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이튿날 오전, 중국, 광저우시(广州市), 시가지 인근의 중국식 저택.
피칼이 들어오는 이를 중국어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왕칭 상무위원.”
왕칭은 정장 차림을 한, 길에서 흔히 볼 법한 50대 중반의 사내였다.
금테 안경 위로 넓게 까진 이마가 드러나고, 주름이 처지고 구겨졌으며, 배가 툭 튀어나온 모습.
그러나 결코 쉬이 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중국 공산당을 운영하는, 최고 권력인 국가주석을 포함한 7인의 상무위원 중 한 명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중국의 2인자, 혹은 3인자라 불리는 인물.
그런 왕칭이 피칼이 내미는 손을 잡고 짧게 악수를 나눴고, 미소부터 지었다.
“얼마 전에 봤지만, 또 봐도 참으로 부러운 외모요. 아주 잘생겼습니다.”
“부인은 안 하겠습니다.”
“하하하, 아무렴. 그대가 부인하면, 누가 감히 미남이고 쾌남이라 불리겠습니까?”
그러면서 과장된 웃음을 흘릴 무렵.
피칼이 자리를 안내했고, 손수 차를 따라 건넸다.
왕칭이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받아 놓으면서 목소리를 냈다.
“다도 솜씨도 훌륭하시오. 흠결이랄 게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면 다행이군요.”
“어디서 다도를 배우기라도 한 겁니까?”
“마땅히 알아야지요. 중국에 왔는데 중국의 문화를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역시… 훌륭합니다. 왕족 출신이라는 말을 체감하게 되는군요. 그대의 몸속에 여전히 고귀한 왕족의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왕칭이 과하게 칭찬했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어젯밤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홍콩에 침투한 미 특수부대의 침입을 사전에 알아내기는커녕, 달아나는 것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
심지어 피칼 측에서 빠르게 알려 왔는데도, 제대로 처리된 게 없었다.
발견한 거라고는 산에 남은 흔적이 전부.
그것도 유의미한 건 없었다.
누군가가 머물렀고, 이동했다는 증거만 될 뿐.
그 안에 미 특수부대는 물론이고, 미국과 관련된 것도 전혀 없었다.
땅속에서 끄집어낸 사륜 ATV는 일본 브랜드를 달고 있는 민간 차량이었고, 아군 공격 헬기를 유인한 신호탄은 중국제 물건이었으며, 그걸 덮고 있던 위장용 방수포는 러시아제였다.
따지자면, 미국 이름만 없는 셈.
미국이 침투 후 뒤처리를 잘했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순 없었다.
어쨌든 다 빠져나갔으니까.
특히 피칼은 주석의 손님으로 와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가진 재력이나 인맥이 대단한, 미국과 적대하는 소수의 유럽 백인 중 한 명.
이에 왕칭이 태연한 척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공작부의 일로 부른 게 맞나? 속내가 뭔지 당최 모르겠군. 어제 일을 문제 삼을 태도는 아닌데…….’
그러던 왕칭이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들을 억눌러 가라앉혔다.
피칼과 눈을 마주쳤는데, 내심 긴장이 된 탓이었다.
정확히는 위압감 같은 게 있었다.
마치 중국의 절대 권력인 주석과 대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두 번째라 나아질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군. 기운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야.’
왕칭이 짧았던 피칼과의 첫 만남을 떠올릴 무렵.
어느새 피칼의 입이 열렸다.
“과한 칭찬입니다.”
“그럴리가요. 진심입니다.”
“그렇게 봐주신다면,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감사까지야… 내가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움을 주는 건 피칼 공인데…….”
어느새 왕칭이 슬쩍 운을 떼면서 피칼을 살폈다.
언질을 받았던 중앙통일전선공작부의 얘기를 듣고 싶기도 했고, 다소 버거운 분위기를 흐리려는 것이었다.
피칼이 그런 왕칭의 눈을 마주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큰 도움은 아닙니다만, 찻잔을 마저 채우고 말씀드리지요.”
