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타이람(Tai Lam) 해안 경찰서와 조그만 모래 해변을 지나,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형부대 중대형까지, 약 100대에 이르는 요트가 정박한 선착장이었다.
정확히는 그중 한 요트로 들어가야 했다.
타원형의 기업 로고가 프린트된, 홍콩 위장 기업 명의로 운영 중인 제법 큼직한 중형 요트.
수면 위로 올라와 잠깐 살폈는데, 상황이 아주 좋았다.
거의 야밤이 다 되어서 요트가 빽빽하게 정박해 인근 감시 카메라를 다 가렸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기도 했거니와 큼직한 보호 천막이 요트를 감싸서 갑판을 전부 덮었기 때문이었다.
올라타는 과정에서도, 탄 이후에도 노출될 일은 없다는 뜻.
어느새 제이크가 상승하라는 수신호를 했고, 순서에 따라서 수면 위로 올라가, 빠르게 요트에 올라탔다.
발소리와 함께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길 잠시.
나보다 앞서 요트에 탑승했던 해리가 다가와 어둠 속에서도 엄지를 내밀어 보였다.
“안전합니다, 선배님.”
“그럼 마커스부터 좀 부축해.”
숨소리가 거친 마커스를 향해 말하자, 곧장 부정하는 답이 돌아왔다.
“후욱… 그 정도는 아냐, 됐어. 아직 괜찮아.”
“그럼 마저 경계 서겠습니다.”
그 말 뒤로 마커스가 걸음을 옮겼는데,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이 자못 힘들어 보였다.
감정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집이나 후회, 아쉬움, 더 하고 싶은 욕심까지 비치는 것 같았다.
물론 육안에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검은색으로 잠겨 가는 형체에 불과했으나, 아마도 속은 내 생각보다 더 복잡할 것이었다.
마커스는 굳이 표현하지 않고, 혼자 감당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맨 뒷열의 호세와 함께 요트 선내로 들어가자, 그제야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취침등처럼 켜 놓은 옅은 빛.
거실 형광등처럼 밝진 않았으나, 이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여태 암흑 같던 산길과 바닷속을 지나오느라, 개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타릴 제도에서 탄환이 할퀴었던 뺨은 나뭇가지가 스쳐서 재차 상처가 났고, 발목은 잡초에 가려진 돌부리를 밟아서 몇 번이나 비틀릴 뻔했으며, 바닷속에서는 앞사람을 놓쳐서 애먼 곳으로 돌아갈 뻔했었다.
그렇게 불빛으로 다가가자, 제이크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다들 괜찮나? 특이 사항은?”
그 말에 바로 마커스를 바라봤다.
어떻게든 버티긴 버텼으나, 마커스는 분명 괜찮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이내 그의 입이 열렸다.
“제 상태가 안 좋습니다. 정상적인 작전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불편한 수준이 아니라고? 많이 악화됐나?”
“…네, 그렇습니다.”
좌절스러울지언정 담담하게 답하는 마커스를 바라보길 잠시.
호세의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대충 설명이라도 해 봐.”
“재수술을 좀 했어.”
“재수술이라니?”
호세가 되묻고, 마커스가 카마르니아에서의 총상과 이후 수술, 이후 상황과 재수술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호세가 욕지거리를 흘리고, 레이첼까지 놀랄 무렵.
제이크가 목소리를 냈다.
“퇴출 작전은 현행대로 유지하되, 상황 발생 시에 마커스는 환자 역할이 되고, 호세가 부팀장의 역할을 맡도록.”
“으음, 알겠습니다.”
호세가 아직도 안타깝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답하고, 제이크가 마저 목소리를 냈다.
“그럼 복장 환복하고 해리와 교대해. 불침번 서고, 나머지는 쉬고.”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했다.
이 요트에 도착하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마카오로 이동해야 했고, 마카오에서 관광객으로 위장해 유럽으로 이동한 뒤, 거기서 군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복잡하고 번거롭지만, 이 정도 수고로움은 감수해야만 했다.
중국 군경들이 미국인을 찾는데 혈안이 됐고, 우리는 그만큼 조심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국무부에서 시뮬레이션한 결과 이게 가장 안전하기도 했고.
