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46화 (146/185)

146화

이튿날 오전, 볼리비아 산타크루즈(Santa Cruz) 주(州).

산타크루즈 경찰청에서 G&G Corp의 공식적인 전술 컨설팅이 시작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바로 전술 자문이나 CQB(Close Quarter Battle) 교육이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다소 거추장스러운 서두가 먼저 깔렸다.

공식적인 발표를 위한 기자회견장이 마련됐고, 제복 차림의 산타크루즈 경찰 간부들이 단상에 올랐으며, 이를 촬영하기 위한 기자들이 모인 것이었다.

거기다 나를 포함한 G&G Corp 보안 요원들도 사진 촬영을 위해 들러리처럼 서 있어야 했다.

다행히 마스크와 선글라스, 캡 모자 따위를 푹 눌러쓰고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찰칵― 찰칵― 찰칵―

촤라라라락―

셔터 소리와 함께 불빛이 요란하게 터지는 사이.

산타크루즈 주 경찰청장은 G&G Corp와의 전술 자문 협약을 발표했고, 책임자인 론 마이어스와 악수를 나누는 사진을 찍었으며, 친미계 하원 의원들도 여럿 올라와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따로 마련된 식사를 하고, 기자들의 질문 같은 것도 종일 이어졌는데, 다음 날도 현장 교육이 이뤄지진 못했다.

전술 교육에 대한 회의가 구체적으로 이뤄졌고, 구두로 합의했던 QRF(Quick Reaction Forces)의 세부 항목에 대한 논의가 길게 이어진 탓이었다.

“느려 터진 게 영 별로지만, 덕분에 쉬고 있으니 나쁘진 않네.”

“아니, 하루라도 일찍 교육해야만 해. 나중에 볼리비아 경찰 데리고 실전을 나가야 하잖아?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대충 뒤에 놓고, 우리가 알아서 하면 되지, 뭘. 애초에 한두 달 한다고 실력이 늘겠어? 시작하기 전부터 시간이나 질질 끄는데… 차라리 이럴 때 쉬는 게 나아, 어차피 수당은 그대로니까.”

우리 측 보안 요원들 몇이 구시렁거렸다.

하루 이틀 늦어진 게 아니라, 거의 일주일간 훈련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CQB 이론 교육을 하긴 했으나, 그것도 2시간 만에 끝났다.

결국, 일주일간 한 거라고는 꾸준한 출퇴근이 전부.

이에 G&G Corp 요원들이 휴가 온 듯 늘어지는 사이, 결국 영사 대리 사무소 서기관인 케니스 영이 요원들을 다 불러 모아서 재차 주의를 줬다.

한데, 내용이 첫날보다 더 많아졌다.

통제선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내용에 몇 가지가 덧붙은 것이었다.

새로 만들어진 통금 시간 공지, 현지인과의 접촉 제한 그리고 쇼핑이나 생필품 구매에 대한 가이드라인 준수 등등.

그 끝에 바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애들인 줄 아는 겁니까? 이게 뭐 하자는 거요?”

나도 생각보다 많은 조건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여기 온 지 이제 일주일밖에 안 됐고, 제대로 된 경찰 교육을 하지도 못했으며, 케니스의 조건도 잘 지켜 왔기 때문이었다.

굳이 이런저런 말이 추가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이를 안다는 듯 집합 인원을 바라본 케니스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현지 마약 카르텔의 움직임이 크게 늘었습니다.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내린 조치이므로 따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놈의 카르텔… 뭐가 얼마나 늘었다는 거요? 여기 그린 존(Green Zone: 안전지대) 아닙니까?”

“그린 존과 비슷할 뿐, 그린 존은 아닙니다. 이곳은 미영사관이 아닌, 영사 대리 사무소만 있고, 미군 역시 없습니다. 저희 사무소도 해병이 아닌, 데브그루를 비롯한 해병 출신 용병들이 지키고 있죠.”

“정말 좆같은 소리군. 그래서 우리도 애들처럼 별 같잖은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네,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

당장 뭐라고 소리치려던 이가 멈칫하고 말았다.

