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며칠 뒤, 저녁 무렵의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Kadena Air Base).
“정말 좆같군. 일이 다 끝난 데다가 집에 간다고 연락까지 했는데, 아이들을 보러 갈 수 없다니…….”
호세가 캔 맥주를 들이켜면서 중얼거렸다.
제이크가 말했던 대기하라는 명령이 벌써 며칠이나 지속됐고, 추가 지시가 안 내려온 탓이었다.
더구나 기지 외곽의 울타리 바깥은 물론이고, 영내의 일부 구역까지 출입이 제한되어 일종의 감금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목적은 일반 병사와의 접촉을 줄인다는 건데, 누구라도 반길 리 만무했다.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제한된 셈이니까.
이에 적당히 위로할 말도 없어서 고개만 주억거리자, 맞은편의 마커스가 날 보며 피식 웃었다.
“애써 공감하지 않아도 돼. 넌 듣자 하니 휴가하고 다를 게 없다던데?”
“아… 하하하, 그렇긴 한데…….”
웃으면서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다들 불편한 상황이었으나, 나는 마커스의 말마따나 휴가하고 다를 게 없던 탓이었다.
물론 시설이 군용이라서 그다지 좋지 못하고, 이용 시간에 제한이 있을 뿐, 헬스장과 수영장, 사격장까지 사용할 수 있어서 아쉬운 게 없었다.
굳이 꼽자면, 휴가 때마다 방문한 UFC 출신 코치와 MMA 체육관이 없다는 사실만 좀 걸렸을 뿐.
그래도 쓸 만한 매트와 샌드백이 있어서 그것도 넘어갈 만했다.
어쨌든 배운 건 써먹을 수 있고, 날 쫓아다니는 해리가 스파링 상대를 해 준 덕분에 몸도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세가 맥주를 들이켜고서는 불그스레해진 얼굴로 날 쳐다봤다.
“왠지 안색이 존나게 좋더니… 혹시 식사도 입에 맞나?”
“어, 먹을 만하던데.”
“씨발, 내가 가본 기지 중에서 가장 맛없는 곳인데… 이게 맛있다고?”
“괜찮던데? 네가 좀 까다로운 편이지.”
“무슨 소리야? 난 보통이지. 마커스도 같은 의견일걸? 안 그래?”
그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마커스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도 쳐다보자, 금세 답이 돌아왔다.
“호세의 의견에 한 표 던지지.”
“거봐, 네가 대단한 거야. 해리, 네 생각은 어때?”
마커스의 옆에 있던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은 늘 대단하죠, 식성도 마찬가지고요.”
“팀장은? 팀장도 잘 먹잖아.”
내가 제이크를 걸고 넘어지자, 호세가 손을 내저었다.
“오, 아니지. 그는 괴물이야. 음, 불곰이 낫겠군. 그래, 불곰이 음식을 가리는 거 봤어?”
코디악이었던가, 알래스카에 사는 곰 종류가 떠오르는 사이에 호세가 말을 이었다.
“곰은 모든 걸 먹어야 해. 팀장도 마찬가지지. 300파운드(약 136킬로그램)의 거구, 그것도 근육질로 이뤄진 몸을 유지하는데, 음식을 가리는 게 말이 되나?”
“…어? 아니, 팀장 몸무게가 300파운드나 돼?”
구체적인 숫자에 주춤하며 묻자, 옆에 있던 마커스가 말을 달았다.
“한창 때는 320파운드(약 145㎏)가 넘곤 했었어. 그의 몸무게로 종종 내기를 한 적도 있어서 기억이 나는군.”
“와…….”
괜히 곰에 비유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무렵.
“마침 모여 있었군.”
당사자인 제이크가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 보이는 핸드폰을 쥔 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건 무슨 말이야?”
한국말에 마커스가 반응하기에 알려 주자, 그가 씨익 웃었다.
“우리식 관용어도 있긴 하지만, 그게 팀장과 잘 어울리는군. 호랑이라…….”
그사이, 제이크가 전화를 해서 레이첼까지 불러냈다.