그렇게 취침 준비를 할 때였다.
귀에 헤드셋을 낀 채로 상황을 보고하고 지침을 받던 제이크의 인상이 구겨졌다.
흐린 불빛에서 일그러진 주름이 선명해질 무렵.
곧 그의 입에서 이유가 흘러나왔다.
“흠, 아쉽게도 놈이 살았군.”
“노먼 존스 말입니까?”
내가 얼른 묻자, 어느새 무전을 마친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부상을 좀 입은 모양이야.”
“부상은 어느 정도랍니까? 위독한 겁니까?”
가늠이 안 돼서 물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 건 차량을 향해 격발한 거고, 목격한 건 그 차량이 멈추는 게 다였다.
정확히 어떻게 멈췄는지도 몰랐다.
나무 사이로 이동하던 헤드라이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끊겨서, 어딘가 들이박았다고 추측한 게 다였다.
그랬다면 운전자가 죽거나 다쳤을 거고, 탑승자들도 상태가 나쁠 터.
이에 기대했는데, 제이크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확인하지 못했다더군. 들것에 실려 간 것까지 봐 둔 모양이야.”
“아…….”
“그래도 시신 2구는 나왔어.”
“시신 2구라면… 운전자와 조수석에 있던 놈이겠군요.”
“그래, 안전벨트를 안 맸는지 전면 창을 뚫고 바깥으로 날아갔다더군.”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죽은 세르게이가 떠오를 무렵.
어느새 제이크가 무전기를 정리하고,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이만 자, 내일 또 움직여야지. 특히 마커스.”
안 자고 있었는지, 마커스가 헛기침을 했다.
“큼, 예, 자겠습니다.”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면 말해. 그때는 내가 들어 주지.”
“그 정돈 아닙니다.”
“그럼 그때까지는 리가 마커스 옆에 붙어 있어.”
“리가 왜… 안 그래도 됩니다. 작전은 어렵지만, 그 외에는 혼자서 기동할 수 있습니다.”
마커스가 바로 반박했다.
과한 조치라는 듯한 반응에 나도 답하려다 주춤했을 때였다.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그게 가장 안전해. 그러니 닥치고 지시에 따르도록.”
혹시 모를 총격전을 대비하는 모양이었다.
마커스처럼 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왜 그러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도착한 뒤로 들은 무전 내용이 썩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군경의 타이모산 포위, 진입, 수색 그리고 미 영사관으로 이어지는 도로 검문검색까지.
투입 인원만 거의 일개 사단에 준할 정도라고 했었다.
만약 이 위치가 아닌 다른 퇴출로를 찾았다면, 총격전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럼 그때부터는 운이 작용할 것이었다.
죽든, 죽이든, 달아나든, 체포되든, 어떻게 되든 간에 전략 전술이 적용되기 어려웠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 무렵, 딴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미리 말 한마디 해 두자면…….”
마커스였다.
그가 내일 교전이 발생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듯 목소리를 깔았다.
“전 후임으로 안드레이를 추천합니다.”
“…뭐?”
제이크가 되묻고, 오면서 이미 안드레이의 이름을 들었던 나도 주춤했다.
유언이라도 남길 줄 알았더니, 후임 얘기를 꺼낸 탓이었다.
제이크가 말을 자르듯 물었다.
“이유는?”
“실력을 갖춘 놈들은 많지만, 리와 꽤 많이 발을 맞췄던 건 그놈밖에 없습니다. 리 역시도 그를 신뢰하고요.”
“맞는 말이지만, 반길 만한 이름은 아니군.”
“그래서 미리 말해 둔 겁니다, 혹시 팀장이 거절할까 봐……. 리를 보조하기 위해서는 손발이 잘 맞는 놈이 필요할 겁니다. 안 그래, 리?”
마커스가 날 향해 물었는데, 쓴웃음이 나고 말았다.
상당히 숙고했다는 게 느껴진 탓이었다.
오는 길에 내게 말한 것도 그리고 지금 제이크에게 말한 이유가 있을 정도로.
“맞아.”
짧게 답하자, 제이크의 목소리가 그만하라는 듯 들려왔다.
“잘 알겠으니, 일단 자. 마카오로 넘어가야 하니.”
