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화상회의가 끝나고 며칠이 더 흐른 뒤, 국무부에서 양복쟁이 여러 명이 찾아왔다.
새롭게 추가되고 바뀐 계약서와 함께.
“여기 서명하면 됩니다.”
선글라스를 낀 이의 말을 따라서 펜을 쥐고 사인했다.
그리고 마주한 선글라스를 쳐다보며 물었다.
“다 된 겁니까?”
“네, 축하드립니다, 에이전트 리.”
에이전트라고 불리는 게 썩 어색하긴 했으나, 악수를 청하기에 받아 줬다.
어쨌든 나쁘진 않았다.
기존에 하던 임무를 지속해서 이어 갈 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그대로 유지되고, 국장이었던 로버트가 계속해서 최종 책임자의 역할을 맡았으며, G&G Corp 간부였던 론까지 아예 요원으로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CIA에 있는 GRS(Global Response Staff) 형식을 차용했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나하고는 별 관련이 없어 보였다.
일이 예전과 변함없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TF 242라는 의미 없는 팀명만 달았을 뿐.
굳이 바뀐 걸 꼽자면 조직이 국무부 장관 직속이 됐고, 팀은 작전이 끝날 때마다 해체되고 재정비되며, 필요하면 각종 정보기관이나 특수부대로부터 지원을 받기 용이하다는 게 다였다.
조금은 나아졌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 생각도 곧 고쳐먹고 말았다.
“……?”
양복쟁이가 선글라스 끼고 계약서만 들고 온 게 아니라, 선물이라면서 뭔가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총기 같은 게 있을 법한 큼직한 하드 케이스.
웬만한 장비는 다 갖고 있지만서도, 자연스럽게 시선부터 갈 때였다.
양복쟁이가 하드 케이스를 내쪽으로 내밀었다.
“이건 에이전트 리를 위한 장비입니다.”
이어서 딸깍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을 무렵.
“어?”
예상치 못한 물건에 주춤했다.
방탄복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도 기존에 착용하던 상체 일부만 가리는 게 아니라, 온갖 모양이 들어 있었다.
마치 팔다리까지 전부 착용할 수 있는 모습.
당연히 처음보는 물건이었다.
“이거 전신 방탄복이에요?”
집어 들면서 묻자, 예상한 것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근데 설마… 제 사이즈에 맞춘 겁니까?”
여기 머무는 동안 온갖 신체검사를 다 했고, 그 사이에 신체 사이즈도 꼼꼼하게 측정했었기에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답이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오…….”
오래전에 구입한, 20만 원짜리 싸구려 맞춤 정장이 떠오를 무렵.
설명이 이어졌다.
“권총탄은 모두 완벽하게 방호 가능하나, 7.62밀리미터의 소총탄은 거리에 따라 타박상이나 골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방탄복 중에서는 최고 수준의 성능이라고 봐야 했다.
급이 낮으면 소총탄에도 뚫리는 경우가 왕왕 있고, 권총탄을 맞아도 갈비뼈가 부서질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었다.
이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얼른 몇 개를 착용해 봤다.
“나쁘진 않은데… 전부 착용하긴 어렵겠는데요, 걸리적거리는 게 있어서…….”
관절 부위마다 간섭이 있었고, 이를 안다는 듯 양복쟁이가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원하는 부위별로 착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자주 부상을 입는 부위만 착용해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
“예, 아무래도 그래야 되겠네요. 끼고 싶다고 다 끼면 자세가 안 나오니… 참, 이건 요청하면 또 나오는 겁니까? 아니면 구입해야 하는 겁니까?”
착용하던 걸 떼어 내며 묻자. 간결한 답이 돌아왔다.
“요청 시에 지급됩니다.”
“그러면 뭐…….”
금세 결론이 나왔다.
“다는 아니지만,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그렇게 양복쟁이를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돌아가는 대신에 우리 팀원들까지 다 불러모았다.
“예정된 교육을 진행할 겁니다.”
“예정은 무슨… 아, 빈칸 말하는 겁니까?”
스케줄에 상세 내용이 없던, ‘교육’이라고만 적혀 있던 게 떠올랐다.