그렇게 피칼이 다시금 차를 채우고, 왕칭이 거짓 미소를 지으며 기다린 뒤.
피칼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특이할 게 없는 평범한 편지 봉투였는데, 이어지는 말에 왕칭이 주춤했다.
“그 안에 있는 이들이 오늘부터 사흘간, 모두 제거될 겁니다.”
“……?”
무슨 소린가 하며 잠시 멈췄던 그가 얼른 봉투를 열었는데, 금세 동공이 흔들리고 말았다.
손에 들린 게 대만 요인들의 신상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심각한 반중 성향을 띤, 그래서 중앙통일전선공작부의 관리 대상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이었다.
왕칭이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건 굳이 묻지 않았다.
돌아가서 확인하면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문제는 피칼의 말이었다.
제거.
죽인다는 뜻이었다.
“피칼 공이 손에 피를 묻히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으음, 우리가 반길 만한 일이지만… 그러는 이유가 뭡니까?”
“중앙통일전선공작부가 관리하는 자들일 테니,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요주의 인물로 관리 중인 대만인들이 죽어 나가면 중앙통일전선공작부에서 소란이 날 터.
하나, 그건 왕칭이 물으려던 게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왜 피칼 공이 그 일을 하는 겁니까? 혹시 주석과 상의한 일입니까?”
“상의는 아니지만, 뜻을 같이하긴 했었지요.”
“아, 그 뜻이라는 게 뭡니까?”
왕칭이 궁금하단 얼굴로 물었다.
주석의 손님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정확히 알지 못한 탓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알아 둬야 했다.
잘하면 왕칭의 출세가 달려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이에 기다리길 잠시, 피칼이 답했다.
“미국이 만든 편향적인 세계 질서를 잘 정리하여 책장에 넣어 두려는 것이지요. 지난 백 년간 펼쳐져 있었으니, 페이지가 많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왕칭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뒤로 중후하고도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더구나 꺼내어 읽어 본 것만이 아니라, 수백, 수천 번을 편의대로 고쳐쓰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새로 쓴 책을 출판할 때가 됐지요. 세계에는 그들의 말처럼 응당 질서가 필요하니.”
고요히 밀물이 들어차듯 말소리가 응접실에 깔렸다.
이내 왕칭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좋은 비유입니다.”
흡사 감격한 듯한 어투.
왕칭이 박수까지 곁들이며 반응했다.
피칼의 말투나 분위기, 바라보는 표정까지 모두 훌륭한 연설자의 모습인 덕분이었다.
왕칭이 더 늙어 호르몬이 바뀌었다면 울고 있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리고 깨달았다.
‘이자가 진실로 대만 통일을 원하는구나.’
미소를 짓던 중, 왕칭이 주춤했다.
손에 들린 대만 요인들의 서류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자 미국의 세계 질서를 끝내고, 새 질서를 쓴다는 말이 현실로 와닿아 그를 깨웠다.
“저기, 오늘부터 사흘간 이들이 죽는다고 했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 과업에 착수하길 바라는 겁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었다.
대만 통일을 진행하긴 하지만, 실행할 때를 아직 못 잡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피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른 시기도 있겠지만, 지금이 적기입니다.”
“적기라니요? 미국은 중간선거가 코앞입니다. 대만 통일의 첫 글자만 들어도, 우리를 사회악으로 몰면서 요란을 떨 게 분명한데…….”
“주석께서도 빠른 통일을 바라지 않습니까?”
“하지만 상황이 부득이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것 역시 잘 아십니다. 미국놈들이 언론에서 무슨 소리를 할지도 아시는데…….”
“그러니 반미 여론을 노와 돛으로 삼아,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피칼 특유의 중후한 목소리와 근사한 비유에 왕칭이 멈칫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우리 여론은 이미 완벽합니다, 중요한 건…….”
“유럽은 잠잠할 겁니다.”
“일대일로도 완전하게 추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국가가 많은데 어찌…….”
