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55화 (155/185)

155화

대서양 상공, 둠스데이 비행기로 알려진 E-4B 나이트워치(Nightwatch) 공중지휘 통제기 내부.

유럽에서의 일정을 마친 미 국방부 장관이 피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직전까지 관련 보고서와 언론에 배포될 국방부 홍보실 보도 안내문 등을 검토하고서 이제야 막 눈을 붙인 상황.

근처의 비서들이 조용히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남은 잔업을 이어 갈 때였다.

띠리리리─

E-4B 내부에 배치된 군용 전화기가 울었다.

동시에 일하던 비서들이 움찔했다.

“……!”

막 잠든 국방부 장관이 깰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 울고 있는 전화기는 E-4B와의 단순 통신 수단으로 배치된 게 아니라, 국방부 장관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핫라인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전화 걸 수 있는 사람은 아주 한정적이었다.

미 대통령부터 관계 부처 및 휘하 군 장차관, 병과장, 사령관들 정도.

그들도 가벼운 용무로 연락하진 않을 것이었다.

이른 새벽, 대서양 항공에 있는 국방부 장관을 급하게 찾을 만큼 중요한 목적일 터.

이에 LCD 액정에 표시된 발신자 번호를 보던 비서가 멈칫했다.

예상보다 더 중요한 번호였기 때문이었다.

국방부 장관을 모시면서 반드시 암기해야 하는 수십 개의 번호 중에서도 중요하기로는 손꼽는 곳 중 하나.

국방부에 소속된 정보기관, NSA(National Security Agency: 국가안보국)였다.

비서가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장관님!”

서유럽 순방과 장거리 비행으로 인해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던 국방부 장관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깨어났다.

그리고 정신을 못 차리고 마른세수를 할 무렵.

비서가 얼른 말을 이었다.

“NSA의 전화입니다.”

“……!”

화들짝 놀란 국방부 장관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 전달된 탓이었다.

내부자의 군 기밀 유출과 도주.

이어서 들려온 이름에 국방부 장관이 멈칫했다.

“월터 그레이슨?”

- 네, 전 정무차관 예하 유럽 사무국장이었고, 현 해양 환경 문제 담당입니다.

좌천된 직책을 듣자, 국방부 장관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일전에 대외협력국 국장, 로버트 엔더슨이 스위스까지 가서 직접 감사를 실시했던 인물.

그러나 혐의가 명백하지 않아서, 단순 좌천으로 끝난 사람이었다.

한데, 갑자기 그 월터의 이름이 언급된 상황.

국방부 장관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그가 뭘 하려는 겁니까? 자세히 말해 보세요.”

- 과거 유럽 사무국장 재임 시절에 취득한 군사정보를 러시아 측 브로커에게 판매하려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확인된 자료들은 기밀 등급이 높은, 현재까지 유효한 것들입니까?”

어느새 잠에서 완전히 깬, 긴장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리고 무겁고도 빠른 답이 돌아왔다.

- 일부 폐기되거나 변경된 것도 있습니다만, 아직 유효한 사실도 있습니다. 즉시 대처해야 합니다. 유럽 내 미군 기지와 관련된 정보들을 다수 갖고 있는 것으로 예측됩니다.

“오, 이런…….”

국방부 장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지금 유럽 방문을 마치고, 막 대서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NATO 사무총장과 미군 유럽 사령관, 각국 국방부 장관들을 대면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길 잠시.

국방부 장관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즉시 조치하지요. 그자는 어디 있습니까? 아직 본토를 빠져나가진 못했겠지요?”

- 파악 중에 있습니다만, 현재 취득한 단서에 따르면 중남미를 거쳐 러시아로 입국하려는 계획으로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비서실 통해 현재까지의 보고서 올리도록 하세요.”

통화를 종료한 그가 E-4B 내부의 비서실 직원들을 모두 소집했다.

자고 있거나 깨어 있던 이들이 모두 모였고, 국방부 장관은 서둘러 해야 할 일들을 알렸다.

월터의 정보 수집, 관계 부처 연락, 출국 금지 조치, 수배, 백악관 보고까지.

