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지안드로의 출혈부터 막기 위해 손상된 부위 위쪽에 지혈대를 채웠다.
걸레짝이 된 오른손, 팔뚝이 터져 나간 왼손 모두.
마찬가지로 절단되거나 박살 난 다리도 지혈해야 했는데, 어느새 달려온 해리가 맡아 준 덕분에 더 시간을 소모하지 않아도 됐다.
더불어 들것에 실을 필요도 없이, 제이크가 지안드로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이었다.
동시에 지안드로의 육성이 들려왔다.
“날 죽여… 날 죽이라고……!”
소리칠 기력이 없는 듯 간신히 내뱉는 소리였다.
그것도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대충 어깨에 걸치듯 들던 제이크가 미간을 구겼다.
“이탈리어군.”
“예, 자신을 죽여 달랍니다.”
“…그래, 이탈리아어도 했었지?”
제이크가 미처 잊고 있었다는 듯 바라보는 사이, 지안드로의 머리가 힘없이 꺾였다.
힘을 주고 있던 팔다리도 같이 축 늘어졌고.
동시에 해리가 서둘러 맥박을 짚었다.
“출혈이 심각해서 의식을 놓은 것 같습니다. 숨이 붙어 있을 때, 빨리 퇴출해야 합니다.”
“그래, 전원 퇴출해!”
제이크가 시체 같은 지안드로를 고쳐 메며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경계 대형으로 퍼져 있던 해병 레이더 연대(Marine Raider Regiment)가 움직였고, 신속하게 레펠을 타고 헬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사전에 합이라도 맞춘 듯 해병 레이더 연대와 우리 팀이 순서에 맞게 오를 무렵.
그제야 달아나서 숨어 있던 베트남군들이 이쪽을 살폈다.
다행히 총구는 겨누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경계하지 않을 순 없기에 마지막까지 주의를 기울였다.
허름한 오두막 같은 초소 안에서 유도식 대전차 미사일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스쿠터 타고 가다가 잡히긴 했으나, 지안드로가 보통 놈은 아니었으니까.
이에 더더욱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살폈으나, 다행히도 우려하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MH-60R 시호크는 금방 자리를 이탈했고, 빠르게 베트남 상공을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최초 출발지인 칼빈슨호(USS Carl Vinson)였다.
베트남 연안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는데, 칼빈슨호의 근처에만 도달해도 더 이상 신경 쓰거나 경계하지 않아도 됐다.
쉽게 말해, 임무 완료와 같았다.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착륙하려는 곳이 핵 항공모함이었고, 각종 방어 시스템으로 무장해서 웬만한 공격은 씨알도 안 먹히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비슷한 규모를 가진 해군을 끌고 내려온다면 모를까?
물론 그것도 두렵진 않았다.
어느새 시야에 들어온 칼빈슨호의 위엄 때문이었다.
“와, 역시 미국…….”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과장 좀 보태서 광화문 교차로를 떼다 놓은 것 같기도 하고, 한강 위의 대교를 뜯어다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역 시절에 입항한 항공모함을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때 내가 본 항공모함은 동맹국의 강력한 무기였다면, 지금은 내 뒷배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습격이나 공격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새삼스러운 감탄을 하는 사이, 헤드셋을 타고 제이크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 방금 베트남 군인들, 넷이 쓰러졌었나?
“예? 예…….”
반사적으로 답하다가 멈칫했다.
테러리스트가 아닌 타국 군을 상대로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위협 사격이 아니라, 아예 맞힌 상황이었다.
베트남 상공에 MH-60이 날아다니는 건 일도 아닌 거라 뒷말이 얼른 붙었다.
“…근데 그거 괜찮겠습니까?”
- 뭐가?
“베트남군, 제가 먼저 쐈습니다. 이쪽으로 조준하길래, 위협 사격도 없이 바로 사살했는데…….”
