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헬리콥터로 군사 공항까지 이동한 뒤.
총기와 장비를 새로 받았다.
큼직한 HK416 대신에 개조된 MP7을 받았고, 위치 송수신기와 소형 카메라를 몸에 부착했다.
우리가 매달고 다니던 바디캠과는 전혀 다른, 첩보용 물건이었다.
“물건이 다르긴 다르네…….”
여기저기 살피며 중얼거리는 사이.
비행기 옆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관심 있어요?”
레이첼이었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묻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 CIA요?”
“네, 외교관 여권도 그렇고, 장비도 그렇고, 관심을 두는 것 같아서 묻는 거예요.”
“관심이 있긴 한데, 이직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 물건들이라서 봐 두는 거죠, 뭐… 근데 CIA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고정관념 같은 것도 좀 줄어들고…….”
“고정관념이라면, CIA가 오만하고, 까탈스럽고, 예의 없다는 시각을 말하는 건가요?”
“어휴, 뭘 그렇게까지…….”
가볍게 웃음을 섞어 대꾸했으나, 부정하진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특전사에 복무할 때, 가끔 마주친 국정원 요원들이 그랬듯 군인들이 정보 요원을 보는 시각은 대개 비슷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들어맞았다.
편견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반응한 탓이었다.
다만, 볼리비아 산타크루즈에서 만났던 케니스를 포함해서 브라질 상파울루에 있는 CIA 안전 가옥의 요원과 지금 비행기 탑승을 도운 이들은 아주 친절했다.
내 편의를 봐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팀까지 잘 챙겨 줬었다.
특별히 못마땅한 모습도 없었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그건 당신의 고정관념이 아닌 정확한 시각이고, 그 시각도 틀리지 않았어요.”
“예?”
“당신도 그리고 우리도 그들의 작전 대상이 돼서 친절해진 거예요.”
“팀이 전부요?”
“당신이 팀을 아낀다는 걸 알아차린 거겠죠. 그래서 당신을 회유하려면, 팀을 모두 데려와야 한다고 판단했을 거고, 그만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예요.”
“근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팀장이 넘어갈 리가 없는데……?”
“글쎄요, 그렇게 생각해요?”
레이첼의 말에 눈을 껌뻑이기만 했다.
“팀장이 CIA로 넘어갈 수도 있다고요?”
그녀에게 물어보면서 반사적으로 앞자리에 앉은 제이크를 쳐다봤다.
의자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그는 전형적인 미 특수부대 출신의 군인이었다.
CIA 같은 정보기관은 작전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보는 부류.
이직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할 때였다.
“만약 당신이 CIA로 간다면, 그때도 팀장은 가만있을까요?”
“……?”
고개를 저으려다가 멈칫했다.
레이첼이 이런 말을 가볍게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눈치 빠르기로는 손에 꼽히는 인물인만큼, 분명 제이크가 할 일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
입이 벌어지는 사이, 레이첼의 말이 이어졌다.
“해리는 당연히 당신을 따라 어디든 가겠죠, 나도 다르진 않고……. 그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흔들릴 거예요. 아마 조직이 통째로 흡수될 가능성이 커요. CIA 내부에 우리 조직을 대신할 부서를 만들면…….”
“조직까지……?”
“그럼요, 당신의 가치는 이미 우리 조직을 넘어섰어요.”
이어지는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미처 생각지 못한 말이 줄줄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부정하진 못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내 능력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고려하지 못했을 뿐.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CIA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해요.”
“예? 왜요?”
조직의 방대한 크기나 보수적인 임무 체계 따위를 생각하며 물었을 때였다.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그쪽은 우리 조직보다 여직원이… 아니에요, 됐어요.”
“예?”
무슨 말인가 싶어서 대답을 재촉하자, 레이첼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CIA는 너무 커요, 그래서 안 돼요. 이미 괴물 같은 조직이에요.”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CIA는 좋겠죠. 만약 당신까지 거기 들어가게 되면… 더 강력한 괴물이 탄생하게 될 거예요. 아마 당신을 앞세운 킬러 부대를 만들지도 몰라요. 부대가 아니어도, 당신을 킬러로 쓰겠죠. 몇 킬로미터 바깥에서 타깃을 사살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 능력을 테러리스트 잡는 데만 쓰겠어요?”
“그럼 지금 말하는 타깃이…….”
“네, CIA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타깃을 제거하는 거죠. 반미 정권의 인사라든가, CIA를 규제하려는 요인이라든가…….”
“…진짜 그런 게 있어요?”
영화 속 이야기처럼 들려 되묻자, 레이첼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걸 검토는 해 봤을 거예요. 실행의 문제겠죠. 정확히 알려면… CIA 국장이나 대통령 정도는 되어야 할 거예요. 혹은 일을 수행하는 당사자가 되거나.”
“만약 그런 일을 내가 거부하면… 역으로 내가 체포되거나 통제되는 겁니까? 그것도 영화처럼?”
“아니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CIA는 모든 경우의수를 검토하거든요.”
“어후… 그럼 봐서 은퇴하는 게 낫겠네요.”
“…은퇴?”
이번에는 레이첼의 눈이 동그래지기에 짤막하게 답했다.
“나중에요, 나중에. 곧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럴 때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제 서른밖에 안 됐는데 은퇴라는 말이나 하고…….”
“말이 그렇다는 거죠.”
가볍게 답해 줄 무렵.
