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나하고 같이 갑시다.”
어느새 무장하고 내려온 론 마이어스의 목소리였다.
현장을 비롯해 행정 총괄까지 맡은, 나이 지긋한 그가 돌격 소총의 노리쇠를 당겼다 놓자, 케니스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마이어스 총괄은 여기 계시는 게 낫습니다. 유사시에는 저 대신 볼리비아 영사나 본토와 연락할 분이 필요합니다.”
“그건 내 역할도, 임무도 아니오.”
론이 케니스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책임을 지고, 권리를 행하는 게 내 일이오.”
“하지만 현시점에서 제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만한 분은 마이어스 총괄만이…….”
“우리 대원 1명이 사망했고, 2명이 중상을, 4명이 경상을 입었소. 그리고 지금은 현지 경찰과 갱단의 유착이 의심되는 상황이지. 이럴 때 내가 할 일은 당신을 대신해서 중계기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총괄로서 내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오.”
그러면서 함께 무장한 행정 직원을 보며 말했다.
“유사시에는 자네가 우리 회사만이 아니라, 볼리비아 영사와 미 본토에도 연락하게.”
“아, 알겠습니다!”
주춤하면서도 힘 있는 대답이 나오자, 론이 케니스에게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이만하면 된 거 아니겠소?”
“…….”
켸니스가 대답 대신에 고개만 끄덕이자, 론이 걸음을 디디며 목소리를 냈다.
“그럼 같이 갑시다.”
“…알겠습니다.”
케니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은 논리나 설득으로도 꺾기 어려운 탓이었다.
결국 함께 나가야만 하는 상황.
유사시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케니스의 속은 달랐다.
‘일이 불편하게 됐어…….’
애초에 케니스가 죽거나 납치될, 최악의 상황은 벌어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볼리비아 경찰이 감히 미합중국의 외교관을 상대로 허튼짓을 할 수 없을뿐더러, 그게 아니더라도 케니스는 연줄이 많아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라 그랬다.
그와 관련된 산타크루즈 유력가가 여럿 있을 정도.
공식적으로 영사 대리 사무소의 서기관이면서, 동시에 볼리비아 산타크루즈에 파견된 CIA 잠입 요원으로서의 권한과 능력을 여러 군데서 사용한 결과였다.
그래서 경찰과 산타크루즈 카르텔의 유착을 의심해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미 내부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게 다였다.
얼마나 깊게 그리고 복잡하게 얽혔는지는 지난 18개월 동안 꾸준하게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케니스는 외지인일 뿐, 한패는 아닌 탓이었다.
그래서 파이프 폭탄 테러도 유착을 의심하고 있을 뿐,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 직접 알아내기 위해 움직이려던 차였다.
그 상황에서 론이 나온 것이었고.
이윽고 호텔 밖으로 나온 그가 케니스를 향해 나직하게 말을 붙였다.
“긴장한 꼴을 보니, 저자들도 이 사태에서 자유롭진 못한 모양이오.”
“네,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케니스가 답하고, 론이 전방을 바라봤다.
호텔 진입로에 접근한 경찰차들 사이로, 베이지 컬러의 경찰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허겁지겁 뛰어온 탓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기도 전에, 경찰의 입에서 남미식 스페인어가 튀어나왔다.
“케니스 영!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너무 놀랐습니다, 폭탄 테러라니……!”
“그건 내가 할 말입니다, 부청장.”
“아, 아니…….”
차갑고도 무뚝뚝한 말에 부청장이라 불린 배 나온 중년 사내가 움찔하자, 케니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구급차는 왔습니까?”
“다, 당연히 왔지요. 다친 사람이 다해서 몇 명이나 됩니까?”
“그 전에 확답이 필요합니다.”
“어떤……?”
“부상자에 대한 확실한 신변 보호.”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이 상황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옵니까?”
“…이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보고받은 건 분명…….”
부청장이 말을 잇다가 주춤하면서 론을 바라봤고, 동시에 케니스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꺼내도 되겠냐는 뜻.
