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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47화 (147/185)

147화

연락장교 역할로 파견 나온 필립 애드먼이 워싱턴으로 전자메일을 전송하고서 한숨을 흘렸다.

이번에 보낸 보고서가 미흡하거나 시간을 초과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안에 적힌 내용이 마뜩잖은 탓이었다.

바로 강태와 영사 대리 사무소 서기관인 케니스 영의 독대.

‘분명 회유를 시도했을 텐데…….’

이를 떠올리던 필립의 인상이 구겨지고 말았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지 못해서 그리고 알아내려 해도 알려 주질 않은 탓이었다.

강태를 떠보려고 했으나, 돌아온 건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나마 힌트가 될 만한 것도 사적이었다는 단어가 전부여서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추론하기도 쉽지 않았다.

‘어쩌면 회유가 아니라, 사전 작업일 수도 있겠어. 리의 취향에 맞는 여자를 준비하거나 돈, 장비…….’

고전적이면서 효과적인 회유 방법들을 떠올릴 무렵.

띠리리리― 띠리리리―

전화가 걸려 왔다.

그의 개인 핸드폰이 아닌, 국방부에서 지급한 업무용 기기가 반응한 것이었다.

필립이 서둘러 통화를 수락했다.

“중위 필립 애드먼입니다,”

- 버지니아입니다.

버지니아는 암호나 코드 같은 게 아니었다.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이 위치한 주(州)를 그대로 말한 것이었다.

즉, 국방부에서 연락했다는 뜻.

그리고 추측할 필요도 없이, 필립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도 잘 알았다.

바쁜 국방부 장관 대신에 연락했던 비서실 직원 중 한 사람.

그러나 답하는 필립이 국방부 장관을 대할 때와 다르게 가볍게 대꾸하진 않았다. 말하는 그의 목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쨌든 이어질 말에는 국방부 장관의 의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어도, 자신의 말을 직원이 전해 줄 터.

성공의 열망을 가진, 흔한 미 육군 장교로서 필립이 보다 정중하게 말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답하고 한차례 숨을 들이마실 무렵.

예상외의 말이 들려왔다.

- 훈련병과 관련되어 즉각적으로 전파할 정보가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

필립의 눈이 번뜩 뜨였다.

훈련병은 강태를 뜻하는 코드였고, 이를 통화로 전파하는 경우는 오늘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전화도 드물었다.

국방부 장관이 볼리비아 도착한 날 갑작스레 격려차 연락하고, 직속상관이 확인차 전화하고, 지금 대화 중인 직원이 추가 질문을 위해 통화를 해 온 게 전부였다.

정보나 지시를 받을 때는 보안 처리된 전자메일을 써야만 했다.

그게 아니어도, 일은 전부 그렇게 이뤄졌었다.

뭘 보내든, 받든.

그것도 주로 전송하는 입장이었지, 수신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볼리비아의 일이 다이나믹하게 진행된 게 아니라, 지지부진하게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보나 지시를 받을 게 없었다.

오늘도 제대로 된 교육은 없었고, 그저 경찰청으로 갔다 오는 출퇴근만 반복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오늘에서야 새로운, 그러나 못마땅한 내용을 작성해서 보낸 것이었다.

한데 그에 대한 답으로 돌아온 게 급해 보이는 연락이었다.

이에 필립이 호흡을 고르는 사이.

핸드폰 너머에서 말이 이어지며 전화로 알려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을 전파했다.

- 이틀 전부터 현지 산타크루즈 카르텔로 보이는 조직원들의 움직임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차량과 오토바이를 이용한 이동이 크게 늘었고, 현지인이 외지인과 접촉하는 경우가 증가했습니다. 구체적인 대화 내용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무장 병력이 증가한 것으로 보아 폭력적 사태가 예측되고 있습니다. 현재 수집한 데이터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는 테러 혹은 폭동 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테, 테러 말입니까?”

힘이 들어갔던 필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경계하는, 특히 미국인이면서, 현역 장교인 필립으로서는 더더욱 경계해야 할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당황한 사이, 핸드폰 너머의 음성이 차분하게 달래듯 물어왔다.

- 관련하여 미리 듣거나 아는 것이 있습니까?

“아, 아니… 없습니다. 보고서에 기록한 게 전부입니다.”

- 그럼 각별히 유의하기를 바랍니다. 현재 추측하기로는 코카인 농장과 관련하여 반미 정서가 깊이 남아 있기 때문에, 훈련병이 소속된 PMC를 향해 테러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

필립은 대꾸하는 대신, 눈만 껌뻑거렸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주일이 지나가는가 싶더니, 코앞에 폭탄이 날아온 탓이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싶은 무렵.

핸드폰 너머의 음성이 계속됐다.

- 오늘 보낸 훈련병의 접촉 과정도 회유가 아니라면, 유사한 정보를 전달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현지 정보원을 통해 더 구체적인 내용을 확보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를 통해 훈련병을 회유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진행 중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

당황했던 필립이 그제야 반응했다.

‘아… 회유 대신에 정보만으로 미끼를 던졌다는, 아주 CIA다운 짓을 벌였다는 말이군…….’

그가 깨닫는 사이, 핸드폰 너머의 음성이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 관련 정보를 훈련병에게 전달하여 활용하기를 바랍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런데… 그 테러는 어떻게 합니까? 현지 상황에 맞게 대처하면 됩니까? 제가 미군 장교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른 물었고, 조금은 도움이 될 말이 돌아왔다.

