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당연하게도 칼빈슨호에서는 별일이 없었다.
웬만한 중소 국가와 맞먹는, 떠다니는 군대인 만큼 안전 하나만큼은 확실히 보장된 덕분이었다.
심지어 내부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아서 프락치 걱정도 없었다.
그렇게 베트남을 떠나 남중국해와 대만을 지나는 이틀 내내 휴식만 취했었다.
공적인 일은 보고서 몇 장 작성한 게 전부였고, 그 외에는 개인적인 운동과 해상 사격 따위만 했었다.
그 와중에도 해병 레이더 연대나 저격수 같은 이들과 친해질 무렵.
때맞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바시카날의 추가 수술이 잘 끝났고, 막 의식까지 되찾았다고 하네요.”
레이첼이 기다렸다는 듯 내게 알려 준 말이었다.
“후, 이제 진짜 살았네.”
한숨과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강철 멘탈 덕분에 전투 당시의 흥분감 같은 건 거의 없었는데, 돌아와서 살핀 지안드로의 상태가 생각보다 나쁜 탓이었다.
최초 수술을 8시간 가까이 했고, 중간에 잠깐 휴식했다가 추가 수술을 두 번이나 더 들어갔었다.
그사이에 나도 태연하게 지내려 했으나, 아예 무신경하게 지낼 순 없었다.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다.
멀쩡한 줄 알았던 지안드로가 수술대나 병상에서 골로 가는 건, 고려한 적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지금 추가 수술을 마친 그가 살아났고, 의식까지 되찾은 것이었다.
“이제 마음이 좀 놓여요?”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별말 안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눈치가 빠른 편이잖아요.”
“아… 흐흐, 하여튼 잘됐네요. 다행입니다.”
레이첼의 말에 나도 웃으며 답하자, 그녀가 가볍게 턱짓했다.
“그럼 이제 편한 마음으로 가요.”
“그래요, 갑시다.”
목적지는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가데나 공군 기지(Kadena Air Base).
느린 속도의, 그것도 항공모함으로 미국까지 갈 순 없으니, 중간에 기함해서 항공기로 갈아타고 가려는 것이었다.
그게 일반 공항이 아닌, 해외 주둔 미군 기지일 뿐.
이에 짐을 챙겨 나왔고, 항공모함에 올 때와 같이 다시금 헬기에 올랐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왔을 때와는 달랐다.
무장은 비슷했지마는,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에 별 긴장이나 부담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전투에 들어가면 강철 멘탈 덕분에 싹 사라지곤 하지만, 지금은 임무보다는 레저 스포츠를 즐기는 것만 같았다.
두두두두두두두두―
평소 듣던 어마어마한 헬기 로터 소리도 리듬처럼 귀에 감길 무렵.
어느새 헬기가 칼빈슨호를 떠났다.
동시에 창 너머로 섬 한복판에 위치한 가데나 공군 기지가 보였다.
동시에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이것도 장난 아니네…….”
한국에서 봤던, 넓다고 생각했던 미군 기지보다 규모가 더 커 보였다.
동시에 날 지켜보고 있던 것인지, 웃음 소리와 함께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푸흐, 한국어 감탄인가요?
“아, 예. 생각도 못 한 것까지 크길래…….”
- 저도 몇 곳을 가 보긴 했지만, 가데나는 해외에 있는 주둔 기지 중에서도 가장 커요.
“아, 그건 몰랐네요, 용산이나 오산은 가 본 적이 있긴 한데…….”
- 그곳도 가 본 적이 있어요.
“그래요? 언제요?”
- 몇 년 전인데, 그건 아직 기밀이에요. 일 때문에 갔었거든요.
“나 때문에 간 건 아니죠?”
- 네, 아쉽게도 그렇진 않아요. 다른 일이었어요.
레이첼이 웃으며 답하는 사이.
옆에서 호세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 아주 보기 좋은걸, 헬기 관광하러 온 커플 같아. 비행기도 그렇고, 요새 자주 나란히 앉던데… 둘이 혹시 사귀기로 했어?
동시에 마커스와 해리, 제이크까지 나와 레이첼을 쳐다봤다.
“아니.”
- 아직은.
