히 그녀의 시선은 홀로그램 화면을 향했다.
이윽고 안일한의 가상 대련이 시작된 순간.
“······!”
윤설하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시작부터 그가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까닭이었다.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더니.
스르륵-
기묘하게 짝이 없는 걸음걸이를 펼치기 시작했다.
‘······보법? 저 움직임은 대체.’
그는 마치 녀석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고 있듯.
아니, 녀석의 움직임에 스며든 것처럼 모든 공세를 가볍게 흘려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뭔가 자그맣게 중얼거리듯,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 순간, 그의 상태가 일변했다.
속도 때문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작용 때문인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전신이 일렁이더니.
스으으-
녀석의 움직임, 그 자체에 동화됐다.
마치 사람의 발끝에 언제나 머무르는 그림자처럼.
녀석의 모든 동작을 꿰뚫어보며, 나아가 능숙하게 반격까지 이어갔다.
표홀하고, 치명적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귀신 같아.’
그저 멍하니 탄성을 흘리고 있을 때.
“대단하지 않아?”
어느새 다가온 임강철이 말문을 열었다.
이내 그는 홀로그램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저번 주였나? 처음 봤을 땐 뭘 하나 싶더군. 자세도 엉망이고, 몸의 균형도 안 맞았으니까.”
“······그럼 일주일도 안 돼서 저런 수준까지 끌어올린 거라고?”
“그래, 그때부터 밤이고 낮이고, 하루도 쉬지 않고 저 걸음에 매달리더라고! 역시 일한이다, 싶었지!”
참으로 안일한답다.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생각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 건데. 옆에서 지켜보는 게.’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 생각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치만, 미구현 특성에는 결국 한계가······.”
“음? 성장 한계를 말하는 건가? 들어본 것 같군.”
“그럼 역시!”
“하지만, 일한이만큼은 다를 거라 믿는다!”
“······.”
갑작스러운 외침에 순간 윤설하는 말문이 막혔다.
임강철은 모처럼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뭐야, 너 설마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거냐?”
“그런 거라니!”
“애초에 미구현 특성 문제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과연 그걸 당사자인 일한이가 모를까?”
“······그건 그렇지만.”
“알면서도 반드시 도전해야 할 이유가 틀림없이 있는 거겠지, 일한이한테는.”
“······!”
“그걸 우리는 믿음으로 지켜보며 함께 나아가면 되는 일이다!”
반드시 도전해야만 하는 이유.
임강철의 말에 그녀는 크게 흠칫했다.
그런 식으론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해야만 하는 이유.’
문득 기억의 편린이 되살아났다.
그것도, 까마득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말이다.
-우리 설하는 초인을 동경하나보네?
그녀의 해맑은 표정에 자상한 얼굴로 대꾸해 주는 모습부터.
-뭐? 아빠도 초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하, 아빠도 각성을 하긴 했지만, 음······.
그녀가 지은 시무룩한 표정에 곤란해 하는 모습.
-좋아, 아빠도 도전해볼게! 그럼 나중에는 초인 부녀지간이 되겠다, 그치?
씨익, 밝은 미소와 함께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모습까지.
트라우마에 파묻혀, 지금껏 까맣게 잊고 지냈다.
‘······.’
윤설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저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자 목표로 했던 초인.
하지만 잔혹한 현실 앞에 변질되고, 매몰됐다.
그런 상황에서 포기하라는 말은 비수처럼 다가갔을 것이다.
‘그때 내가 끝까지 믿어주지 못해서 그런 걸까······?’
그게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아버지와의 관계가 무너져내린 게 아니었을까.
“······.”
그녀는 문득 가슴 속에서 울컥 치미는 감정을 느끼며 생각했다.
‘너는 내게 그런 걸 보여주려고 했던 거야······?’
과정이 어떻고, 결말이 어떻든, 분명한 목표가 있는 한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음을.
그러니 곁에서는 믿음으로 지켜보면 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을 매듭지을 찰나, 때마침 그의 대련이 끝났다.
“오, 일한이도 끝난 모양이군!”
임강철의 말에 그녀는 곧장 화면의 하단을 살폈다.
그곳에는 그의 노력을 증명하는 결과가 떠있었다.
-B Rank
보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정말 나보다 강하구나, 너는.’
미구현 특성이란 시련에 굴하지 않는 마음도.
초인 지망생으로서의 역량도.
전부 그의 말대로였다.
“B랭크라니! 역시 일한이, 내 호적수답다!”
임강철의 환호 속에 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빛으로 그를 맞이했다.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그가 앞서 입을 열었다.