띵―
알림음과 함께 이륙 준비가 완료됐다고 기내에 전파됐다.
그리고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베트남.
온몸에 전달되는 출력을 느끼는 사이, 어느새 항공기가 이륙했다.
* * *
이튿날, 정오 무렵의 베트남, 까오방(Cao Bằng)시 마을.
후덥지근한 태양이 내리쬐고 소나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지안드로가 조그만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숙소 앞에 자물쇠를 채워 둔 스쿠터를 챙겼다.
자물쇠를 풀었고, 짐을 실어 묶었으며, 옷 위로 파란색이 도는 비닐 우비를 입었다.
이어서 시장에서 샀을 법한 선글라스까지 낀 지안드로가 피식 웃고 말았다.
스쿠터 사이드미러에 비친 모습이 그야말로 빈곤한 배낭 여행객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수배 전단을 뿌려도 몰라볼 몰골이군.’
일종의 변장이었다.
물론 베트남에 들어온 이후로 늘 여행객 차림이었지만, 그렇다고 늘 똑같은 모습을 한 게 아니었다.
계속해서 바꾸고 있었다.
한 번은 부유하고 여유로운 여행가처럼, 다른 때는 단체 관광의 일원처럼 그리고 지금은 홀로 온 배낭 여행객처럼.
이는 지안드로가 추적을 피하는 방식 중의 하나였다.
단순히 위조 여권을 사용하고, 카드 대신 현금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기억할 사람들의 시선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그래서 목격자를 찾아 오더라도, 중간에 헷갈리거나 놓치게끔 만드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늘 그러듯 이틀째 베트남 지방을 돌며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지금은 베트남 북단인 카오방에 와 있었고.
그렇게 스쿠터에 올라서 받침대를 걷어 내려던 무렵이었다.
띠리리리―
돌연 벨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지안드로가 움찔하면서 허리춤을 내려다봤다.
복대처럼 찬 보조 가방 안에 담긴, 가장 무겁고 커다란 위성전화기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어서 지안드로가 서둘러 스쿠터에서 내렸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건물 틈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늦지 않게 보조 가방에서 위성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단 한 사람, 피칼이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집사인 위르겐이 대신 연락하긴 했으나, 원래는 그런 용도로 만든 전화기가 아니었다.
피칼과 연락할 때만 쓸 뿐.
분명 그랬는데, 건물 틈에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은 지안드로가 움찔하고 말았다.
“……?!”
피칼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집사인 위르겐이었다.
- 보스께서 실망하길 바라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지안드로가 힘겹게 대답했다.
저번에 이어서 또 위르겐이 연락했고, 심지어 부정적인 말을 해 댄 탓이었다.
지안드로로서는 마뜩잖을 수밖에 없었다.
신뢰를 잃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곧 위르겐의 목소리가 다시금 넘어왔다.
- 신속히 중국으로 이동하라고 했을 텐데, 무슨 이유로 베트남에 남아 있는 겁니까?
“보스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 보스의 명령은 신속하게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지안드로가 입술을 씹었다.
분명 들은 말이긴 했다. 다만, 지안드로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건 당신의 입을 통해 들은 말일 뿐, 나는 보스가 직접 내린 명령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 그 과업 말이군요, 알고 있습니다.
지안드로의 표정이 더욱 구겨지는 사이, 전화기 너머로 말이 이어졌다.
-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이걸 정말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
지안드로가 쉬이 답하지 못했다.
감정이 상한 게 아니라, 정말 답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벌어질 일이 어떤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고, 그걸 감당할 수 있는지는 전혀 알지도 못했다.
지금도 현상 수배를 수습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특히 현상금과 관련된 연락이 쏟아져서, 전자메일을 분간하는 데 적잖이 고생하고 있었다.
지금도 직전까지 같은 작업을 했었다.
거짓과 진실을 분간하고, 백신 프로그램을 돌려서 악성 프로그램을 잡아냈었고.
베트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그래서 흔적을 지울 겸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에 지안드로가 답하지 못할 때였다.
- 브라질에서는 타깃이 사라졌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알고는 있습니다. 저도 몇 시간 전에 연락을 받았는데… 수색 중이지요. 곧 드러날 겁니다, 전 세계에 수배가 내려졌으니 숨어 있을 수밖에 없겠죠.”
현지 시작으로 하루 전, 나오자마자 총격전이 벌어졌었다.
브라질 군경에서부터 정보가 누출됐고.
지금은 모든 연락을 두절하고 조용히 숨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판단을 했으나, 위르겐의 말은 반복됐다.
- 그 말이 아닙니다. 타깃은 브라질에 없습니다.
“…출국했다는 겁니까?”
지안드로가 주춤하며 물었다.
브라질 내에 꽁꽁 숨은 것과 나라를 뜬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으니까.
- 출국 여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만약 브라질을 떠났다면…….
무슨 말이 이어지나 기다리는 순간.
무거운 말이 와닿았다.
- 위조 여권과 위장한 신분으로 나갔을 거고, 당장 찾아내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미국이 당신을 미처 찾지 못하듯.
“……!”
지안드로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간과하고 있던 말이 들려온 탓이었다.
위조, 위장, 탈출.
돌아보면 간단한 문제였고,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신분을 알고 있고, 이름과 신체 정보까지 파악하고 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가짜로 만들 여력이 있었다.
바로 미국.
이내 지안드로의 이가 빠득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