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타깃이 나온다, 전원 대기해.
헤드셋을 타고 제이크의 음성이 전파되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침투할 때처럼 고도로 집중하고 경계하듯.
투항이 아직 완전하게 진행되지 않아서, 상황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상대가 정규전을 벌이는 군 지휘관이 아닌 탓이었다.
다름 아닌 지역 카르텔의 고위 간부.
여기서 근무했다던 케니스의 말에 따르면, 마약 카르텔은 그 누구보다 신뢰하기 힘든 그리고 조심해야 하는 존재라고 했었다.
살아남는 데 특화된 바퀴벌레 같은 족속이고, 그중에서도 미겔은 가장 약삭빠르다고.
그 말을 떠올리며 총구를 겨누는 사이, 문이 열리면서 미겔이 등장했다.
별장 침투 전에 확인했던 PDA의 사진과 똑같은 모습으로, 별다른 특이 사항 없이 터벅터벅 걸어 나온 것이었다.
비어 있는 양손을 들어 보인 채로.
“쏘지 마시오, 무기는 없소.”
그 말이 들리는 순간.
와락, 알파 팀이 그대로 달려들어 럭비 태클하듯 그를 덮쳤다.
퍽! 쿵!
부딪히고 넘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 뒤, 몇몇이 건물을 경계하는 사이에 케이블 포박이 끝났다.
인상을 찌푸린 미겔이 무릎을 꿇은 채 구시렁거리다가 제이크를 보고 움찔했다.
“…당신이 이들의 보스겠군, 맞소?”
“이름.”
“알고 오신 거 아니었소?”
“이름.”
제이크가 무시하고 턱짓하자, 미겔이 헛기침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미겔 알바레즈요.”
그리고 제이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미겔이 급히 말을 이었다.
“잠깐… 뭐든 좋으니, 일단 이거 먼저 확실하게 합시다.”
“말해 봐.”
“산타크루즈 경찰서 말고 딴 데로 갑시다.”
“이유는?”
“그것도 알고 있는…….”
미겔이 얘기를 잇다가 제이크의 매서운 시선에 주춤하며 말을 바꿨다.
“거긴 보스들의 끄나풀들이 널렸소.”
“그래서?”
“지금 들어간다면 내일 해 뜨기 전에 목에 밧줄이 감긴 채 죽어 있을 거요. 아니면 싸구려 잭나이프에 여기저기 찔리고 베여서 과다 출혈이나 쇼크로 죽을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코카인 남용으로 심장이 멈출 거요.”
“어울리는 결말이군.”
제이크가 무덤덤하게 되묻자, 미겔이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말이긴 하지만… 쓸데없는 협박은 그만둡시다.”
“뭐?”
이번에는 제이크 대신 옆에 있던 안드레이가 끼어들었다.
눈알을 부라리고 인상을 구기면서.
그걸 보면서 미겔이 멈칫했으나, 여유로운 태도로 대꾸했다.
“어차피 당신들이 원하는 건 지안드로 아닙니까? 이번 일도 분명 그놈과 관계있는…….”
그가 말을 잇던 찰나.
“이 씨발 새끼가 어딜 기어올라?!”
안드레이가 욕설과 함께 발을 내질렀다.
끈을 꽉 맨 군용 워커로.
뻐걱!
미겔의 턱에 안드레이의 발차기가 적중했다.
목뼈가 부러지는 것처럼 휙 돌았고, 동시에 몸뚱이가 그대로 쓰러졌다.
철퍼덕―
그가 쓰러지고 의도치 않게 적막이 깔리는 사이.
해리가 다가와서 호흡을 확인했다.
“…호흡은 있습니다.”
이어서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안드레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조용하니까 한결 낫지 않나?”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말처럼 조용해서 좋다는 게 아니라, 안 그래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겔의 말투가 매를 부르는 듯이 들렸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되지도 않는 허세를 더 부렸다면, 안드레이가 아니라 제이크에게 맞았을 테니까.
그랬다면 가뿐한 기절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었다.
어딘가가 부러졌을 터.
그사이, 케니스가 목소리를 냈다.
“일단 영사 대리 사무소로 데려가겠습니다. 경찰서로 가면, 그의 말처럼 해코지를 당할 테니…….”
“사후 수습은 가능합니까?”
“웬만한 건 가능합니다. 이미 카르텔 내부에서도 손을 뗐고, 그게 아니어도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웬만한 취조나 심문을 해도 좋다는 말로 들렸다.