“당장 움직이세요.”

몇 개 없는 위성 전화기가 직원들의 손에서 작동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노트북을 통해 전자메일이 발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가 보고를 받던 국방부 장관이 멈칫했다.

월터에 대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었다.

정확히는 범죄와 관련되거나 관련됐을 만한 자료가 전무했다.

평범한 일대기만 실려 있는 것이었다.

감사와 관련된 내용들도 평이하기는 마찬가지.

이에 부실한 내용을 탓하려던 그의 뇌리에 이름 하나가 스쳐 갔다.

‘아……!’

대외협력국 국장 로버트 엔더슨.

강태와 관련된 일로 만났던 그리고 월터의 의혹 제기와 감사를 보조했던 인물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는 게 있을 터.

‘그래, 그 사람부터 떠올렸어야 했는데…….’

생각 끝에 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단순한 자책 같은 게 아니었다.

아직 정확하게 알아낸 것은 없으나, 이번 일로 국방부 장관도 책임을 져야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만약 월터와 관련된 군 관계자가 있다면,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게 될 터.

그게 아니어도 군 기밀이 유출되었다는 점에서, 미군의 수장으로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특히 야당에서 논란을 만들어 낼 게 분명했다.

대통령도 부담을 느낄 것이고.

거기다 저번 타릴 제도의 작전 내용도 썩 좋지 못해서 안 그래도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의 마음도 사임으로 크게 기울고 말았다.

‘이번 사태만 마무리한 뒤에 사임을 준비해야 되겠군. 대통령께서 먼저 자르지 않는다면…….’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그의 손에 곧 전화기가 들렸다.

비서가 지시를 받아 대외협력국장 로버트와 전화를 연결해 둔 것이었다.

국방부 장관이 바로 목소리를 냈다.

“엔더슨 국장.”

- 네, 장관님.

“NSA나 휘하 부처에서 연락받았습니까?”

- 국무부 통해서 그레이슨과 관련된 자료가 펜타곤으로 전달됐다는 건 들었습니다.

“그럼 상황은 알고 있습니까?”

- 네, 안 그래도 전화를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내게 말입니까?”

국방부 장관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금세 답이 넘어왔다.

- 현재 우리 쪽 요원이 그레이슨을 추적 중입니다.

“…추적?”

- 네, 감사 이후로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

그 소리에 국방부 장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음도 급하게 덧붙었다.

“그레이슨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소립니까?”

- 네, 알고 있습니다만, 관련 정보는 상부에 보고한 뒤에 공유 가능한지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국방부 장관의 입이 벌어졌다.

생각도 못 했었다.

미적지근한 감사 결과만 받아 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반년 넘게 여태까지 감시해 왔기 때문이었다.

벌어진 그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하… 어떻게, 아니 알고 있던 겁니까?”

- 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감사를 말하는 거군요.”

- 그렇습니다. 고문해서라도 밝혀냈어야 했는데…….

로버트라는 사람이 새삼 다시 보일 무렵.

말이 추가로 덧붙었다.

- 다만, 개인적으로 걸리는 게 좀 있습니다.

“아, 그래요. 말해 보십시오.”

국방부 장관의 허락에 로버트가 고민하듯 얘기를 이어갔다.

- 해양 환경 담당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난 그가 굳이, 왜, 지금 이런 짓을 했는지 그걸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닌, 왜 펜타곤을 움직이게 했는지.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그 말은…….”

- 네, 일부러 증거를 흘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NSA에 발각되면 시간 차만 있을 뿐, 결국 잡히게 될 텐데… 그 말은 일부러 잡힌다는 소리 아닙니까?”

- 그렇습니다. 기습적인 감사에서도 예상한 중대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몇 년간 잠잠하기도 했지요. 본토에 직접 테러하거나 테러를 도왔다면 모를까… 이렇게 갑자기 움직일 사람이 아닙니다. 노출된 정보들이 모두 거짓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저희 감시를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되면 더 심각해지는군요. 내가 모르는 일이 더 있다는 뜻이니… 관련 내용을 받아 볼 수 있겠습니까?”