지금 그걸 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무슨 교육인지는 안 받아도 뻔했다.
작전과 관련된 것일 터.
역시나 짐작했던 게 그대로 양복쟁이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정확히는 정보원 포섭과 협박, 위장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들.
“이거 참…….”
머리 쓸 게 너무 많아서 내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대충 듣거나 무시하진 않았다.
어쨌든 전장에서의 생존 확률을 높여 주리라 생각됐으니까.
아니어도 쓸모가 있을 것이었다.
양복쟁이가 그냥 이론만 갖고 떠드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경험이 들어 있었다.
강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악수를 나누던 그의 손에서도 느꼈던 것이었다.
아문 흉터와 굳은살이 남은 손아귀의 흔적은 쇠 좀 만지면서 운동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다.
현장에서 개같이 굴러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팀원들도 마찬가지로 비슷해서 잘 알았다.
심지어 레이첼마저 운동선수 버금가는, 굳은살이 가득 박힌 손을 갖고 있었다.
이에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그날만이 아니라, 이후로 며칠이 더 흐를 때까지.
그리고 나서야 언질했던 정보가 들어왔다.
바로 TF 242로서 들어가는 새 작전.
제이크가 아닌, 영상으로 얼굴을 드러낸 론이 회의를 주도했다.
- 오퍼레이션 버그 슬랩(Bug Slap: 벌레 잡기).
말 뒤로 화면이 사라지면서 작전 정보가 표시됐고, 론의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 표적은 노먼 존스, 좆같은 벌레 새끼다.
* * *
“아아! 그 개자식! 그러고 보니 바시카날과 관련된 뉴스도 잘 안 나오던데, 일부러 감추고 있던 겁니까? 저놈을 잡기 위해서?”
호세가 스크린에 표시된 저화질 사진을 보면서 물었다.
왜 묻는지 알 법했다.
미국에 입국할 때만 해도 생포한 지안드로 바시카날과 관련된 기사들이 꽤 많이 났었는데, 어느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극우 정치인, 그중에서도 매파로 분류되는 강경파들이 목이 쉴 정도로 떠들어 댔으며, 이를 들은 중국이 모르쇠를 넘어 미국의 거짓 선동과 조작이라는 말을 해 대는 바람에 어마어마하게 시끄러웠었다.
중국이 가만히 있기라도 하면 별 반응이 없겠으나, 오히려 덤벼드는 바람에 온갖 반중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관련된 인종차별 범죄도 더더욱 부각됐었다.
쉽게 말해 강 대 강 상황이 만들어져서 조용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었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확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것도 다른 이슈로 덮혀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한 달이라는 휴가 기간이 끝난 지금, 아예 잠잠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뉴스를 봐도 지안드로 바시카날과 관련된 소식은 물론이고, 관련된 다른 반응도 볼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별다른 소식을 전달하지 않았었다.
그저 조용했었다.
나 역시도 그냥 운동하고, 사격하고, 평소처럼 지낸 게 전부였다.
한데 노먼 존스의 이름이 나온 상황.
호세가 물어볼 만했고, 다들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답을 기다렸다.
모르기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 그건 나 역시도 모르네만, 그동안에 내가 모르는 작전이 많이 진행됐네. 이 사진도 거기서 얻어 온 것들이고.
저화질 CCTV나 블랙박스에서 얻어 낸 노먼의 사진을 다시금 바라보는 사이, 론의 말이 이어졌다.
- 그러니까 웬만한 건 묻지 말게, 알지 못하니까. 내가 할 일은 TF 242의 현장 임무를 관리, 지원하는 것밖에 없네. 알겠나?
“으음, 알겠습니다. 근데 호칭은 뭡니까? 우리 팀장이 TF 242의 팀장이라던데?”
- 나는 국무부에 속한 계약직 직원이야. 그냥 론 마이어스라고 불러.
“그럼 국장도 마찬가집니까?”
- 그래, 말 안 하던가? 로버트 엔더슨, 그냥 그렇게 부르면 돼. 우리 호칭은 작전 들어가기 전에 새로 만들어질 뿐이야. 음어로 말이야.