한마디로 다 모인 셈.
어느새 맥주를 비워 낸 호세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안 그래도 갈 데가 없는데, 간만에 집합이라도 시키지 그랬습니까? 그럼 덜 심심했을 텐데.”
“하려던 참이었어.”
“네?! 혹시 위에서 지시라도 내려왔습니까?”
호세가 주춤하며 물었고, 제이크가 다가오는 이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레이첼도 오는군.”
“제발 좋은 소식 전해 주십쇼. 이러다가 현역 때도 안 갔던 트라우마 회복 센터에 갈지 모릅니다.”
호세가 울상까지 짓고, 레이첼까지 뛰어온 직후.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현상금 건이 해결됐다더군.”
“오! 진짭니까?! 어떻게 해결된 겁니까? 바시카날, 그 개자식이 한 게 맞았던 겁니까?”
“그래, 노트북이며, 핸드폰이며… 조사를 꽤 한 모양이야.”
“휴, 잘됐군요. 그럼 내일 바로 출발할 수 있는 겁니까?”
호세가 기쁜 감정을 담아 물었고, 다른 팀원들도 반기는 얼굴로 바라볼 때였다.
“입국은 확정되지 않았어.”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현상금 건이 해결될 때까지 대기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일이 생겼어.”
그와 동시에 호세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설마 또 임무가 내려온 겁니까?! 8주 꽉 채웠는데, 어딜… 저 안 갑니다. 아니, 못 갑니다!”
그걸 가만히 보던 제이크가 나직하게 답했다.
“우선 닥치고 들어, 호세.”
“…음, 죄송합니다.”
“현상금 게시글만 내려갔을 뿐, 우리 신분은 모두 노출됐다고 했어. 직업과 이름 같은 정보는 굵직한 범죄자들이 봐 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
“…제기랄, 완전 좆됐네.”
어느새 마커스까지 중얼대듯 말을 흘리는 사이,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모든 걸 재조정하고, 새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
“조정이라면… 저번에 받은 가짜 신분 말입니까?”
“아마도 그렇게 될 거야.”
“그럼 내 가족은 어떻게 됩니까?”
“가족에게도 비슷한 조치가 취해질 거야. 이미 주소지가 노출된 집에는 경비 인력이 배치됐어.”
생각보다 큰 변화에 나도 주춤했다.
동료들에게 경비가 배치되는 건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가장 중요한 게 떠올라서 물었다.
“그럼 우리 팀은… 대외협력국은 어떻게 됩니까?”
상황이 여러모로 바뀌긴 했으나, 라레플 스토리상 피칼을 쫓는 유일한 팀이 대외협력국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거에 팀을 바꾼다거나 조정한다는 제안도 거절했었다.
유지하길 바랐었다.
혹여 뭔가가 바뀌면 추적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물론 지금은 안 바뀐 게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이야기가 틀어진 상황이어서 우려가 덜했으나, 다행히 만족할 답이 돌아왔다.
“그건 미국에 들어온 이후에 다시 논의한다더군, 아마 우리 의견을 들을 모양이야.”
“아… 알겠습니다.”
내 대답 뒤로 이번에는 마커스가 입을 열었다.
“팀장? 그럼 휴가는 어떻게 됩니까?”
그도 호세 못지않게 휴가 일수를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제이크가 간단하게 답했다.
“휴가는 늘어나게 될 거야, 조정할 게 많으니까.”
“음, 다행이군요.”
호세가 불안을 던 듯 새 캔 맥주를 땄고, 어느새 해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기 밖으로 나갈 순 있습니까? 바닷가를 구경만 하다 보니까 좀 아쉬워서 말이죠. 날씨도 아직 여름이라고 할 만큼 덥고, 또 일본까지 왔으니까…….”
“…….”
뜬금없는 소리에 쳐다보자, 호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 전에 네가 그랬나? 나사가 빠졌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았어. 하나보다는 두 개 정도 빠진 것 같지만…….”
