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71화 (171/185)

171화

가데나 공군기지(Kadena Air Base)에서 일주일을 넘게 보낸 뒤, 드디어 미국행 여객기에 올랐다.

개럿 워든이라는 새 신분증과 함께.

여객기 좌석에 앉아서 새로운 이름을 다시금 보는데, 옆 자리에서 레이첼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이 신경 쓰여서 그래요?”

“아, 예. 개럿 워든이라는 게 좀… 아시안 같진 않잖아요?”

차라리 다른 한국계 이민자나 일본계로 하는 게 어떨까 싶을 무렵.

레이첼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건 입국용에 불과해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입국용이요?”

“네, 따로 설명한 것도 없었잖아요?”

들었던 설명이라고는 입국할 때 필요한 신분이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바로 비행기에 올랐고.

이에 레이첼을 보자,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신분은 작전이나 상황에 맞게 주어지고, 중요하거나 어려운 작전일수록 구체적인 설명이 붙죠. 그런 면에서 개럿 워든은 앞으로 쓰이지 않을 거예요. 쓰여서도 안 되죠. 그 이름으로 생활하게 되면, 계속해서 추적이 가능하니까요. 우리는 추적받지 않아야 하니, 중간에 신분이 몇 번은 더 바뀔 가능성이 커요. 아니면 아예 신분이 필요 없을 만큼 엄격한 관리를 받을 수도 있구요.”

“그… 엄격한 관리는 뭡니까?”

미처 생각지 못한 단어에 되묻자, 레이첼이 싱긋 웃었다.

“가데나 공군기지에서의 생활과 비슷할 거예요. 거기서는 마트에 가다 테러를 받을 일이 없으니까요. 잠을 잘 때도 바깥에서 초병과 카메라가 지키고 있기도 하구요.”

“아…….”

나도 모르게 수긍했다.

가데나 공군기지에는 내가 필수로 이용하는 헬스장과 수영장, 사격장은 물론이고, 축구장과 야구장 같은 체육 시설부터 피자헛, 던킨도넛, 슈퍼마켓, 유치원, 학교까지 없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한 곳.

물론 그렇다고 시설이 다 좋은 건 아니었지만, 사는 데 불편한 건 없었다.

그야말로 웬만한 마을과 맞먹었으니까.

문제는 가정이 있는 호세나 마커스가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것인데, 그것도 함께 살면 해결될 것이었다.

미군 기지는 대개 군 가족들도 함께 사는 곳이었으니까.

“그럼 다 같이 군 기지 같은 데서 살 수도 있겠네요,”

“아마도요.”

과연 그녀의 대답대로 이뤄졌다.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가 아닌, 미 본토 버지니아 주에 있는, 웬 철조망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따지자면 군사기지는 아니었지만,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외부인 출입 제한에 대한 표지판이 서 있고, 정문 초소와 수하를 위한 라이트, 초병까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여기로 들어가는 겁니까? 아니, 내 가족은요?! 가족을 보게 해 준다면서요?”

미니버스 창밖을 내다보던 호세가 당황한 듯 말했다.

마커스도 인상이 구겨지긴 마찬가지.

그러자 곧장 제이크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스를 멈춰야 되겠나?”

“아, 그게… 미안합니다, 팀장. 내가 너무 흥분했습니다.”

앞쪽 의자에 앉아 있던 제이크가 고개만 돌려 쳐다보는 가운데, 호세가 주춤하며 사과했다.

“…스트레스가 좀 컸던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좀 자제하겠습니다.”

그 말에 분위기가 다시금 내려앉는데, 어느새 앞을 본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트라우마 회복 센터라도 가 봐, 아니면 내가 위에 건의하겠어.”

“상담은 이미 받고 있는데…….”

“그걸로 되겠나?”

“…휴가 기간에 방문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제이크가 짧게 답하며 넘어갔는데, 속에서 한숨이 올라왔다.

이 상황이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트라우마 센터를 언급한 둘의 대화에서, 내가 미처 놓쳤던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신적으로 지치거나 힘들었을 텐데… 그걸 놓치고 있었네…….’

돌아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야 강철 멘탈이 있으니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멀쩡하게 싸우지만, 이들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었다.

물론 인간 중에서, 그것도 군인 중에서 손꼽는 강자들이지만, 이들에게는 강철 멘탈 같은 특성이 없었다.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 내고, 훈련받은 대로 움직이기 위해 애썼을 것이었다.

