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이른 오후, 볼리비아 산타크루즈 주(州)의 특급호텔.
예정된 목적지에 다녀온 뒤, 짧은 개인 정비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했다.
헬스장이나 경찰청에 가는 게 아니었다.
원래 하려던 일이 모두 끝났으므로 귀국하기 위해 짐을 싸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1개월간 볼리비아 경찰과 훈련하고 실습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파이프 폭탄 테러 사건이 있어서 중도 취소가 가능했다.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에 추가 위험이 있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같은 정신적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나는 멀쩡했지만, 어쨌든 떠나는 게 나았다.
진짜 용병으로서 일을 하긴 해야 하지만, 내 주목적은 대외협력국과의 계약이었으니까.
그게 아니어도 얼른 추적해서 피칼이든, 뭐든 다 처리해야만 했다.
이에 2인실 호텔 룸 바닥에 주저앉아서 해리와 함께 옷가지를 싸고 있을 때였다.
우우우웅─
핸드폰이 진동했고, 발신자를 보면서 멈칫했다.
팀장 제이크.
개인정비 시간에 별거 아닌 걸로 전화할 리가 없었다.
분명 임무과 관련되었을 터.
전화를 받자마자, 짐작한 말이 들려왔다.
- 내 방으로 집합해.
“작전입니까?”
-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무슨 소린가 되묻는데, 제이크의 말이 간결하게 덧붙었다.
- 해리도 함께 있나?
“네, 옆에 있습니다. 같이 갑니까?”
- 그래, 찰리 전원 모여.
“알겠습니다.”
일단 전화를 끊고, 해리와 함께 움직였다.
아직은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의아해서 가자마자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들어가는 순간에 바로 깨달은 것이었다.
왜 아직은 아니라고 했는지.
“리, 괜찮습니까?”
병원에서 치료를 했다던, 날 감쌌던 필립이 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사 대리 사무소 서기관인 케니스도 한쪽에 서서 내게 눈인사를 건네왔다.
즉, 이쪽 업계 관계자들이 다 모인 셈.
작전일지 모르는, 뭔가가 충분히 생길 만했다.
그런 생각을 잠시 밀어내면서, 필립이 건네오는 손을 맞잡았다.
“전 괜찮습니다, 필립은 좀 어때요?”
“네, 괜찮습니다. 상처도 별로 깊지 않고, 조각 몇 개 빼고 주사 맞은 게 전부입니다.”
“머리는요? 기절했던데…….”
“이런 폭발을 겪은 게 처음이라, 긴장 때문에 의식을 놨을지도 모른다는군요. 다행히 다 멀쩡했습니다.”
“다행입니다, 덕분에 제가 멀쩡하네요. 고맙습니다.”
필립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옆에 있던 호세도 말을 보탰다.
“대단했어요, 정말. 일반 육군 장교면 그렇게까지 움직이기 쉽지 않을 텐데 말이죠. 본토에서 이곳까지 홀로 보낸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주 훌륭했어요. 나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요. 우리의 구심점인 리를 구해 줬으니.”
“아, 그럼 저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제 영웅인 선배님을 구해 주셨으니까, 나중에 좋은 술을 대접하겠습니다.”
해리도 말을 덧붙인 뒤.
우릴 가만히 쳐다보던 마커스가 상황 정리를 하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새 작전입니까?”
그도 집합한 우리 팀과 필립, 케니스를 보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레이첼도 마찬가지.
어느새 진중한 표정으로 제이크를 바라볼 무렵, 케니스가 목소리를 냈다.
“추가적으로 접촉할 만한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
나도 그렇고, 모두가 케니스를 바라볼 무렵.
목소리가 덧붙었다.
“지안드로 바시카날과 과거에 같이 일했던 사람입니다. 브라질의 서부에 위치한 갱단 보스로 과거 바시카날의 여러 정보를 다수 소지한 것을 확인했고, 체포되었던 미겔 알바레즈처럼 지금도 연락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필립에게 반 장난으로 칭찬했던 호세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졌다.
“…이번에는 젠장할 갱단이군. 브라질로 가서 소탕해야 하는 겁니까?”
위험한 작전을 예감한 모양이었다.
나도 그랬다.
여기서는 테러가 터진 영향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긴 했지만, 그런 일이 없는 한 갱단과 전면적인 교전을 벌여야 할 테니까.
규모가 크면 큰 만큼 피해도 많이 발생할 것이었다.
우리든, 적이든.
한데 돌아오는 답에 주춤하고 말았다.
“소탕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접촉입니다.”
“그게 무슨… 정보 요원들처럼 무슨 침투라도 하라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 약속 잡고 바에서 만나기라도 하는…….”
말을 잇던 호세가 주춤하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 잡고 만나기로 했다더군. 지안드로의 정보를 팔아넘기기로 했어.”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지안드로 건, 뭐건 최대한 빨리 쫓아가고,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정말 약속 잡고 만나다니?
놀란 가운데 레이첼의 목소리가 케니스를 향했다.
“함정이나 거짓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요?”
“현재로서는 정보가 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래도 우리를 집합시켰다는 건, 작전을 준비하거나 유사시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아닌가요?”
레이첼의 물음에 그러겠거니 하는데, 케니스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놈은 달러만 조금 원했습니다.”
“그럼 뭐… 각출이라도 해야 되나? 굳이 모인 이유는 뭡니까? 그냥 통보해도 될 텐데.”
레이첼 뒤로 호세가 묻자, 케니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
다시금 주춤하자, 마커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게 함정이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현재로서는 사실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지안드로 바시카날과 사이가 좋지 않고, 볼리비아에서의 일을 다 안다고… 궁금하다고 하더군요. 정확한 표현으로는 인사하고 안면을 터놓고 싶다는데… 유명인과 만나는 걸 즐기는 부류로, 평소 성향이나 행태를 보면 이상한 짓은 아닙니다.”