“내 노력은 보상받았어.”
“응.”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응.”
그녀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
···
···
같은 시각.
‘저 정도 수준의 보법이면 C급이려나?’
멀리서 대련을 지켜보던 청년은 입맛을 다셨다.
동시에 그는 방금 대련을 마친 생도의 무리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수석, 윤설하가 있는 걸 보니 A반인 것 같은데.’
거기까지 떠올린 청년은 곧장 스마트 워치를 조작했다.
액정에는 그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백유진 : 인욱아, A반에 굉장한 보법을 쓰는 생도가 있는 것 같은데?
답장은 금세 돌아왔다.
심인욱 : 음? 근접 무기 계열 쪽인가.
백유진 : 느낌만 봐선 건틀렛 쪽인 것 같기도 하고.
심인욱 : 호오.
백유진 : 혹시 올해 신입생 중에 대지의 혼 길드와 관련있는 사람 있어?
심인욱 : 아니, 내가 기억하는 한은 없다.
빠른 답장에 청년, 백유진은 입맛을 다셨다.
‘흐음, 그럼 웅심(雄心) 길드 쪽인가?’
태연하게 4대 길드를 떠올리는 청년.
백유진은 미소와 함께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
잠시 후.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윤설하의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 이기긴 했는데.’
그림자 녀석의 말대로 일단 윤설하를 꺾긴 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그녀의 트라우마 해결로 이어지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갔다.
‘안색은 한결 나아진 것 같은데, 우선 할 말이 있다니 그것부터.’
의문은 잠시 미뤄둔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선 좀 그러니까. 음, 우리 방으로 가자.”
“오, 그거 괜찮군. 좀 지저분하겠지만!”
나의 제안에 나머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로 곧장 넷이서 기숙사 방을 향해 갔다.
도란도란 자리를 잡고 난 다음.
“요 며칠, 내 상태가 조금 이상했지······? 그것 때문에 같이 연습도 못하고. 폐를 끼친 점은 일단 미안해. 그 대신 이유를 설명해줄게.”
윤설하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깨를 잘게 떨면서도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사정을 밝혔다.
“겨우 잊고 지냈는데, 하필 며칠 전에 참관 수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서······.”
“아, 이미 연락이 들어갔다고.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응.”
그제야 윤설하의 상태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생각보다 사정이 깊은데······?’
이만한 사정을 대체 내기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그림자 녀석, 참으로 대책없다.
남몰래 혀를 차고 있을 때.
“하지만 이젠 조금은 괜찮아졌어. 고마워 안일한, 다 네 덕분이야.”
별안간 윤설하가 내게 감사를 표했다.
‘······다 내 덕분이라고?’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내 반응과는 별개로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너도 분명 이유가 있는 거겠지? 우리 아빠처럼······?”
이유야 분명 가지고 있다.
“옆에서 끝까지 믿고, 지켜보는 게 친구이자,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잖아, 그치?”
······그랬나?
이쯤 되니 나한테 하는 이야기가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찡긋-
왠지 모르게 임강철이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얘는 또 왜 이래?’
점점 더 상황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윤설하로부터 결정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한번 용기를 내볼까 해. 이번에 참관 수업 때, 아빠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그제야 깨달았다.
‘······진짜로 트라우마가 해결된 건가?’
내가 한 거라곤 내기가 끝난 직후.
그림자의 말을 맞춰주기 위해 노력과 보상을 언급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해결이 됐다니.
‘여기까지 설계했다고? 설마.’
그녀의 심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했는지는 모른다.
더욱이 임강철의 반응으로 보아 그 또한 모종의 영향을 끼친 듯했다.
거기까지 그림자가 설계했다?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혼자 생각에 골몰할 때, 윤설하가 왠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덧붙였다.
“······소원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게.”
“어. 나중에라도 괜찮지?”
“응.”
“그럼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모이자.”
나는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윤설하와 차은월, 마지막으로 임강철까지 단련실에 간다고 나갔을 때.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어차피 주도권 문제도 풀어야 하니까.’
그림자 녀석과의 필담을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대답을 들을 작정이었다.
‘내 생각대로라면, 더 이상 마냥 뻣대지는 못할 테니.’
여태 품고 있던 의문과 더불어 윤설하의 트라우마 해결 건까지.
한꺼번에 처리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질문을 떠올리며 공책을 펼쳤다.
‘가장 먼저 적어야 할 건······.’
망설임 없이 한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반드시 대답할 것. 이번에도 무시한다면 더 이상 너의 소임에 협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