누군가가 죽고 죽어 가는 상황 속에서도.

아마 그 과정에서 정신력이 조금씩 소모됐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깎여 나가서 어딘가는 날카로울 터.

안 그래도 이전에 호세가 겪고 있는 상황을 대강 들어 본 적도 있어서 더 쉽게 납득이 됐다.

‘그럼 레이첼도 그렇고, 마커스도 힘이 들 텐데…….’

괴물로 꼽히는 제이크나 이미 나사가 빠진 것 같은 해리는 염려가 덜했으나, 그들도 아예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람인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러다 어느 날, 입안에 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기는 이가 나올지도 몰랐다.

과장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매일 붙어 있는 해리나 다른 동료들로부터 주변인들이 겪는 안 좋은 일화를 꽤 많이 들어 봤었다.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부터 PTSD가 악화되어 사고가 되는 일까지.

‘조직을 재정비한다니까, 정신과 치료도 지원받는 걸 추가하면…….’

나름 속으로 생각을 정리할 무렵.

어느새 차량이 멈췄다.

저번에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빌라들이 나열된 골목 앞이었다.

이를 보던 호세가 언제 짜증을 냈었냐는 듯 태연하게 물었다.

“근데 이건 뭡니까? 군용 막사는 아닌 것 같은데, CIA가 쓰던 건물입니까?”

“빈 공관이라더군.”

“공관이요?”

“그래, 마침 설명할 사람이 오는군.”

그 말처럼 기다렸다는 듯 공관 안에서 정장 차림의 사람이 나왔다.

이어서는 패용할 신분증과 현관문 키 따위를 나눠 줬는데, 갖가지 규칙 같은 것만 나열하고서는 도로에 세워 둔 차를 타고 떠났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할 말만 기계처럼 뱉은 모습이었는데, 불평불만을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새 건물에서 나온 사람들 때문이었다.

“오오오……! 내 귀여운 강아지들!”

마커스가 놀라 소리쳤고, 뒤이어 호세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갔다.

두 사람의 가족들이었다.

아내와 아이들, 그들이 머물던 빌라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이크가 그들을 잠깐 바라보다가 남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다들 짐 풀고 푹 쉬어.”

“집합은 따로 없습니까? 저희 신분증이나 팀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게 있어서 묻자, 제이크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너도 우선 푹 쉬어. 자잘한 상처나 근육통까지 회복되진 않았을 거 아냐?”

작전하면서 조금 긁히고 멍들었던 흔적들이 있었다.

당연히 다 낫진 않았었다.

가데나 공군기지에 머문 게 1주일 정도밖에 안 됐고, 그사이에도 헬스며 운동을 꾸준히 한 탓이었다.

“예, 그렇긴 한데…….”

“신경 쓰이면 따라와, 나머지는 푹 쉬고.”

제이크가 그러면서 손을 들려던 해리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따라온다고 하지 마, 가서 씻고 쉬어. 여기서 멀쩡한 건 리밖에 없어.”

“하지만 저도 가고 싶은…….”

해리가 날 따라오겠다는 듯 강아지처럼 낑낑대자, 제이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니면 내가 몇 시간 정도 푹 자게 만들어 주지.”

그 말에 레이첼이 짧게 웃으며 떠났고, 해리도 결국 반 걸음 물러났다.

“…아닙니다. 알아서 푹 쉬겠습니다.”

그렇게 다른 두 사람마저 다 떠난 뒤, 제이크가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붙였다.

“신경 쓰는 게 많아 보이는군, 리.”

“예,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지시라도 받았나?”

“설마요. 전 우리 팀, 그중에서도 팀장을 가장 믿습니다.”

“그런 것과 별개야. 네게 특별 지시가 있었다면, 나는 그걸 도와줄 생각이야. 이미 네 가치는 조직을 넘어섰어. 다른 명령을 받기에 충분하지.”

“진짜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내 신분이나 대외협력국이 싹 다 바뀌는 게 좀 걱정이 돼서 그래요. 제가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잖습니까?”

“그래서 더 놀라워. 집요함이 놀라울 정도라… 개인적인 악연도 없는데 말이야.”

“에이, 핵미사일에도 연루된 놈이잖습니까? 그걸 어떻게 가만둬요?”