“어색하네요, 직책도 없는 간부들이라니. 우리는 그냥 작전이나 신경 쓰는 게 낫겠군요.”
- 그래, 호세. 국무부의 역사라도 외울 생각인가?
“그럴 리가요.”
호세가 답한 뒤, 곧 화면이 바뀌었다.
노먼과 함께 사진이 찍힌 사람들이 표시된 것이었다.
백인과 황인 여러 명.
화질이 썩 좋지 않아서 눈여겨보면서 설명을 들을 때였다.
“어……?”
아는 얼굴이 보였다.
정확히는 인 게임이 아닌, 시네마틱 영상 속에서 몇 번 본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피칼 뒤에 병풍처럼 조용히 서 있는 캐릭터 중 하나.
엑스트라처럼 나오는, 이름조차 표시되지 않았던 캐릭터인데, 워낙 게임을 많이 하다 보니 알아본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이름도 나왔다.
- 위르겐이라고 불리는 자로, 현재로서는 독일계 유럽인으로 추정하고 있네.
동시에 맞은편의 레이첼이 내게 눈짓했다.
“왜 그래요?”
“아니에요. 그냥 영…….”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봤던 것 같다고 말해도 설명하기가 번거로운 탓이었다.
간만에 라레플에서 나왔던, 그래서 얼굴을 알아보는 캐릭터가 나와서 반응한 게 전부였다.
알려 주려는 게 아니었고, 알려 줄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름도 몰랐었다.
위르겐이라는 것도 방금 처음 들었고.
그런 면에서 오히려 작전에 혼선을 줄 수 있기에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엑스트라가 아니고, 측근이었나……?’
바뀌기 이전의 스토리를 다시금 짚어 볼 무렵, 작전 지역이 스크린에 표시됐다.
중국 남부에 위치한 홍콩.
단번에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미국이 강 대 강으로 다퉈 댄 탓이었다.
그 영향이 없을 리 만무했다.
안 그래도 함부로 휘젓기 힘든 나라인데, 침투는 물론이고, 활동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졌을 터.
“음, 홍콩은 처음인데…….”
해리가 호기심 어린 눈을 할 무렵.
침투 방식과 함께 론의 설명이 이어졌다.
- 두 개 조로 나뉘어서 입국하게 될 거야. 사업하는 비지니스 팀, 단체 관광객에 소속된 팀.
그와 동시에 화면에 팀 편성과 침투 방법 등이 표시됐는데, 보다가 야트막한 감탄이 나왔다.
“이야, 꼼꼼하네…….”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사업과 단체 관광 일정에 맞췄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공적인 시간에는 정말 사업가나 관광객이 된 것처럼 활동해야 하고, 저녁부터 주어지는 자유 시간에 작전을 진행해야만 했다.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 조식 직전까지.
그리고 돌아올 때는 다른 여권을 통해서, 다른 일정에 맞춰서 신속하게 빠져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현지에서 미군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 정도.
그곳에 연락 장교인 필립은 없었다.
‘내심 아쉽네…….’
저번 작전이 절로 떠올랐다.
브라질에서 받은 현지 지원이나 베트남에서 날아왔던 헬리콥터까지.
그 모든 게 불가능했다.
물론 미리 침투한 요원이나 지원 인원이 있다고는 하나, 소수에 불과했다.
많아 봐야 십여 명.
우리처럼 임시로 조직된 TF 235라는 팀과 CIA 특작 요원 몇 명이 전부였고, 그들이 가진 화력도 쓸 만한 건 없었다.
기껏해야 돌격 소총이나 저격 소총으로, 내가 쓸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스크린에 나온 설명을 보는 가운데, 마커스도 비슷한 생각인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쉽지 않겠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꼼꼼한 작전 계획이나 스케줄과 별개로 어려운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면 모르겠는데, 중국이었으니까.
우릴 다독이듯 론의 목소리가 깔렸다.
- 그래서 자네들이 이곳에 있는 걸세 가장 어렵고, 또한 중요한 임무니…….
그 말에 쓴웃음이 나고 말았다.
맞춤 전신 방탄복 실전 테스트가 코앞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왠지 선물치고는 존나 비싸더니… 홍콩을 보내 줄려고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