-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이라서 협조 안내문이나 보고서를 드리긴 어렵습니다. 그레이슨의 추적 역시 국무부에서 주도하고 있고…….

“음, 그럼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요. 곧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복잡한 표정을 한 채로 국방부 장관이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수확은 있었다.

월터 그레이슨을 국무부 산하 기구에서 추적하고 있었고, 지금도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성과는 확실했다.

미 안보에 큰 위협은 사라진 셈이었으니까.

다만, 걸리는 건 있었다.

로버트의 말처럼 월터가 왜 갑자기 움직였는지, 그걸 알아봐야만 했다.

힘든 한직 생활을 걷어차고서 정보를 팔아 러시아로 건너가 살 목적인지, 아니면 일부러 펜타곤을 흔들려고 정보를 내버린 것인지.

후자라고 해도 왜 그랬는지 목적을 가늠하긴 어려웠다.

이내 국방부 장관이 다시 비서를 불러 새 지시를 내렸다.

NSA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해당 활동으로 소홀해질 분야가 어디인지 등등.

할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 * *

늦은 밤, 볼리비아 산타크루즈 영사 대리 사무소.

안드레이에게 얻어맞고 기절했던 그리고 제이크의 한 손에 질질 끌려왔던 미겔이 깨어나자마자 관련 정보를 알아서 다 털어놨다.

내심 우려한 고문이나 약물 사용은 전혀 없었다.

취조도 별로 이뤄지질 않았다.

감추려는 기색도 없이 지안드로와 관련된 정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털어놓은 덕분이었다.

우리가 SSE를 하면서 수집해 온 핸드폰 따위를 직접 골라 가리키면서, 어떤 것으로 언제 통화했는지도 알려 줬었다.

교차 확인 하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느라 시간이 좀 걸릴 뿐.

중요한 건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지안드로의 부하.

그가 중요했다.

미겔이 간접적인 것들을 제공한다면, 그는 직접적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가 입을 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약물이나 폭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이미 미겔에게 맞아서 거의 반병신이 됐기 때문이었다.

해리가 소독과 지혈, 봉합 따위를 한참이나 해야 했는데, 결과도 썩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병원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왜? 심각해?”

“장기 파열이나 내출혈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발성 골절이 있어서… 아마 몸속 어디에 이미 피가 고였을지도 모릅니다. 생명에 지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병원 설비를 이용해서 촬영해 봐야 합니다.”

“아… 마커스, 팀장한테 말해 줘. 내가 해리와 같이 갈게. 필립도 어떤지 봐야겠고…….”

함께 있던 부팀장인 마커스에게 말하자, 그가 바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냐, 내가 해리와 갈게. 넌 폭탄 테러 위협도 받았으니.”

거기에 호세가 말을 보탰다.

“나도 가겠어. 군경 협조와 카르텔까지 눈감아 주면… 볼리비아의 밤길이라도 안전하겠지. 그리고 너는 내일도 선두에서 고생해야 하잖아? 괜히 무리하지 마.”

“아… 그래, 알았어.”

호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동틀 무렵에 연이어서 바로 가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안드로가 과거에 머물렀던 거처와 그의 부하가 거주했던 장소.

둘 다 입국 때부터 원래 가려던 목적지였다.

볼리비아 경찰과 실습한다는 표면적인 목적으로 들이치려던 곳이었는데, 그걸 내일 가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카르텔이 묵인하고, 경찰이 길 안내를 할 예정이었다.

시간 역시 기존에 계획한 1개월에서 1주일로 줄어들어서 크게 단축되었고.

결과가 좋아 보이지만, 과정은 그렇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폭탄 테러로 날 감싸려던 필립이 다쳤고, 브라보 팀원이 치명상을 입은 데다가, 팀장이 즉사한 탓이었다.

비록 그들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듣고 가볍게 넘길 사안은 아니었다.

어쨌든 볼리비아에서만큼은 서로 믿고 등을 맡겨야 하는 전우였으니까.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이가 갈렸다.

‘지안드로… 씨발 거, 얼른 만나자.’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조만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직감이 그랬다.

사진으로만 본 지안드로를 곧 실물로 마주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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