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어느새 집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정확하게 따지면 집보다는 미군 기지의 숙소와 가까운 모습이지만, 나한테는 이게 곧 집이었다.
담벼락과 철망, 정문 게이트, 해병 따위에 익숙해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물론 편하긴 했으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내 동료들.
옆 건물이나 길 맞은편의 건물에 머무는 이들이 제이크였고, 레이첼이었으며, 마커스와 호세, 해리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전투 중에도 보는 얼굴을 휴가 중에도 보는 거라 질릴 만도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몇 해 전에 게임인 라레플을 하면서부터. 그리고 지금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내 등을 맡길 정도로 믿는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신뢰도 그렇고, 실력도 그렇고.
한데 그렇게까지 믿는 사람 중 한 명이 짐을 싸고 있었다.
마커스.
오는 길에 은퇴 선언을 하고, 도착한 날에 바로 그만두겠다고 신고를 하더니, 아예 이삿짐까지 싸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여러 걱정이 됐다.
‘이게 맞나……?’
지금은 모든 게 해소됐다고 하지만, 한때는 다크웹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키나와에 있는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한참을 대기했고, 미국에 들어와서도 해병이 경계를 서는 공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한데, 일을 그만둔다고 나가다니?
마커스는 아무 이상 없다고, 갈 곳이 있으니 괜찮다고 했으나,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나름대로 윗선에 마커스의 안전보장이나 거주 따위를 요청할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히 특혜를 요구하거나 마커스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에 내 옆 옆 동인 마커스의 건물로 찾아가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날 맞이했다.
“흐흐, 두 번째 손님이 오셨군.”
“두 번째?”
“그래, 저놈이 와서 한참 전부터 떠들고 있었어.”
그 말에 공관 안쪽을 바라보자, 집주인이라도 된 듯 태연하게 커피를 든 호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 왔어?”
“어? 어어, 근데… 어휴, 정리가 다 됐네…….”
바라보는 내부가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생필품 몇 개만 나와 있을 뿐.
집기류와 가구, 가전까지 모두 잘 정리되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5분 안에 상차해서 끝낼 정도로.
“그래, 이러다 민폐나 끼칠 것 같아서 말이야.”
“민폐라니? 기껏해야 빈방 쓰는 거잖아?! 좀 더 머물면 어때? 위에서도 당장 나가라는 말은 안 했다면서?”
호세가 나 대신에 떠들고, 마커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둘 거면 떠나야지, 들어올 후임을 위해서라도.”
“안드레이? 그놈하고 연락이라도 한 거야? 자기가 올 테니까, 너보고 나가라고 했어?”
“계속 그럴 거면 커피나 마시고 나가.”
“무슨 소리야? 네 애들이 날 붙잡고 있는 건데?”
그 말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마커스의 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만하고 2층으로 올라가렴, 얘들아.”
마커스가 아이들을 불러서 계단으로 보냈는데, 이 모습은 다시 봐도 신기했다.
본래 게임 속에 캐릭터였던 마커스의 가족까지 게임에서 구현된 적은 전혀 없었고, 그저 말로써 언급됐기 때문이었다.
나이도 나오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각각 11세, 7세, 6세.
그중에 열한 살짜리 꼬마는 다 컸다는 듯 인사하고 올라갔는데, 일곱 살과 여섯 살짜리가 그 나이 때 장난꾸러기처럼 손에 잡동사니 따위를 들고서 쿵쾅대며 올라갔다.
“하여튼 재미 없는 건 집에서도 똑같군.”
“…그런 면에서 네 딸은 대단하군.”
호세가 불평하고 마커스가 그 말을 받아서 웃을 때였다.
터벅터벅.
열어 둔 현관문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거구의 제이크가 나타났다.
“마커스? 아, 호세와 리도 여기 있었군.”
“어?! 제이크? 혹시… 진짜 퇴거 명령이라도 하려고 온 겁니까? 아니죠? 예?!”
호세가 주춤했다가 화들짝 놀라듯 물었다.