지안드로를 체포했다는 흥분감에 잊고 있던, 직전의 상황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였다.
- 알아, 나도 쐈어.
제이크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뒤로 레이첼이 내 무릎을 툭 짚으면서, 입을 열었다.
- 무슨 걱정하는지 알지만, 아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예……?”
- 정석적인 방법으로 조용히 협상하거나 이슈를 만들어 덮을 수도 있고… 방법은 많아요.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미국은 더한 일이라도 수습할 거예요. 아마 당신 같은 인재가 벌인 일이라면… 아마 사고 치는 걸 더 바랄지도 몰라요.
“바란다고요?”
-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빚을 지울 수 있으니까요. 당신 역시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고… 물론 이건 조금 위험한 방법이어서 사용하는 건 권유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나도 사고 칠 생각은 없는데…….”
답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에 나온 레이첼의 말은 생각해 보면 충분히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라레플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었다.
게임상에서 벌어졌던 총격전과 폭발 사건을 단순 가스폭발로 보도하는 내용이었지만, 어쨌든 덮는 방향이 다르진 않았다.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 역시도 미국에 도움이 될 테니, 국경에서의 사건도 잘 덮을 가능성이 컸다.
그 생각을 하는데,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어도 걱정하지 마, 뭐든 내가 책임질 테니.
“역시…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 나는 말만 하지 않아.
“당연히 알죠. 어쨌든 고맙습니다만, 팀장한테 피해는 안 갔으면 합니다. 우리 팀이 나 때문에 고생하면, 내가 스트레스받을 거 같거든요.”
제이크다운 말에 답하는데, 옆에서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저라도 책임지겠습니다, 선배님. 그동안 선배님 덕 많이 봤으니까, 이제 제가 나서서…….
“됐어, 타깃 상태나 확인해.”
- 아, 넵!
해리의 말이 길어질까, 가볍게 잘라 냈다.
이어서 해리가 해병 레이더 연대의 의무 담당과 함께 지안드로를 살폈다.
상태는 탑승할 때보다 안 좋아 보였다.
여전히 의식은 없고, 안색은 점점 나빠지는 모습.
그래도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출혈이 많긴 했으나, 조치가 신속했고, 헬기도 속도를 낮추면서 착륙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리게 되면, 칼빈슨호에서 긴급 수술에 들어갈 터.
두두두두두― 쿠웅─
로터 소리와 함께 갑판에 착륙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뒤.
드디어 헬기 문이 열렸다.
아직 꺼지지 않은 헬기 프로펠러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올 무렵, 소음을 뚫고 고함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상자부터!”
우렁창 지시 뒤로 지안드로가 먼저 들려 나갔다.
미리 준비된 이동식 베드와 군의관들이 바쁘게 실어 간 것이었고, 그다음에 우리가 내릴 수 있었다.
동시에 딱 봐도 마중 나온 듯한, 계급장에 별이 박힌 나이 지긋한 군인들이 다가왔다.
뒤에 수행하는 장교들을 거느린 채.
가장 먼저 제이크와 악수하고 얘기를 나눈 장성 한 명이 어느새 내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알려 주지도 않은 이름까지 그의 입에서 나왔다.
“강태 리가 당신이겠군요. 칼빈슨호에 탑승한 것을 환영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든든한 말이었다.
장성이 손을 내밀기에, 단단하게 맞잡으면서 대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 * *
중국 남부 모처.
어두 침침한 방에서 깨어난 노먼 존스가 상체를 들다가 주춤하며 눈을 찌푸렸다.
신체에 힘이 온전히 들어가지 않았고, 두통까지 발생한 탓이었다.
“후우…….”
동시에 흐릿한, 조각난 기억이 떠올랐다.
질문 혹은 대답.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이나 상황은 떠오르지 않았다.
단순한 장면 몇 개가 전부였다.
또한 그때 느꼈던 편안하고 느긋했던, 또한 황홀경을 맛봤던 감정도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노먼이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눈을 감았다.