피칼이 중국인보다 더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정작 중국인인 왕칭이 우려를 내비치는 촌극이 벌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그도 다른 누구보다 대만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지만, 전쟁을 일으켜야 하는 입장에서 쉽게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주석에게 말을 전해야만 하는 상황.
잘못하면 주석에게 낙인이 찍혀서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아니라, 한직으로 쫓겨날 가능성도 있었다.
한직이면 차라리 나았다.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나지 않아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석에게 찍혀 죽을 수도 있었다.
이에 계속해서 부정했는데, 피칼이 다독이듯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유럽 국가 몇 개는 잠잠할 겁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말씀대로 저는 유럽 왕족 출신입니다. 여러 나라에 간섭할 만한 입김이 남아 있지요.”
“그 정도란 말입니까?”
“미국도 중간선거이니, 진실로 막으려 들진 않을 겁니다. 여론을 부추겨야 하니, 시늉만 하고 놔둘 겁니다. 필요한 건 선거에 필요한 표지, 대만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이나 일본을 부추겨서 소모전을 시행하려 들겠지만, 그건 걱정할 정도가 아닙니다.”
“아니, 나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왕칭이 다시금 말꼬리를 흐릴 무렵.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칼이 가장 중요한 단어를 꺼내 놨다.
“정 걱정된다면, 제가 대만으로 가는 배의 충각 역할을 한다고 주석에게 전해 주면 됩니다.”
“네? 주석께……?”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지, 떠넘기는 것인지 헷갈려서 주춤한 순간.
피칼이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는 주석이 예전부터 바라던 답이었습니다.”
“아…….”
어느새 왕칭이 들어올 때와 달리, 완전한 저자세로 피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과 행동, 분위기, 대화 내용까지 모두 그를 압도한 탓이었다.
‘빨리 보고해야겠군…….’
만약 주석이 이를 가납한다면, 정말 통일 전쟁이 벌어질 것이었다.
중국군이 진군하고, 대만 땅을 밟을 터.
상상으로만 해 왔던, 그간 이루지 못한 숙원을 떠올린 왕칭이 몸을 떨었다.
그러자 피칼이 다시 보였다.
칭찬처럼 말한 왕족이 아니라, 정말 사람이나 나라를 다스릴 만한 왕 같은 모습.
‘주석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구나…….’
* * *
홍콩과 마카오 그리고 유럽을 경유해서 미국으로 오는 지난한 시간이 끝났다.
군용기에서 내리자마자, 호세가 양손을 벌리며 만세를 했다.
“와, 이제야 살겠군. 빌어먹을 중국 땅 같으니… 여태 갔던 곳 중 가장 좆같았어.”
“그러게, 수술 부위가 악화될 줄이야.”
어느새 태연해진 마커스가 말을 받았는데, 분위기가 그리 좋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모두에게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다시 생각해 봐, 마커스. 치료해 보고, 재활까지 한 다음에 그러고 안 되면…….”
“이미 상태는 좋지 않았어. 그동안 잘 버틴 척했을 뿐이지.”
그 말에 호세도 입을 다물었다.
아마 서로를 잘 알기에, 그래서 대꾸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나도 ‘버틴 척’이라는 말의 속내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다들 자질구레한 부상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후유증과 힘든 가정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대외협력국에서 선발하지 않은 이유를 얼추 듣기도 했었고.
고로 이번 작전이 마커스의 은퇴 작전이라는 소리였다.
아쉬워하는데, 마커스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리.”
“고맙기는 뭘…….”
“네 덕분에 이렇게 버텼어. 아니었다면 진작 은퇴했겠지. 더 심한 부상을 입거나 죽은 채로 돌아오거나… 어쨌든 네 덕분에 여러 번 살았고, 인생에 다시 없을 경험도 했었어.”
그러면서 미소 짓던 마커스가 조용하던 제이크를 쳐다봤다.
“그리고 팀장.”
제이크가 쳐다보길 잠시, 마커스가 도장이라도 쿵 찍듯이 말했다.
“내 후임은 안드레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