더 나아가면 고문에 가까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케니스의 말로 봐서는 그것도 커버 될 것처럼 보였다.
그냥 외교관이 아니라, CIA 요원이기도 했으니까.
제이크도 그걸 아는지, 별다른 내용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속하게 내부 SSE 진행하고 현장 마무리합시다.”
그 끝에 내가 선두에서 움직였다.
상관인 미겔이 항복했다고는 하지만, 부하들은 혹시 모르니까.
내가 나서서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움직이겠습니다.”
* * *
네팔, 수도 카트만두(Kathmandu) 외곽 소규모 호텔.
현금으로 결제를 마친 지안드로가 배정받은 방의 도감청 여부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커다란 백팩은 진작부터 바닥에 내려놨었고.
“후…….”
잔뜩 지친 기색의 그가 한숨을 흘렸다.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서 출발해 인도를 거쳐 네팔로 넘어오는, 장장 2,400㎞에 달하는 여정을 이제야 막 끝낸 탓이었다.
그것도 비행기나 기차 따위만 타고 편히 온 게 아니었다.
차량이나 오토바이, 거기다 도보를 이용해서 비포장 길을 한참이나 이동했었다.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다.
아니면 흔적이 드러나고, 추격한다면 금세 꼬리가 잡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금은 평소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타릴 제도에서의 작전이 완전하게 실패하고, 그가 있었던 볼리비아에 미국의 온갖 기관들이 접근한 상황.
아마 오래지 않아 뒤를 밟힐 것이었다.
남미에서 파키스탄,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그리고 인도에서 네팔로.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지안드로가 잡힐 만한 가능성은 없었다.
아무 계획 없이 그저 흔적을 지우려고 열심히 도망만 다닌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따로 계획이 있었다.
동남아를 거쳐 중국으로 입국하고, 중국에서 직접 핵 개발 연구자를 데려오는 것.
정확히는 홍콩을 거쳐서 다시 동남아를 경유하여 빠져나올 예정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세르게이가 일궈 놨던 핵 개발 연구소.
그곳까지 쫓아오는 건 불가능했다.
돌아다닌 국가를 수색하다가 뒤처질 거고, 설령 쫓아온다고 해도 중국에 들어온 이후로는 추격이 불가능해질 테니까.
그렇게 쉬면서도 큰 그림을 그릴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의 선불 폰 중 하나가 진동했다.
“…….”
동시에 지안드로의 인상이 굳어 갔다.
모르는 번호가 표시되기도 했으나, 선불 폰은 그가 먼저 전화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여태 전화가 걸려 온 적도 없었다.
핸드폰을 켜 두는 시각이 딱 정해져 있는 데다가, 이 번호를 아는 사람도 이 세상에 몇 명 없기 때문이었다.
보스인 피칼과 그를 따르는 인물들.
그중 한 명이 전화를 걸었다는 건데, 그들이 연락해 왔어도 문제였다.
아마 뭔가 잘못됐을 가능성이 컸다.
각종 장치를 설치하고 보안 처리를 해도 선불 폰은 특수 처리 된 위성 전화와 달리 보안에 취약했으니까.
그래서 지안드로 역시 선불 폰은 필요할 때만 켜 두었고, 통화한 이후에는 폐기하곤 했었다.
당연히 저 전화도 받아선 안 되지만, 무시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진행했던 일들이 실패한 만큼, 관련된 연락이 올 거라고 예상한 탓이었다.
그렇게 전화를 귀에 댄 순간.
다행히 그가 잘 아는 암호가 들려왔고, 역시나 아는 목소리가 건너왔다.
- 이곳은 늦은 저녁인데, 거긴 어떻습니까?
지안드로가 짐을 던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어쩐 일입니까? 그것도 이 번호로 연락하다니…….”
지안드로가 정중하게 우려를 털어놨다.
그가 예상했듯 피칼을 따르는 요인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월터 그레이슨.
갑작스러운 비정기 감사를 받고 한직으로 물러났으나, 여전히 고위직 공무원으로 활동 중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감시가 소홀해지면서, 다시금 정보 전달 등의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나 예전만큼은 못 했다.
발각될 가능성이 큰, 도감청의 우려가 있는 이 번호로 연락해서도 안 됐다.