그 표정을 론이 매섭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우우우웅─
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옆에 서 있던 케니스가 연한 진동음에 고개를 돌리자, 론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전화 좀 확인하겠습니다.”
“편하신 대로.”
케니스가 통화를 권하면서도 론이 꺼내 드는 핸드폰의 화면을 슬쩍 건너봤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가 표기된 상황.
케니스의 시선이 빠르게 론의 얼굴을 살피듯 바라봤고, 론도 케니스처럼 모르는 번호를 살펴보다가 통화를 수락했다.
왠지 현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그의 짐작대로였다.
“여보세요.”
- 제720특수전술전대(720th Special Tactics Group) 남미 TF 지휘관 더스틴 로페즈입니다. 산타크루즈 현지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를 확인했고, 연락장교와의 연락 두절로 인해 귀하와 직접 통신할 예정입니다. 필요시 타격대가 탑승한 헬기가 3분 안에 이륙할 예정이며 즉각적인 출동이 필요하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 주십시오. 9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그것도 알지 못했던 정보가 쏟아져 나왔는데도 론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보고 있습니까?”
- 고고도 정찰기로 동시 확인 중입니다만, 귀하가 건물 내로 들어갈 경우 확인이 어렵습니다.
“그럼 아직 괜찮습니다. 옆에 영사 대리 사무소의 케니스 영 서기관이 함께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다른 필요한 사항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 그럼 저희 측 연락 장교는 생존했습니까?
“처치가 필요합니다만, 생명에 이상은 없습니다. 더 궁금한 게 있습니까?”
- 없습니다.
“그럼 필요시에 이 번호로 연락하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뚝.
칼같은 대답 뒤로 전화가 끊어진 뒤.
론이 귀에서 핸드폰을 떼자마자, 케니스가 바로 물었다.
“…어디와 연락하신 겁니까?”
그러면서 케니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론의 입에서 나온 보고 있냐는 말 때문이었는데, 거의 동시에 산타크루즈 경찰청 부청장도 얼른 두리번거렸다.
론이 그 두 사람을 보다가 짧게 답했다.
“미군입니다.”
“미군에서 무슨 얘기를…….”
케니스가 눈매를 좁히며 묻는 사이, 미군이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부청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 무슨 말입니까? 미군이라니?! 설마 미군이 여길 온다는 겁니까?”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부청장이 화들짝 놀라 남미식 스페인어를 쏟아 냈다.
동시에 론 역시 스페인어로 대답했다.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합시다. 구급차 이송과 안전 확보. 가능한 거 맞습니까?”
“아… 그렇죠. 부청장의 확답이 필요합니다.”
두 미국인의 시선에 부청장이 멈칫하면서도 얼른 소리쳤다.
“무, 물론입니다! 제가 가장 믿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철통같이 지키겠습니다.”
“그럼 부상자부터 이송합시다.”
론이 말과 함께 호텔 쪽을 향해 손짓해 보였다.
안전하다는 신호.
부청장도 눈치껏 지시했고, 구급대원들이 서둘러 호텔로 뛰어갔다.
그리고 경찰들도 바닥에 쓰러진 시체로 다가갈 무렵.
이번에는 케니스가 말했다.
“시신은 우리 측이 인계하겠습니다. 그들은 미국인을 사망케 한 범인이고, 내게는 신원을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부청장이 다시금 정중하게 대답한 뒤.
케니스가 경호 팀에게 짧게 지시하고서 이내 됐다는 듯 부청장과 론을 바라봤다.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길 한복판에서 할 얘기는 아니니.”
“갑시다.”
론이 답하고, 부청장이 서둘러 길을 냈다.
방향은 케니스의 7인승 SUV.
이미 잘 아는 듯 익숙하게 움직인 부청장이 알아서 문도 열어 주었고, 곧 2열과 3열의 자리를 채웠다.
덜컹.
