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본관이 비었다는 레이첼의 말처럼 눈앞의 건물에는 작은 인기척조차 없었다.
그저 전기가 작동하는 균일한 소음만 있을 뿐.
정말 다 도망간 것이었다.
예상 병력의 절반밖에 안 죽었는데도, 본진을 아예 비웠다는 의미.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용병 생활을 하면서, 다른 작전을 하면서, 지역 민병대도 이것보다는 오래 버텼었다.
그런데 상황이 발생한 지 2분 만에 다 튀다니?
더불어 이해가 안 되는 게 더 있었다.
타깃인 노먼 존스.
그가 도망갔다는 사실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노먼의 위치.
터널 출발 지점인 본관에서 약 700M 떨어져 있던 미확인된 출구에서 나타났었다.
이게 썩 의아했다.
100M 위치에 있는 출입구를 이용한 병사들보다 빨리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뛰어서 가는 건 불가능했다.
레일이 있어도 마찬가지.
즉, 터널에 미리 들어가 있었거나 총성이 울리자마자 도망갔다는 말이었다.
상황이 발생한 지 고작 2분 정도 됐으니까.
결론은 금세 나왔다.
터널 안에 뭔가가 있거나 당장 도망갈 만한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뜻.
거기까지 판단했을 때였다.
“…함정?”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있었다.
달아난 정황도 그렇지만, 상대도 문제였다.
배신자 그리고 피칼의 부하.
그냥 갱이나 카르텔도 찜찜한 판인데, 상대는 그런 범죄 조직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멸망시키는 미친놈들이었다.
부비 트랩 따위를 설치해 놨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것도 800미터짜리 터널을 팔 정도니, 아마 건물 기둥이나 내력벽에 폭탄을 매립해 놨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자폭 용도로 쓰기 위해서.
그런 짧은 생각을 갈무리하는 사이,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타깃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 북서쪽 방향, 직선 거리로 약 580미터 정도.
“격실 수색 가능한 추가 인원은?”
- 4인 대기 중, 격실 내 적 위협 없다는 가정하에 가능할 것으로 보임.
짧은 질문과 대답이 오간 뒤.
제이크가 결단을 내리듯 무겁게 말했다.
“그럼 당소 건물 진입 취소하고, 타깃 추적하겠음. 격실 수색 전달 바람, 이상.”
그렇게 무전을 마친 제이크가 곧장 지시를 내렸다.
“진입의 역순으로 퇴출한다. 리가 후방 확실하게 보면서 빠져나와.”
“예.”
짧게 답하는 사이.
어느새 추격으로 목적을 바꾼 위성 정보가 전달됐다.
흩어진 적의 이동 방향과 노먼의 움직임까지.
제이크를 따라 빠져나오면서 들은 내용이었는데, 그 사이에 짜증이 섞인 듯한 호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길, 도망가는 솜씨는 끝내주는군.”
그의 말에 나도 공감했다.
노먼의 예상 경로가 북쪽인데, 그곳으로 올라가면 마주하는 게 중국의 선전시(深圳市) 경계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선전시 경계 지역에 있는 군사기지나 준 군사시설로 갈 확률이 높았다.
물론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이미 사전 준비 단계에서 염두에 두고 있었고, 관련한 계획까지 수립해 뒀었다.
다만, 호세가 짜증 냈듯 신경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선전시와의 거리가 고작 12㎞에 불과한 탓이었다.
멀쩡한 아스팔트 도로였다면, 차량으로 10~20분이면 충분히 주파하고 남을 만한 거리.
중간에 중국군이 마중이라도 나왔다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게 분명했다.
즉, 위험 요소가 상당한 상황.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제이크를 따라 도착한 지점에서 결국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차량이라더니… 이거였구나.”
추격용으로 마련된 수단이 산악용 4륜 오토바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ATV(All-Terrain Vehicle).
그것도 스즈키 로고가 달린 민간용 ATV로, 군용에서 볼 법한 지지대 같은 것도 없었다.
운전 잘못해서 낙상하면 그대로 목이 부러질 만한 상황.
제이크가 운전대에 타더니, 내게 손짓했다.
“리, 일단 뒤에 타. 내가 운전하지.”
“탈 줄 아십니까?”
“사막에서 많이 몰았었어.”
“그럼 믿고 타겠습니다. 안전 운전 부탁드립니다.”
대답 대신, 부르르릉하는 엔진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제이크의 무전이 전파됐다.
- 내가 선두, 후미는 마커스. 각자 안전 거리 유지하면서 이동해.