별거 아닌 이유로 어디든 가는 호세와 다르게 제이크는 용건이 없으면 오질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도 제이크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을 무렵.
“짐 풀어.”
그의 말이 짧고도 묵직하게 깔렸다.
동시에 주춤해서 그를 쳐다보는데, 호세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짐을 풀라는 건……!”
“여기 계속 있어야 해.”
“오오오오오오! 역시! 아, 이유가 뭐랍니까? 아무래도 저번에 있던 현상 수배 때문입니까?”
당사자인 마커스가 가만히 있는 가운데, 호세가 열을 내듯 물었다.
나도 잘됐다는 생각이 드는 사이.
다른 말이 들려왔다.
“보직이 변경됐어, 사무 팀으로.”
“팀장? 그게 무슨 소립니까?”
듣기만 하던 마커스가 드디어 목소리를 냈는데, 제이크가 설명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판단이 아니야.”
“네?”
“위에서 지시를 내렸어.”
“도대체 위에서 왜… 이유가 뭡니까?”
“그건 기밀이라더군.”
“…보직 변경 사유가 기밀이라는 소립니까?”
“그래, 내부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야. 아니면 외부든. 어찌 됐든 네 경험과 능력, 아니면 네가 아는 정보든… 밖으로 내보내 줄 생각이 없는 거지.”
“로버트가 다녀갔을 때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마커스가 흘려 낸 말에 제이크가 답했다.
“나도 방금 연락받았지만, 난 동의했다.”
“팀장이요?”
“현장 의견을 잘 반영할 수 있잖나? 네 경험도 밖에서 쓰기에는 버릴 게 너무 많지.”
그 말 뒤로 호세의 목소리도 덧붙었다.
“오히려 잘됐지. 적어도 달리야는 이 결정을 반길걸?”
호세가 마커스의 아내, 그러니까 제수씨의 이름을 말했다.
이어서 신이라도 난 듯 말이 이어졌다.
“네 애들도 오히려 좋아할걸? 안전하고, 다치지도 않을 거고… 한번 가서 말해 봐. 아니, 사무직인 게 쪽팔리면 내가 올라가서 알려 줄까? 입이 근질근질한데.”
“그건 내가 할 테니까, 입 좀 다물어. 도저히 쉬질 않는군.”
그렇게 말을 막던 마커스가 제이크를 바라봤다.
“그럼 안드레이는 어떻게 됩니까? 후임은?”
“아, 그렇지. 안드레이 모루스.”
그 뒤에 나올 말을 기다리면서 바라보자, 제이크가 전보다 딱딱해진 어투로 대꾸했다.
“네 뜻대로 됐어.”
“오!”
절로 탄성이 나왔다.
마커스가 잘 알아봤듯, 그는 나와 호흡을 맞출 만큼 실력이 좋은 그리고 내가 믿을 만한 인물 중의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외인부대를 나온 동유럽계 백인으로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그 이상으로 실력은 물론이고, 특히 거칠고 직선적인 입담만큼 배짱도 좋은 캐릭터.
함께 작전하기에 더할 나위가 없었다.
입이 거칠어서 욕설을 좀 쓴다고는 하지만, 그건 별거 아니었다.
특전사 현역일 때는 더 심하게 욕하는 이들도 있었고, 별거 아닌 걸로 힘겨운 부조리를 지시하는 선임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말 좀 거친 건 별문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안드레이는 험한 입과 달리, 현장에서의 판단은 멀쩡했다.
입으로는 쌍욕을 하면서도 현장에서는 정확한 판단을 하고, 또한 그 판단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부류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군인.
한데 이를 말한 제이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호세도 알아보고 목소리를 냈다.
“와우, 결국 그놈이 오는군. 나도 나쁘진 않지만… 팀장은 괜찮습니까? 표정이 영 안 좋은데?”
안드레이가 제이크가 믿는 신 어쩌고 함부로 말했다가 어깨가 주먹 한 방에 부서졌기에 하는 말이었다.