“네? 철조망 앞이 바다고, 저쪽으로는 해변도 있으니까 당연히…….”
해리가 변명처럼 내뱉는 말에 제이크가 점을 찍었다.
“안 돼.”
“알겠습니다, 팀장.”
해리의 대답 뒤로 레이첼이 목소리를 냈다.
“마침 아침 뉴스가 나왔네요.”
“…미국이요?”
오키나와는 해가 떨어진 지 오래된 늦은 저녁이고, 반면에 미국은 출근 시간대라 물어본 것이었다.
레이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팀장도 그래서 전화받으러 다녀왔을 거예요. 맞죠?”
“그래, 아침 회의하고 연락했더군.”
제이크가 답하고, 레이첼이 스마트폰을 들어 소리를 키웠다.
어느새 앵커의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임 국방부 장관 내정자 토머스 그랜든에 대한 것이었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바람에 상원에서 통과되어야 인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고, 과거 이력을 읊어 대고 있었다.
그사이, 제이크의 음성이 묵직하게 깔렸다.
“…아는 사람이군.”
“어? 누군데요?”
“스페셜포스로 근무할 때 파견 지휘를 받았었어. 델타로 올라갔을 때도 그렇고.”
“오… 팀장이랑 연이 있을 줄이야…….”
이 역시 시나리오에는 전혀 없던, 또 다른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이었다.
물론 지안드로나 해리도 마찬가지지만, 제이크와 얽힌 고위급 인사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장관이라는 높은 위치 때문에 걸리적거리기 시작하면 크게 방해가 되고, 제대로 도와주면 큰 힘이 되는 탓이었다.
‘전임만큼만 해도 나쁘진 않은데… 어떻게 하려나…….’
그러나 고민은 길게 하지 않았다.
세르게이와 지안드로가 모두 끝장나서 피칼에게 영향이 가듯, 나한테도 변화가 생겼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뭐가 바뀌었든, 나는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게 내가 살 길이었다.
* * *
같은 시각, 중국 모처.
방에 홀로 있던 노먼 존스는 오늘 새롭게 받은 서류철을 훑어보고 있었다.
미 국방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자료였는데, 그 안에는 당사자의 단순 이력만이 아니라, 관계된 인물들의 정보까지 나열되어 있었다.
각종 사건과 언행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고, 이를 보던 노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구체적인 자료를 어떻게 빼오지……?’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미국의 정보를 전달하던 월터 그레이슨이 죽었는데도, 아직 정보통이 남아 있는 듯 각종 서류를 가져오고 있었다.
그것도 질이 떨어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를 보던 노먼이 새삼 감탄했다.
‘대단하군…….’
단순히 정보를 가져와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정보를 가져오는, 사람을 포섭하는 방법이 다양한데, 피칼은 그 모든 것에 해당되는 능력자였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돈부터 사상적인 이데올로기, 분위기로 사람을 휘어잡는 설득 그리고 에고까지.
모두 피칼이 건들 수 있는 분야였다.
직접 대면하고서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마주한 것만으로도 웬만한 고위 정치인은 접근도 못 할 아우라를 품고 있는 데다가, 목소리나 행동마저 사람을 선동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미소까지 머금은 노먼이 피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국의 영광은 보기 좋은, 이면에 이끼가 낀 조악한 기념품과 다르지 않네. 이제 진열장의 유리문을 열고, 뒷면을 가릴 수 있게 잘 전시해야 될 때가 된 게지.’
핵심을 비유로 녹여 만든 말로 노먼 역시 동의하는 얘기였다.
잘 감춰 왔던 미국의 결함은 드러나고 있었다.
백악관과 펜타곤을 오갔던 노먼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바꿔야만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그걸 할 수 있는 이가 있었고, 그가 바로 피칼이었다.
노먼은 감사하게도 그를 도울 수 있었고.
그에게 주어진 로비스트라는 역할과 테러리스트로서.
‘…미국을 내 손으로 터뜨릴 수 있겠구나.’
노먼이 각오를 다졌다.
월터 그레이슨이 원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일을 그가 계승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