이내 레이첼에게 받았던 HK416의 멜빵을 조정하는 사이
ATV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 * *
“후욱, 후욱… 차는?! 차는 어디 있는 겁니까?”
노먼이 거친 호흡을 뱉고서 물었다.
막 터널을 빠져나와 산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아직도 준비된 차량이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를 수행하던 용병이 PDA를 꺼내며 답했다.
“위치가… 저쪽 바위 아랩니다.”
“어, 얼른 갑시다! 빨리… 그놈이 쫓아올 겁니다!”
노먼이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그가 가장 우려하던 순간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강태의 등장.
물론 확실하게 신원을 파악한 건 아니었다.
노먼이 파악한 건 거구의 팀장인 제이크와 유색인종들 그리고 지하실 카메라에 잡혔던 아시안으로 보이는 흔들리는 화면이 전부였을 뿐.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노먼은 거기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바로 도망쳤다.
수많은 병력을 놔둔 채로, 단 두 명의 러시아 용병만 데리고, 정말 필요한 것만 챙겨서 지하실로 내려갔고, 그대로 유압식 수동 레일을 타고 지상 출입문으로 이동했었다.
심지어 설치 후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녹슨 비상구로 나왔다.
이전까지 드나들었던 출입문은 미 정보당국에게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고, 그러면 추격 역시 빨라질 테니까.
어쩔 수 없었다.
정황상 습격한 이가 강태였고, 그의 동료들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진작부터 결심한 대로 달아난 것이었다.
이내 위장막으로 덮어 두었던, 해치백 차량에 가까스로 탑승한 노먼이 힘껏 문을 닫았다.
“얼른 출발! 출발합시다!”
다른 용병 한 명이 막 조수석에 타고, 운전대를 쥔 이가 뒤를 돌아봤다.
“목적지는…….”
“일단 달립시다! 내가 내비게이션 켜 줄 테니까! 어서 출발하란 말입니다!”
“너무 급합니다, 침착하십쇼. 그러다 일 그르칩니다.”
용병이 노먼을 달래듯 말했다.
평소와 다른 노먼의 모습이 영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용병이 아는 노먼은 이렇지 않았었다.
미국 물을 먹었고, 가방끈도 긴 데다가, 대체로 얌전한 범생이였다.
거기다 여러 개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고, 숫자가 빼곡한 서류를 보면서 순식간에 계산해 내는 천재 같기도 했었다.
머리 좀 좋다는 20대의 어중이떠중이와는 달랐다.
한데, 지금 이 순간의 노먼은 달랐다.
마치 패닉에 빠진 인간처럼 보였다.
이에 노먼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효과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반발하듯 반응한 탓이었다.
“이봐요! 내가 전에 말한 적이 있잖습니까?! 상대가 보통 놈이 아니라고! 괴물이라고, 괴물!”
노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용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출발하죠.”
그의 말마따나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특수부대를 섬멸한 인간이라고.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 데다가, 말도 안 되는 저격 솜씨를 갖춘, 인간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당연히 다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일종의 과장이라고 생각했고, 전쟁을 모르는 노먼이 뱉는 헛소리로 치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꾸해서 좋을 게 없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은 그러려니 해야만 했다.
용병 역시 죽거나 다친 동료를 보고, 또한 잡혀 온 포로를 보면서 체득한 것이었다.
부아아아앙―
그렇게 액셀을 밟으며 출발하자, 뒷자리에서는 노먼이 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운전석 쪽으로 목적지를 입력한 네비게이션을 주고서는 후면 유리와 좌우 차창을 번갈아 살핀 탓이었다.
이에 조수석의 용병이 목소리를 냈다.
“가만히 있는 게 우릴 돕는 겁니다. 불안한 건 알겠지만…….”
“아니, 안다면 그렇게 못 있습니다. 당장 제대로 경계부터 해야지. 그냥 그렇게 앞만 보면 되겠습니까? 놈이 어디서 나올 줄 알고…….”
“그럴 리 없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긴 시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도피했던 지안드로마저 결국 생포됐다.
그것도 지난한 교전 끝에 잡힌 게 아니었다.
고작 노출 한번 됐다고 생포된 것이었다.
그것도 손발이 모두 날아간 채.
이는 결코 그가 멍청해서,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상대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강태.
그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지안드로는 중국 국경을 통과해서 합류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날고 긴다는 저격수들도 헬기에서 달리는 오토바이를, 그것도 수백 미터 거리에서 저격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강태는 타이어를 맞혔고, 발을 쐈으며, 손까지 날렸었다.