- 현지 지휘관 지시에 따라 움직이되, 필요시 자의적 판단에 따라 개별 행동 해도 좋습니다. 유사시에는 귀관의 GPS 위치로 파라과이 국경에 대기 중인 미군이 출동할 겁니다. 최대 90분 안에 도착이 가능하니, 안전한 장소에서 대기하면 구조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 또 추가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 정치적 성향과 내통자에 대한 훈련병의 생각입니다.

“…네?”

이번에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전혀 짐작조차 안 가는 질문에 필립이 눈을 껌뻑이자, 단호한 음성이 건너왔다.

- 정치적 성향과 내통자에 대한 훈련병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답변해도 좋습니다.

“아, 아니… 모릅니다.”

- 그럼 내일 오전 중에 연락할 테니, 해당 사항 확인하여 답변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뒤.

필립이 얼떨떨한 얼굴로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통화 내용이 죄다 당황스러운 탓이었다.

테러 가능성, 거기에 강태의 정치적 성향과 내통자에 대한 생각까지.

그가 고심할 즈음, 호텔 방문이 열렸다.

덜컥.

그 뒤로 운동 가방을 든 강태가 들어왔다.

“아, 리! 벌써 운동 끝난 겁니까?”

“해리가 수발을 잘해서…….”

그 말과 함께 해리도 들어오는 사이, 필립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강태를 보며 한숨을 흘렸다.

‘그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뭐가 달라질 게 있나? 그는 인간 병기로 활약할 거고, 입당 따위와도 관련이 없을 텐데……. 그래도 어딜 지지하는지 궁금하긴 하군. 분명 미군이든, 어디든 활약 하나는 끝내주게 할 테니, 지지한다면 이득이 있겠지…….’

그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생각이 얽혔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민주당을 지지하고, 군인들이 공화당을 지지한다는 흔한 편견.

그 끝에 필립이 화장실을 나오는 강태에게 말을 붙였다.

“리, 당신이 아는 얘기인지 모르겠는데…….”

때마침 강태가 나오고, 그 뒤로 해리가 화장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짧게나마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긴 셈.

필립이 얼른 본론을 꺼냈다.

“펜타곤에서 새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테러의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현지 카르텔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더군요. 그 타깃이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건데…….”

말하던 필립이 강태의 태연한 표정을 보면서 물음을 바꿨다.

“이미 들은 겁니까?”

“예.”

“으음… 그렇군요…….”

필립이 답하면서 안타까운 감정을 속으로 삭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정치적 성향과 내통자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물어봐야 했으니까.

이에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포기했다.

‘이건 나중에… 술을 마시면서 해야겠군. 운동 직후에 하기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주제니까…….’

동시에 화장실에 들어갔던 해리도 해맑은 얼굴로 나왔다.

“필립! 함께 운동하지 그랬어요?”

“…저도 아까 했잖습니까?”

필립이 힘 빠진 허벅지를 툭 치며 묻자, 해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금방 돌아가지 않았어요? 보니까 중간에 없던데……?”

“중간에 안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필립이 더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가벼운 답이 돌아왔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하고 함께 운동할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죠. 개인 정비할 시간도 빠듯하다 보니, 다들 틈내서 운동하죠. 다행히 볼리비아는 유독 한가하다 보니까…….”

“아뇨, 그래도 3시간씩 하진 않을 겁니다.”

“좀 길긴 해도 괜찮잖아요?”

“3시간을 좀 길거나 괜찮다고 하기에는…….”

필립이 질렸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지난 일주일간 친해져 보려고 함께 운동했었는데, 그때마다 3시간씩 헬스장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물론 필립은 첫날에도 끝까지 버티질 못했었다.

2시간을 다 못 채웠고, 이튿날부터 점점 줄어서 지금은 45분 정도 운동하는 게 다였다.

‘3시간이면 파라과이 국경에서 여기를 왕복으로 다녀갈 시간인데… 그 시간을 운동에 쏟아붓다니…….’

두 사람이 실은 운동선수가 아닐까 싶을 무렵.

어느새 하드 케이스에 담긴 저격 소총을 꺼내 정비하던 강태가 해리를 달래듯 말했다.

“해리, 네가 미친놈이라 가능한 거지, 보통은 어려워.”

“그래도요, 선배님. 사실상 이 정도면 휴가 일정하고 다를 게 없는데…….”

“장비나 점검해, 카르텔이 슬슬 움직인다니까…….”

“음, 알겠습니다. 준비라도 착실히 해서, 작게나마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 말에 강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리가 커다란 군용 백팩에서 갖가지 장비를 꺼내 손질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준비성 철저한 강태에게 없는 것까지 있었다.

다소 과할 정도.

안에서 이것저것 꺼내던 해리가 웃으면서 목소리를 냈다.

“현지 경찰 교육 하면서 사격장 이용하게 되면 이거 테스트 부탁드립니다. 왠지 선배님이라면 이것도 손쉽게 쓰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해리가 레일용 조준 거울과 회전식 스코프를 꺼내 보였다.

꺾인 벽 뒤에서 총만 비스듬히 내민 채, 직접 겨누지 않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적을 조준해 쏘는 도구였다.

값비싼 코너 샷(Corner Shot: 굴절총) 대용 장비 중 하나.

그걸 직접 챙겨 온 것이었다.

더불어 첫날부터 설명한 것 중 하나여서 강태도 잘 알고 있었다.

“보채기는… 알았으니까, 잘 갖고 있어.”

“네, 선배님.”

그렇게 막 대답한 순간.

“……?!”

일순, 세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동시에 그들이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분명하진 않으나, 현관문 틈으로 소란 따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들었어?”

강태가 해리에게 묻는 순간.

마치 문을 박살 내듯 복도에서부터 고함이 들이닥쳤다.

“무장하고 당장 집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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