이는 꿈이나 질병으로 인한 게 아니었다.
물론 확신할 만한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노먼은 작금의 상태가 무엇인지 가볍게 짐작했다.
마약성 약물 투여.
그것도 심문 과정에서 흔히 쓰이는 미다졸람(진정·마취제)과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 환각제) 같은 주사제가 뇌를 절여 놨을 가능성이 높았다.
노먼이 지난 2~3일간 있던 장소도 일종의 취조실이었다.
진행하는 건 조직 입단의 테스트였고.
이 역시도 관련한 설명을 듣진 못했으나, 다른 경우의 수는 없었다.
그가 지안드로와 접촉한 직후에 폭행을 당해 의식을 잃었고, 어느 순간 잡혀 와서 반복된 답변서 작성을 시작했으며, 거짓말 테스트와 심리검사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다가 주사를 맞고, 이제야 막 잠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이어서 방을 돌아보려던 순간.
덜컹.
문이 열렸고, 유럽계 중년 백인 남성이 등장했다.
노먼이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사람.
그러나 누군지 짐작은 됐다.
‘보스를 따르는 사람 중의 하나겠군.’
차려입은 옷이나 서 있는 태도, 자신을 보는 눈빛을 고려한 판단이었고, 이 생각도 틀리지 않았다.
들어온 이가 짧게 자기 소개를 한 덕분이었다.
“보스를 수행하는 집사, 위르겐입니다.”
집사라는 오래된 단어에 노먼이 멈칫했다가 물었다.
“혹시 독일인입니까? 아니면 독일계?”
전형적인 독일식 이름에 반응한 것인지, 위르겐이 고개를 저었다.
“유대인입니다만, 이제부터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보스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노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토록 기다리던 피칼과의 만남이 불쑥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다소 지난하고 복잡한 과정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결과적으로 피칼을 만난다는 사실이었다.
월터 그레이슨을 통해 들었던, 21세기의 진짜 혁명가.
더구나 그는 말뿐만이 아니라, 능력도 갖춘, 제대로 된 사상가라고 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위르겐이 노먼을 안내했다.
짧지 않은 복도를 지났고, 계단을 올랐으며, 중간에 비밀번호 패드를 누르고서 커다란 문 앞에 도달했다.
현대식 건축 양식이 반영된 인테리어였으나, 집사라는 설명이 어울릴 만한 크기였다.
이를 눈여겨볼 무렵, 곧 문이 열렸다.
끼익.
이어서 안으로 발을 내딛던 노먼은 주춤하고 말았다.
피칼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관련한 설명을 미리 들었음에도 마주한 모습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속으로 감탄까지 나왔다.
명품으로 보이는 정장과 단단하고 큼직한 체구, 포마드로 정돈된 흰색의 머리 스타일, 중후한 분위기의 남성형 외모, 깊고 매서운 눈빛까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잘 관리된 60대 대부호도 한 수 접어 줘야 할 만한 모습이었다.
이를 보고 멈칫한 사이, 피칼의 입이 먼저 열렸다.
“반갑군, 피칼일세.”
“…반갑습니다, 노먼 존슨입니다.”
노먼이 답하자, 피칼이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걸 부여잡던 노먼이 다시금 움찔했다.
중후하고 묵직한 목소리부터 손아귀를 타고 전해지는 체온, 적당한 힘까지 모두 신뢰가 갈 만한 이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백악관에서 봤던 수많은 고위직 정치인은 견줄 바가 되지 못했다.
피칼은 그들과 달랐다.
흡사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그리고 이끌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 같았다.
그러자 스쳐 가듯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왕족… 왕족이라고 했었지……?’
그야말로 왕처럼 보였다.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둘렀다면, 당장 왕 행세를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
이를 깨닫는 사이, 피칼이 소파의 빈 자리를 권했다.
“우선 앉지, 할 얘기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