레이첼이 말을 덧붙이면서, 호세가 감탄을 터뜨렸다.
- 오! 조만간 좋은 소식 기대할게. 그래도 되겠지? 리?
듣기 나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레이첼도 충분히 예뻤고, 또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다만, 갈수록 제대로 된 연애가 힘들어지는 바람에 관심을 덜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최근에만 해도 전 세계에 수배가 내려져서 가짜 신분까지 받은 판이었으니까.
그렇게 잡담을 좀 나누는 사이, 어느새 헬기 속력이 줄어들었고, 창 너머로 가데나 공군 기지가 확 가까워졌다.
동시에 조종사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 착륙하겠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편안한 본토 귀환을 기원하며,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특히 미스터 리.
“하하, 뭘… 저야말로 편안한 헬기 조종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서로 인사까지 주고받은 뒤.
헬기가 완전히 착륙했고, 헬기 바람을 맞아 가면서 내렸다.
마중 나온 이들과 인사를 나눴고, 소파가 있는 휴게실로 안내됐으며, 한 시간 뒤에 이륙할 비행기의 시간을 고지받았다.
이에 저마다 커피를 타 마시거나 기대어 앉아 쉴 무렵.
덜컹.
문이 열리면서, 전화 통화로 자리를 비웠던 제이크가 등장했다.
그리고 대뜸 우리를 보며 말했다.
“리모컨 있나? TV 좀 켜 봐.”
“TV요?”
영문을 몰라 묻자, 그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그래, 뉴스에 이번 사건이 나온다더군.”
“……?!”
화들짝 놀라자, 해리가 달려가서 손으로 TV를 켰다.
동시에 까맣던 화면에 불이 들어오면서, 상시 틀어져 있던 뉴스 채널이 송출됐다.
백악관 긴급 브리핑이라는 소식과 함께.
“염병할, 진짜네…….”
한국 욕이 절로 나왔다.
TV 화면에 지안드로의 이름과 성은 물론이고, 사진까지 나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국제 테러리스트로서 미군 기밀을 빼내려 내부자와 접촉했고, 그 내부자를 중국으로 넘겼으며, 이틀 전에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생포되었다고.
이를 넋놓고 보는 사이, 옆에서 감탄이 들렸다.
“와, 이거 뉴스로 나올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해리가 중얼거렸고, 그 뒤로 레이첼의 목소리가 덧붙었다.
“이게 최선의 선택 같네요.”
“최선?”
“상황 수습이 아니라, 여론까지 움직이니까요.”
내 물음에 레이첼이 답했는데, 그 의도를 금방 알아챘다.
어느새 이어진 베트남과 중국 국경이라는 말, 거기다가 기밀 유출자의 중국 밀입국 따위로 포커스가 맞춰진 탓이었다.
그 뒤에 벌어질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반공(反共), 반중(反中) 시위.
전미에 은근히 깔린 부정적인 감정에 불을 지피게 될 것이었다.
베트남 같은 나라는 바로 입을 다물터.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TV에 집중하는 사이, 레이첼이 제이크를 보며 물었다.
“팀장, 통화하면서 들은 얘기 더 없어요?”
“있어.”
“뭐예요?”
“현상금 수배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미군 기지에서 대기하라고 하더군.”
“……?!”
주춤하며 그를 바라보자, 제이크가 말을 덧붙였다.
“추후 지시는 따로 내려올 거야.”
“아니, 잠깐만요. 그럼 집에 바로 못 가고 여기 있어야 합니까? 방금 전에는 비행기가 한 시간 뒤에 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호세가 놀란 듯 물었고, 제이크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뜨지 않을 거야.”
“그럼 못 간다고요? 얼마나 여기 있어야 되는 겁니까?”
“현상금 건이 해결될 때까지.”
“집으로 돌아간다고 연락도 다 해 뒀는데 이런 식으로… 아니, 그거 누가 결정한 겁니까? 저하고 통화 연결시켜 주십쇼. 내가 그 빌어먹을 인간과 단판을…….”
호세가 말에 감정을 담는 사이, 레이첼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금방 해결될 거예요, 호세. 현상금 수배 역시 바시카날이 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의 장비를 확인하고, 취조도 시작한다고 했으니까, 머지않아 정리될 거예요.”