월터 역시 감시가 풀린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일뿐, 비공식적인 감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지안드로의 얼굴이 굳는 사이, 월터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 내 사람이 발각됐습니다.
“뭐라고요?”
- 노먼 존스, 국방부로 파견된 백악관 정무 담당 스태프로…….
“잠깐, 잠깐. 그건 누굽니까?”
갑작스러운 소리에 지안드로가 움찔하며 물었다.
그도 모르는 이름이었으니까.
이에 인상을 쓰며 묻자, 차분한 설명이 돌아왔다.
- 날 대신할 인재입니다. 해외에 체류하던 시절에 내 밑에서 수학했던 영특한 제자였고, 지금은 전도유망한 백악관의 스태프죠. 비정기 감사 이후로 내가 칩거할 때는 그를 움직여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 냈었지요.
“미치겠군. 보스가 아는 사실입니까?”
- 압니다만, 다는 아닙니다.
“그게 무슨……?
- 최근의 일은 미처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었어요. 했다면 보스와의 연락까지 들켰을지 모릅니다. 지금 국방부에서 이중, 삼중으로 감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기랄……!”
지안드로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월터가 독단으로 뭘 하든 상관없는데, 그게 보스인 피칼로 연결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머리를 굴린 지안드로가 목소리를 냈다.
“그레이슨, 당신은?”
-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늦어진다면……. 나 역시 수사 선상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전에는 탈 없이 비켜 가지 않았습니까?”
- 그때는 단순 의혹만 갖고 비정기 감사를 했고… 지금은 다릅니다. 핵미사일이 언급되는 데다가, 군 기밀이 유출됐다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 감사도 이미 꽤 진행된 상태입니다.
“아, 하필…….”
지안드로가 탄식을 흘렸다.
그도 파키스탄의 일 처리가 문제 되는 바람에 2,400㎞를 힘겹게 이동했었다.
이제야 숙소를 잡고 쉬는 상황.
한데, 그 상황에서 월터가 나쁜 소식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리고 곧 지안드로의 눈이 찌푸려지듯 감기더니,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이어지는 말이 더더욱 암담한 탓이었다.
- 이 사실도 알아내자마자 간신히 전화한 겁니다. 보스에게 할 순 없잖습니까? 당신과의 전화는 몰라도…….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언성을 높이려던 지안드로가 가까스로 말을 멈췄다.
감정을 통제한 것이었다.
지금 더 화내 봐야 좋을 게 전혀 없었다. 우선 최대한 빨리 전화를 끝내야 했다.
선불 폰이 추적당한다면 지금 즈음 구체적인 위치가 표시됐을 테니까.
거기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미국 요원이 이를 확인하고 비밀 안전 가옥 따위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변수가 심각한 탓이었다.
특히 월터의 전화.
이건 지안드로가 전혀 계산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판단을 마친 지안드로가 본론을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목적이 뭡니까?”
- 노먼을 보내겠습니다. 그를 활용해 주십시오. 그는 충분히 그리고 마땅히 보스의 대업을 위해 일할 겁니다.
“당신이 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는 검증도 해야 할 겁니다.”
- 아니, 나보다는 그가 낫습니다. 내가 검증도 마쳤지요. 무엇보다 그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국방부 장관과 동석하는 스태프의 자리에 오른 영특한 인재입니다. 백악관에서도 인정받은 수재지요. 나보다는 그가 보스에게 보탬이 될 겁니다.
“그럼 당신은?”
- 노먼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 겁니다. 둘 다 빠져나가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국경도 못 넘을 겁니다. 내게 감시가 붙었을 테니…….
지안드로가 그 말에 갖은 수를 계산하는 사이, 월터의 말이 덧붙었다.
- 그를 꼭 데려가야 합니다, 정말 쓸모 있는 인재입니다.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든 젊은이죠. 그리고…….
잠깐 말을 끌던 월터가 무겁게 목소리를 이었다.
- 우리 둘 다 잃게 되면, 보스를 따르는 사람이 얼마 없지 않겠습니까?
“…제기랄.”
지안드로가 욕설을 씹었다.
위험 부담이 커서 둘 다 포기하고 싶은데, 말마따나 두 사람 없이 피칼의 일을 하기에는 벅찼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더 있어야 했다.
물론 피칼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여럿 있다고는 해도, 전부 뛰어난 인재는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건 제 역할을 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내, 결정을 내린 지안드로가 답했다.
“중국의 광저우로 보내세요. 내가 그를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