그럴 만한 단어가 나온 탓이었다.

목숨.

이는 돈이나 자유를 넘어서는 최후의 보루로 쓸 만한 글자였다.

한 성질 하는 용병들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군. 이제 일주일짼데… 남은 기간 내내 그래야 한다고?”

“아직 유동적인 만큼, 조치가 과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젠장… 그게 전부요? 더 없는 거지?”

“더 없습니다.”

케니스가 답하자마자, 용병들이 불쾌한 티를 내며 빠르게 흩어졌다.

각각 방으로, 혹은 밖으로.

나도 3인실로 배정된 호텔 방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리.”

어느새 뒤에 따라붙은 케니스가 날 불렀고,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럽시다.”

나도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비유가 아니었다.

케니스를 CIA 요원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상황이 다가올 걸 예상해서 쉽게 답한 것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움직임이 없어서 오히려 의아했을 지경.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대충 정리하는 게 마음 편하겠어.’

그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사이.

케니스가 독실로 받은 방으로 향했고, 이어서 내게 커튼 친 발코니 창가 자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바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물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걸로 아는데, 물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본론부터 말씀드려야 되겠군요, 아무래도 그쪽이 편하실 테니.”

나를 잘 안다는 듯한 말에 CIA의 면모가 다시금 보일 무렵.

물 한 컵을 따라온 케니스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담담하게 목소리를 냈다.

“먼저… 방금 보안 요원들을 집합시켜서 말했듯 산타크루즈의 상황이 조금 변했습니다. 특히 산타크루즈 카르텔 위주로 활동량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스카우트가 아닌, 정보 전달 소식에 뭔가 싶을 무렵.

케니스의 말이 계속되었다.

“특히 휴민트를 통한 정보량이 월등하게 증가했고, 그 빈도 역시 늘어났습니다. 이럴 때 발생하는 사고 유형이 정해져 있는데, 그중에 가장 가능성이 큰 건… 테러입니다.”

“테러요?”

반사적으로 되묻고 말았다.

내심 짐작하긴 했는데, 그게 케니스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아주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현재로서는 G&G Corp 직원들이 대상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어지는 시선이 마치 책임 소재를 찾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나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저 때문에 그런 겁니까?”

“아직 거기까지 파악하진 못했습니다만, 연관성을 파악하기 위해 요원들을…….”

말하던 케니스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쓰게 웃고 말았다.

“본론부터 말하다 보니 제대로 된 소개를 못했군요. 미스터 리, 저는 CIA 요원입니다. 해당 내용이 기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공개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혹시 알고 있던 겁니까?”

답이 태연한 걸 눈치챈 듯한 말에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었어요. 느낌도 그렇고, 타이밍도 그렇고…….”

“음, 생각보다 눈썰미도 좋군요. 그럼 당신이 원하던 대로 본론을 이어 가자면…….”

케니스가 말머리를 다시 잡아 오듯 얘기를 이어 갔다.

“현재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암시장에서 암약하는 불법 용병들의 사망 및 실종에 대한 얘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당신이 있죠, 리. 정확히는 당신이 사살했다는 건데… 다행히 아직 그런 정보까지 공유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연루됐다는 사실이 퍼졌다면… 아마 용병들과 연관된 조직, 산타크루즈 카르텔 같은 곳에서 당신을 타깃으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부분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조사 중에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퍼졌어요?”

주춤하며 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스토리는 진즉에 바뀌었는데, 이런 식으로 영향을 끼칠 줄은 예상을 못 한 탓이었다.

내부적으로 나와 지안드로, 피칼 사이에서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남미의 암시장이 아니라.

한데, 이어지는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부풀려지거나 왜곡된 내용이 있긴 하지만, 대개 불법 용병들의 사망이나 실종, 투항 같은 내용이 공유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여파가 남미 전체에 퍼지고 있습니다.”

“아… 근데 이게…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거네요?”

내 말에 이번에는 케니스가 주춤했다.

“네? 긍정적이라는 게……?”

“소문이 났으면 용병 고용이 어려워지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돈이 더 들어간다던가…….”