그렇게 문까지 닫힌 뒤, 적막이 오기도 전에 부청장의 입이 다급하게 열렸다.
“근데 미군은 도대체 무슨 얘기입니까? 미군이 여기에 온다는 겁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그, 그거야 당연히…….”
론의 대답에 부청장이 다시 대꾸하려던 순간.
뒷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 대원이 왜 죽었는지에 관련한 겁니다.”
“…그, 그건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나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이런 테러를 알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보고받았다는 건 뭡니까? 아까 말하려던 거, 그걸 이어서 말해 보시죠.”
“그건…….”
부청장이 움찔하자, 론이 입을 열었다.
“정중하게 대해 주니 우습나?”
“……?!”
갑작스레 달라진 음성에 부청장이 얼어붙었다.
눈만 휘둥그레진 모습.
무겁고도 사납게 론이 말을 이어 갔다.
“말해, 지금부터 한 번이라도 더 눈치를 보면… 네 입에 글록 총구를 쑤셔 넣어 주지.”
“…그냥 말하세요.”
케니스가 중재하듯 얼른 끼어들었다.
상황을 봐서는 론이 정말 입안에 총을 쑤셔 넣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현장에서 직접 뛰지 못할 뿐, 그도 한때는 1티어 엘리트 특수부대인 데브그루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성질도 그렇고, 행동력도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으나, 미 정부와 협력 중인 요원으로 의심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내 겁을 집어먹었던 부청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겔… 모든 건 미겔이 알 겁니다.”
그 소리에 케니스가 눈썹을 휘었다.
“미겔? 혹시 미겔 알바레즈를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이번 일도 놈이 관여했을 겁니다. 저 테러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명 아는 게 있을 겁니다.”
산타크루즈 카르텔에 있는 고위 간부였다.
친인척으로 이뤄진 보스의 혈통들을 제외하고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
당연히 그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케니스가 알 정도로.
“아는 사람입니까?”
론이 묻고, 케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타크루즈 카르텔의 간부 중 한 명입니다.”
“그럼 이유는?”
답을 들은 론이 바로 부청장을 향해 물었고, 곧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 무력시위도 그놈이 계획한 거였고, 우리와 협상도 그놈이 마무리를 지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럼 뭘 한 거요? 우릴 불러 놓고? 호출 역시 놈들이 지시했나?”
“그렇진 않습니다, 예고도 없던 일이라 놀라서…….”
“그럼 우릴 방패 삼아서 버티려던 거였군. 싸우게 된다면 무기로 쓰고, 아니라면 협박용으로 쓰고.”
“아무래도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위험한 놈들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중심가의 치안 확보만 가능한 저희로서는 용병들을 부를 수밖에 없는…….”
잔뜩 움츠러든 말에 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교육도 지지부진했군, 놈들의 눈치를 봐야 했을 테니.”
론의 음성이 무겁고도 담담하게 내려 앉았다.
경찰과 카르텔의 유착을 의심하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치안이 좋지 못한 남미가 주로 그랬으니까.
“당신 역시 책임을 져야 할 거요.”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래서 미겔이란 놈의 정보는?”
론이 날카롭게 묻자, 부청장이 술술 털어 놓았다.
그의 주소지, 연락처, 상황 등등.
함께 듣고 있던 케니스의 표정은 굳고 있었다.
미겔 알바레즈는 단순히 안다고 해서 처리할 수 있는 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카르텔 전부를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최후의 보루인 CIA라는 신분을 밝혀도, 카르텔이 순순히 항복할 가능성은 적었다.
그들의 힘이 세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부청장처럼 자리를 보전하고 승진해야 하는 직업이 아니라, 온갖 불법적인 일을 다 저지르면서도 권력을 누려야 하는 게 카르텔 간부였다.
미국이나 CIA라는 이름으로 협박하더라도 항복을 받아 낼 순 없을 것이었다.
방법이 있다면 단 하나.
론이 말했듯 입안에 총구를 쑤셔 넣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