그 생각을 하던 노먼이 진저리를 쳤다.
“놈은 괴물이라고 했잖습니까? 지금도 어디선가 우리를 조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머리나 당신의 머리가 날아갈… 아니, 타이어만 맞혀서 우릴 세울지도 모릅니다.”
“지나친 상상입니다. 그 건물에는 50구경 기관총 진지와 군경 출신의 중국인 35명이 있습니다. 뛰어나진 않아도, 충분히 시간을 벌 만한 숫자죠. 설령 그들을 뚫고 추격해도, 사격할 만큼 가까워지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그만 좀 하고, 이제 가만히…….”
“미치겠군. 앞으로는 리를 아는 사람으로 용병을 구해야겠어.”
“누구요? 리?”
“그렇습니다, 강태 리. 전에 말했는데, 혹시 아는 겁니까?”
“모릅니다만, 기억해 두죠.”
“제기랄…….”
“거, 말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당신 명령을 따르긴 해도, 욕까지 참아 줄 게이 새끼는 아니라 말이지.”
“…….”
“그러니까 안전벨트나 매고, 가만히 있길 바랍니다. 차가 흔들려서 그 쓸 만한 머리가 여기저기 부딪히면 손해 아니겠습니까?”
노먼을 타이르지 못한 용병이 은근한 겁박을 섞어 가면서 말했다.
이에 노먼도 주춤한 순간.
캉! 카강!
철판이 뚫리는 마찰음이 났고, 이어서 멀찍이서 묵직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
노먼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조수석에서 자신을 겁박한 이에게 말하려던 순간.
“으윽!”
그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동시에 방탄복이 가리지 못한, 옆구리 아래쪽에서 뜨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설마 하는 얼굴의 그가 고개를 내리다가 몸을 떨고 말았다.
피격된 탓이었다.
옷 위로 불그스레한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다행히 숨도 쉴 수 있고, 팔다리의 감각도 멀쩡했으나, 출혈과 통증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노먼이 어느새 떨리는 두 눈으로 앞을 쳐다봤다.
“이, 이걸 어떻게…….”
당황해서 보자, 조수석에서는 러시아어로 된 쌍욕이 깔려 나왔다.
“Сука Блять! Там стреляли?!(니미 씨발! 저기서 쐈다고?!)”
어느새 야간 투시경을 쓴 용병이 차창 너머를 보고 있었고, 이어서 소리쳤다.
“엎드려!”
그와 동시에 피격되는, 탄환이 차체를 때려 맞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가강! 카강! 파바박!
전보다 몇 번이 더 늘었다.
차량이 휘청했고, 운전대를 쥔 이가 소리쳤다.
“Там стреляли?!(어딘데?!)”
“Сзади, 4… 400метров.(후방, 4… 400미터.)”
“Что?(뭐라고?)”
운전석의 용병이 못 믿겠다는 듯 묻자, 조수석에서 신음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이러다 다 죽겠습니다, 어디든 연락하십쇼. 중국군한테 마중 나오라고 하든가, 당신 상관한테 지원이라도 보내 달라고 해야 합니다.”
“잠깐… 옆구리가…….”
“그거 맞았다고 안 죽습니다. 나도 허벅지에 하나 박혔으니까, 최대한 빨리 연락하십쇼. 이 친구 머리통에 박히면, 우리 다 죽습니다.”
말끝에 그가 운전석으로 턱짓했고, 노먼이 힘겹게 전화기를 하나 꺼냈다.
피칼에게 연락하려던 것이었다.
이에 번호를 누르려던 노먼이 움찔하고 말았다.
삐리리리리―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
당황한 그가 주춤했다가도 얼른 전화를 받자, 피칼의 목소리가 중후하게 깔렸다.
- 전화가 늦진 않았나?
“아… 보스! 놈들이…….”
- 알고 있네. 몸은 어떤가?
마치 사람을 쓰다듬듯 피칼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물었고, 노먼이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한 발 맞긴 했는데… 음, 아직은 괜찮습니다.”
- 재수가 없었군. 도착 즉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말해 두겠네.
“감사합니다만, 그보다는…….”
이어서 조심스레 도와 달라고 하려던 노먼이 갑자기 들려온 말에 주춤하고 말았다.
- 이미 조치했네.
“……?!”
무슨 말인가 싶을 무렵, 듬직하면서도 온화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 전차와 헬기가 출동했어. 곧 도착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