“젠장, 그럼 휴가라도 더 받아야 돼. 팀장! 이렇게 된 김에 휴가는 더 받아 줄 수 있죠? 예?! 8주 꽉 채워서 애들을 못 봤다고요, 이해하죠?!”
억울하다는 듯한 말끝에 담담한 답이 돌아왔다.
“다른 일이 없다면, 그렇게 해 주지.”
“다른 일… 무슨 소립니까? 설마 다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호세의 말에 제이크가 가볍게 답했다.
“상황이 변하고 있어, 호세.”
이어진 턱 짓이 속보를 보도 중인 TV로 향했다.
[…국방부 장관 사임 표명.]
동시에 국방부 장관의 증명사진 같은 게 뉴스 화면 한쪽에 떠올랐고, 앵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이 기밀 유출의 책임을 지고 그만두겠다고 했다는 것.
눈을 껌뻑이며 다시금 뉴스에 집중하는 가운데, 마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잡하게 흘러가는군.”
“그러게…….”
그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대꾸하고 말았다.
기존의 라레플과 스토리가 달라진 지 오래지만, 너무 생각도 못 한 방향으로 진행됐기 때문이었다.
뉴스 보도에 이은 국방부 장관 사임이라니?
이러다 대외협력국이나 G&G Corp라는 소속도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같은 생각이라도 한 건지, 제이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왔다.
“우리의 위치나 역할에도 변화가 생길 거야.”
* * *
칼빈슨호가 일본 오키나와 연안에 정박한 사이.
CIA 특수작전단 헬리콥터 2대가 일본 본토에서 날아왔고, 칼빈슨호 갑판에 신속하게 착륙했다.
프로펠러가 정지하기 전에 헬리콥터 문이 열렸고, 안에서 CIA 고위 요원인 작전관(Case Officer)을 비롯해, 행정과 현장을 담당하는 요원 여럿이 우르르 쏟아지듯 내렸다.
그들을 맞이한 고위급 장교가 빠르게 목적지로 안내했다.
지안드로가 있는 함내 회복실.
“이쪽입니다.”
영관급 장교가 어느새 철문 앞에 도달해 문을 열자, 감독관이 내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타깃의 소지품은 어디 있습니까?”
“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두십시오. 당신이 안내하면, 우리가 가져오도록 하죠.”
“…네, 이쪽입니다.”
정보 기관 특유의 태도에 장교가 주춤했다가도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위에서 협조하라는 명령이 내려오기도 했으나, 상황이 심각한 것을 그 역시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국내 기밀 유출한 테러리스트의 생포, 국방부 장관의 사임.
온라인에도 관련 소식이 도배되고 있었다.
기자들뿐만 아니라, 이슈를 퍼다 나르는 SNS 유명인들, 거기다 이름 좀 알리고 싶은 정치인들까지 얘기를 확대하고 있었다.
속보가 난 지 반나절 만에 중국과 베트남을 엮어, 반공 시위가 언급되고 있었다.
심지어 공화당 강경파는 전쟁까지 부르짖었고.
그것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각해질 게 분명했다.
영관급 장교로서는 지안드로와 관련된 일은 CIA가 고압적으로 굴어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물품 보관실에 도착한 뒤.
장교가 문을 열었고, 지안드로의 물품과 리스트를 넘겨주었으며, CIA 요원 몇이 선 자리에서 바로 리스트와 물건을 대조하다가 물었다.
“폭약과 독극물 분석도 했다던데, 샘플 채취한 건 어딨습니까?”
“그건 파기한 걸로 압니다만…….”
“그럼 파기했다는 서류까지 모두 가져오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장교가 주춤하며 답했다.
지안드로의 배낭과 보조 가방에서는 폭약이 그리고 목걸이에서는 치명적인 독약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사람 하나를 너끈히 죽이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양.
이어서 요원이 장교에게 또 물었다.
“인계할 사항은 더 없습니까?”
“아, 회복은 안정적으로 진행 중인데… 놈이 말을 하질 않습니다.”
“안 하는 겁니까, 못 하는 겁니까?”
“군의관들 말로는 일부러 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요원이 가볍게 답했다.
“그럼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게 만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