“그 정도 답이면 좋군요. 알겠습니다.”
마커스가 답하자, 제이크가 나까지 단속하듯 말했다.
“리, 너도 눈 붙여. 퇴출할 때까지 마커스하고 같이 움직여야 해.”
“알겠습니다.”
그 말에 대답하고서 눈을 감았다.
마른 수건으로 닦아서 바닷물의 찝찝함과 냉기가 남았으나,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피곤하기도 했으나, 좀 젖었다 나온 건 별것도 아닌 탓이었다.
땅속에서도, 비 맞으면서도, 행군하면서도 자 봤던 터라, 이런 건 가벼운 불편에 불과했다.
심지어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고, 요트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잠자리였다.
눈을 감은 채 인사를 건넸다.
“다들 좋은 꿈 꾸기 바랍니다.”
* * *
중국, 광저우시(广州市), 시가지 인근의 중국식 저택.
널찍한 서재에 있던 피칼이 앞에 놓인 노트북의 화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영상 속 노먼의 상태가 썩 나빴기 때문이었다.
사고로 인한 출혈량이 많고, 골절 역시 심각해서 평생 장애를 갖게 될 정도.
그것까지는 봐줄 수 있었는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정신적 충격.
몇 번이나 의식을 회복한 노먼이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인 PTSD 증상을 뚜렷하게 보인 것이었다.
“시련이 내 운명을 강하게 때리나, 나는 더 단단해질지니…….”
혼잣말이 나직하게 깔렸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제야 막 그의 사람이 된 노먼을 별로 활용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쓸모 있는 인재였다.
수학이나 언어 부분에서 뛰어났는데, 그뿐만 아니라 일머리까지 좋았다.
월터 그레이슨이 노먼을 후계자로 삼고, 또한 자폭하는 쇼를 벌이면서까지 노먼을 도망치게 만들 정도로 우수했다.
한데, 그런 사람이 병신이 되어 노트북 화면 속에 있었다.
세르게이처럼 죽거나 지안드로처럼 생포된 것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런 사실에 만족할 순 없었다.
정작 잡아야 하는 이들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제이크 러셀, 마커스 워싱턴, 호세 페레즈, 레이첼 포스트, 해리 톰슨, 강태 리…….’
피칼이 그들의 이름을 잘근잘근 씹듯이 떠올렸다.
그 외에도 다른 협조자들이 있겠으나, 중요한 건 이 여섯 명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수하들을 직접 죽였으니까.
마땅히 잡아야만 했다.
하여, 나름의 계획을 수립하던 와중이었는데, 돌연 이 홍콩까지 직접 온 것이었다.
그것도 중국 공항과 항만에 깔아 둔 감시망을 피해서.
이는 일종의 완전범죄였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거듭 준비했으며, 실수 없이 모든 걸 수행한 것이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결과가 그랬다.
자존심이 상한 중국군을 따돌리고, 타이모산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군사력 증강을 위해 애쓰나, 질적으로 뛰어난 군대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신호탄 따위에 속은 게지.’
고개가 좌우로 저어졌으나, 그렇다고 중국군을 포기할 순 없었다.
피칼이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칼인 탓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칼을 휘둘러야 했다.
노먼까지 망가졌으니, 더는 시간을 끌어선 안 됐다.
미국의 발목을 잡아야 했다.
정확히는 그가 준비한 시나리오가 이뤄지도록 중국에 바람을 넣어야 했다.
짧은 각오 끝에 피칼이 전화기를 들었다.
“위르겐.”
- 네, 보스.
집사인 위르겐의 짧은 대답 뒤로 피칼이 지시를 내렸다.
“왕칭 상무위원과 약속을 잡게. UFWD(United Front Work Department: 중앙통일전선공작부)에게 줄 일이 있다고 하면 알 걸세.”
- 알겠습니다.
위르겐이 단단하게 답했다.
그 역시 이 말의 속뜻을 모르지 않았다.
피칼이 진행하는 일을 이미 인지하고 있을뿐더러, 약어로 UFWD인 중앙통일전선공작부가 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중국 공산당 산하의 유력한 정보 기구 중 하나.
그리고 대만 통일을 위한 조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