“아아, 맞습니다. 그런 영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케니스가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위험성을 먼저 가늠하곤 하는데… 당신은 정말 놀랍군요. 기대 이상입니다.”

“뭘 그렇게까지…….”

대충 칭찬을 막자, 잘됐다는 듯 케니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좀 더 위험한 걸 말씀드려도 괜찮겠군요.”

“…마약 카르텔보다 더 위험하다고요?”

혹시 지안드로나 피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까 귀를 기울인 순간.

이번에도 전혀 다른 게 나왔다.

그가 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면서 말한 것이었다.

“저희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우선 여기 우측부터… 이 사람은 볼리비아에서 붙인 감시역이고, 여기는 브라질 국가정보국 요원 그리고 이쪽은… 혹시 본 기억이 있습니까?”

원주민과 라티노의 생김새를 가진 두 남자를 가리킨 케니스가 이어서 마지막 사진을 가리키면서 날 쳐다봤다.

사진 속에 지나치기 어려운 얼굴이 있었다.

아랍계 혼혈 미녀.

남자라면 한 번쯤 쳐다볼 얼굴인데, 심지어 나하고도 마주친 적이 있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예, 봤었습니다.”

그러자 케니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최근 일주일간 당신에게 2회나 접촉을 시도했던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이었습니다. 저희가 전부 차단했고, 그 영향으로 현재는 귀국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인계 같은 겁니까?”

“그럴 겁니다. 당신은 미국인이 됐지만, 반려자의 자리는 비어 있지 않습니까? 공략을 시도해 볼 만한 자리죠. 관계가 좋다면, 당신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아…….”

“아마 미스터 리와 알고 지내는 이스라엘인들이 관련 정보를 조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말에 내가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쳐 갔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모사드 소속 요나단과 사이렛 매트칼(Sayeret Matkal)의 전 지휘관이자, 대령으로 진급한 아샤프 바리난 등등.

그 끝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람 좋아 보이는 아샤프가 관련 없을 거라고, 마냥 순수하게 떠들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아샤프도, 나도 아는 게 너무 많았으니까.

곧 케니스가 얘기를 이어 갔다.

“오늘 보안 요원을 모두 집합시켜서 얘기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리, 당신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막기 힘든 암살 작전이 감행될 수도 있습니다.”

“…음.”

타릴 제도에서 겪어 봤던 거라서 안 좋은 반응부터 나왔다.

그때 다행히 얼굴에 흠집만 났을 뿐.

까딱 잘못하면 핵미사일을 구경하기도 전에 죽을 뻔했었다.

곧이어 케니스의 말이 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계속될 겁니다. 노출된 데다가 심지어 신분도 명확하죠. 당신의 사진과 이름을 가진 놈들이라면, 언제고 다시 찾아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휴가 기간에 서류 작업을 거치며 소속을 변경한다고 해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결국에는 발각될 겁니다. 지금보다 더한 위험도 오겠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한차례 숨을 내쉬고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세계 평화와 미국의 안보도 무인으로 지킬 순 없습니다.”

“그 말씀은…….”

설마 하는 순간, 본론이 나왔다.

“CIA로 오십시오. 당신이 온다고만 한다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겠습니다. 돈이든, 계약서든… 오겠다는 확답만 주십시오. 우리가 모두 처리해 두겠습니다.”

명함만 주던 CIA의 태도와는 다른, 밑바닥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그리고 아주 든든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국방부의 제안처럼 수락할 순 없었다.

정보기관을 원래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어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못 할 가능성이 큰 데다가, 하게 되더라도 방대한 조직 특성상 피칼에게 얘기가 흘러갈 확률이 높은 탓이었다.

즉,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은 좀 어렵고요, 나중으로 미룰게요.”

“나중이라면…….”

“제가 하는 일만 마무리하고요. 아, 금방은 아닙니다. 언제 끝날지 몰라요. 뭔지도 말 못 하고요.”

미리 엄포를 놓듯 설명했는데, 나를 보던 케니스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동시에 국방부가 내게 해 준 것과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 그때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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