“역시… 또 들어도 대단해. 사격술만이 아니라, 사명감과 정의감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훌륭하단 말이지.”

“아니, 그런 말 들으려는 게 아니고…….”

칭찬을 대충 넘기면서 물었다.

“위에서 들은 얘기는 전혀 없습니까? 대외협력국이 어떻게 될지…….”

“네 의견을 중요하게 볼 것 같더군.”

“저 말입니까?”

“그래, 미 정부에서 신경 쓰는 건 우리 조직이나 내가 아니라, 너니까.”

“아…….”

“조직 개편이 이상하게 되진 않을 거야, 아니면 네가 발을 빼면 돼.”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을 봤다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렇다고 나한테 조직을 좌지우지할 권리를 줄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관련된 의견은 충분히 청취할 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제이크의 말이 덧붙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운동이나 하러 가지.”

“예?”

“장거리 비행 때문에 하루치 날렸잖나? 그리고 찌뿌둥하기도 하고, 시차 적응할 필요도 있으니까, 가서 땀 좀 흘려야 하지 않겠어?”

“아… 하하하, 그럽시다.”

그래서 피곤해 보이는 해리를 돌려보냈구나 생각할 무렵, 제이크의 말이 덧붙었다.

“루틴이 어떻게 되지? 난 하체 할 생각인데.”

“아, 저도 하체 하겠습니다.”

그렇게 미국에 돌아온 첫날, 제이크와 함께 헬스장으로 직행했다.

* * *

어느덧 10월 말.

예정된 휴가 기간이 다 끝나가고,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어올 무렵에서야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제이크가 언질했던 우리 위치와 역할의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일종의 통보와 같았다.

그 전에 이미 몇 번이나 실무자들과 연락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위에서 사인하고, 아래서 각종 업무를 마치고 알려 주기 위해 연락해 온 것이었다.

참가 인원은 나를 포함한 우리 팀 6명 전원 그리고 대외협력국 국장인 로버트, G&G Corp에 간부로 있었던 론에 이어 국무부 실무진과 장관까지.

그중 로버트와 론은 스크린의 분할 화면으로 마주한 채 대화를 나눴다.

물론 안부를 묻는 말은 짧았다.

현장 출신이 대부분인 회의답게, 바로 용건부터 나왔다.

- 우선… 여러분들의 우려는 모두 인지한 만큼, 조직이 재구성되나 팀의 형태나 임무는 전과 비슷하게 유지할 예정입니다. 오히려 상향될 겁니다. 국무차관이 아닌, 여기 함께 계신 국무부 장관님 아래 직속으로 배정될 거고, 그만한 지원도 받게 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작전 중 사망할 경우에는 용병으로 죽는 게 아니라, 국무부 흑색 요원으로서 사망 연금이 나온다는 뜻이죠.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특히 가정이 있는 호세나 마커스에게는 더더욱 좋은 얘기였고.

이어지는 내용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 팀 체제는 말했듯이 유지될 겁니다. 제이크는 팀장, 마커스는 부팀장 그리고 나머지는 팀원이고, 필요시에는 다른 팀과 함께 협업하거나 새로 조직하여 움직이게 될 겁니다. 임무는 전에 하던 그대로 이어서 하게 될 거고…….

“혹시 외교안보국과는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마커스가 국무부에 있는 무력 조직을 입에 담자, 로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 우린 별도의 조직입니다. 그런 만큼 작전 때마다 필요한 팀을 이루게 될 거고, 지금은 TF(Task Force) 242에 편성되었습니다.

TF 242는 라레플의 기존 시나리오에는 전혀 없어서 염두에 두지도 못했던 얘기였다.

물론 나쁘진 않았다.

뭔가 바뀐다는 게 걱정되긴 했으나, 대외협력국에서 하던 일만 그대로 이어한다면 그만이었다.

내 목표는 조직 유지가 아니라, 피칼을 잡는 거였으니까.

그사이,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TF242에 편성됐다는 건, 곧 작전에 투입된다는 뜻입니까?”

그 말에 스크린을 바라보자, 로버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준비 중에 있고, 곧 장비와 작전 정보를 전달할 겁니다.

제이크의 물음에 답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를 보고 하는 말이라는 걸 곧 알아차렸다.

- 괜찮습니까, 미스터 리?

로버트의 말 뒤로 모두가 날 바라보는 가운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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