“아니, 이게…….”
“대신 접촉하는 방법과 장소, 일시 모두 우리 측 의견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외에도 가능한 모든 조건에 협조하기로 했고요.”
“정신 나간 새끼군…….”
호세가 비속어를 읊조리는데,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전이 아닌데도 다 불러 모아야 하고, 제이크가 아직은 아니라고 한 이유도 모두 설명이 됐다.
그리고 시나리오가 이렇게 변하고 흘러간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관련자인 브라질의 갱단 보스가 정보를 털어놓다 못해, 우리를 직접 만나겠다고 하다니?
‘세상에 씨발… 진짜 별일이 다 있구나.’
별말을 못 하고 감탄만 삼킬 무렵.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의하나?”
그 말에 깨어난 듯 바로 답했다.
“아, 네. 해야죠.”
해야만 했다.
볼리비아에 온 이유도 그렇고, 미국으로 빠르게 귀환하려는 목적도 모두 피칼과 관련된 것들이었으니까.
그의 부하인 지안드로를 잡는 거라면 가릴 게 없었다.
죽을 자리만 아니면, 들어가야 했다.
만약에 죽을 수 있는 자리라고 해도, 크게 겁이 나거나 염려되진 않았다.
내가 마주할, 그래서 막아야 할 엔딩은 핵전쟁이었으니까.
* * *
이튿날, 정오 무렵의 베트남 하이퐁시(海防市).
사업가에서 다시금 관광객의 옷차림으로 바뀐 지안드로가 허리춤에 조그만 손가방을 멘 채 길거리 음식을 먹고 있었다.
구경하듯 도로의 차들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곧 초록색으로 된 현지 택시 한 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부르르릉─ 덜컹.
차량 엔진음 뒤로 문짝이 열리고 닫힌 뒤.
눈에 띄는 사람이 내렸다.
큼직한 가방을 맨 20대 후반의 백인 남성.
곧 지안드로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정말 왔군.’
월터 그레이슨이 말했던 그리고 출국 전후로 통화를 마쳤던 노먼 존스였다.
그가 택시에 내렸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를 보는 지안드로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아군이나 다름없는 관계였으나, 그로서는 두 팔 벌려서 환영할 상황이 아닌 탓이었다.
원래는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올 계획도 아니었다.
파키스탄에서 네팔로 이동한 것처럼 차량과 도보를 이용해서 동남아를 경유하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물론 비행기를 지안드로 바시카날이라는 신분으로 탑승한 건 아니었다.
값비싼 위조 여권으로 통과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당장 드러나진 않겠지만, 문제는 그 위조 여권도 수사하다 보면 흔적이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비행기를 탔었다.
이유는 단 하나.
월터가 일을 벌이고, 노먼이 넘어오기 때문이었다.
때를 맞추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반갑습니다, 바시카날.”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 되겠군.”
바시카날이 그를 위아래로 살피며 말하자, 노먼 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눈에 띄어서 그렇군요.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복장은 당신 같은 여행객으로 할까요?”
“그래, 옷은 있나?”
“없습니다. 현지에서 구입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마련해 뒀어, 저기 가서 바로 갈아입고 나와.”
지안드로가 바로 골목 안의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노먼이 움직이려 하자, 그가 붙잡았다.
“그 전에… 보안 수칙은 다 이행했나?”
“그럼요. 설명할까요?”
“해 봐.”
“사용한 핸드폰과 공항 통과에 쓴 위조 여권을 폐기했고, 이동 시에는 현금만 사용하고 카메라에 노출되거나 미행을 피하기 위해 택시 따위를 갈아타거나 중간에 걸어서 현장을 이탈할 것.”
“암기는 잘하는군… 그럼 심부름도 알아서 잘 해냈겠는데, 물건은 어디 있지?”
지안드로가 노먼의 가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내부 자료.
단순 대외비부터 주요 기밀까지 포함된 서류 따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노먼이 바로 얇은 집업 재킷의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옷 안, 피부 위에 밴드로 붙인 큼직한 비닐 팩을 꺼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두께.
“이게 전분가?”
“제 몸을 수색이라도 할 겁니까?”
“…갈아입고 와.”
그렇게 말하고, 골목을 턱짓한 다음.
지안드로는 노먼의 뒷모습 대신에 골목 좌우와 도로를 살폈다.
그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과 다른 예리한 눈초리로.
그리고 곧 골목 입구로 다가갔다.
마치 들어오지 못하게 그리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리듯.
동시에 한차례 비명이 들렸다.
“으윽!”
크지 않은, 귀 기울여야 들릴 정도의 소리였다.
이를 들은 지안드로가 골목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아주 익숙한 그리고 잘 아는 얼굴이 나왔다.
피칼의 집사, 위르겐이었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만 알려진, 보스의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보스는 안녕하십니까?”
지안드로가 안부를 물으면서, 기절한 채로 승합차에 실리는 노먼을 바라봤다.
별일은 아니었다.
노먼에게만 알리지 않았을 뿐, 보스에게 보고되어 사전에 합의된 검증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진행하는 게 정석이지만, 지금처럼 급할 때는 다소 과격하고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사이, 위르겐은 노먼을 싣고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답이지만,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고저 없는 억양 때문이 아니었다.
피칼의 집사인 사람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만큼 일할 사람이 퍽 줄어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안타까워하길 잠시, 지안드로가 멈칫하고 말았다.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과업은 어떻게 됐습니까?”
강태를 죽이라는 피칼의 명령을 말한 것이었다.
지안드로가 주춤하며 답했다.
“아직… 준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