수술과 치료, 재활에 한참 걸렸었고.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가 밝을 리가 없었다.
이에 나도 바라보는데, 제이크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안할 게 있어.”
“뭡니까?”
“부팀장은 리, 네가 맡아.”
“부팀장이요?”
내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게임상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에서도 부팀장을 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별건 아니지만, 생각도 못 한 거라 눈을 껌뻑이기만 할 무렵.
제이크의 설명이 덧붙었다.
“안드레이가 너한테는 말을 가려서 하잖아?”
“아… 좀 덜하긴 하죠.”
첫 만남이 있었을 때도, 작전 결과를 듣고서 날 다르게 봤었다.
함께 작전한 뒤로는 나한테 성질 내는 일이 없었고.
그 생각을 하는 무렵, 제이크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다루기 어렵지 않을 거고… 부팀장에게는 팀장 유고 시에 단독으로 지휘하고 작전을 수행할 권한도 있어. 그런 상황에서 팀을 모두 살리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너밖에 없지. 호세나 레이첼도 훌륭하긴 하지만, 너에 비할 바는 안 되잖나?”
“뭐… 그럼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마커스가 내 어깨를 툭쳤다.
“축하할 일이겠지, 리?”
“네가 빠져서 된 건데 무슨…….”
그의 말을 받는데, 마커스가 씨익 미소 지으면서 물었다.
“부팀장이 됐다고 해서 말을 높일 필요는 없겠지?”
“아… 흐흐흐흐.”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말았다.
마커스가 부팀장이 되었던 시절,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을 돌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가볍게 답하려던 순간.
띠리리리─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왔다.
그것도 사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 업무용으로 받은 물건이었다.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을 무렵.
어느새 제이크가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짧게 묻거나 답하면서 통화했다.
대략 10여 초.
그 끝에 전화를 끝낸 제이크가 우리를 바라봤다.
안드레이가 들어온다고 했을 때보다 더욱 딱딱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약 4주간 숙식 훈련할 장비 챙겨서, 15시까지 각 숙소 앞에서 대기해.”
“…네?”
쉰 지 이제 일주일 됐다.
물론 작전한 것도 며칠 안 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무려 4주간 훈련.
이 정도면 웬만한 군사교육을 수료하고, 그에 해당하는 패치 같은 걸 받아도 될 정도였다.
일상이 훈련인 내 입장에서야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쉽게 이해는 안 갔다.
휴식 기간이나 훈련 기간이 안 맞아서.
그것도 용병처럼 8주 근무, 4주 휴식 같은 체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몇 시간 전에 갑자기 미션을 주는 경우는 없었다.
특수한 목적의 작전이라서, 시간이 조급해서 바쁘게 투입되는 거라면 몰라도, 들은 건 4주짜리 훈련이었다.
이유가 뭔가 싶어서 물어보려 하자, 호세가 알아서 목소리를 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상황이 생겼다더군.”
“아니, 무슨 훈련인데요?”
“델타와 호흡을 맞추게 될 거야, 실작전처럼.”
“……?!”
미 1티어 특수부대이자, 제이크의 출신 부대인 델타포스에 멈칫했다.
“현역과 말입니까?”
“그래. 큰 작전을 준비 중인 모양이야.”
제이크가 그렇게 답하고서는 마커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쉽겠지만, 여기 있어. 곧 다녀오지.”
현역 델타포스와 함께하는 4주짜리 숙식 훈련이 아닌, 마치 4일짜리 캠핑을 갔다 오겠노라 하는 듯한 말투.
마커스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훈련은 현역 때 많이 해서 아쉽진 않은데… 어쨌든 다녀오십시오. 그사이에 보직에 잘 적응해 보죠.”
그 뒤로 호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 이 괴물들을 어떻게 따라가야할지 모르겠군.”
“넌 좀 열심히 해야 해, 요새 배 나오더라.”
내가 짧게 대꾸했는데, 날 보는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벌써부터 시작이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