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새벽 4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 위치한 어느 호텔.
호텔만이 아니라 거리까지 고요한 가운데, 스탠드 전등을 켜 둔 지안드로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노트북 속의 중요한 파일들을 골라내어 완전하게 제거했고, 사용한 선불 폰을 파기했으며, 새 가방과 새 옷에 맞게 머리와 수염 스타일까지 바꾸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면서 퇴실 준비를 마칠 무렵.
우웅― 우우우웅―
선불 폰 하나에 문자가 도착했고, 이어서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액정을 본 지안드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번호는 처음 보는 것이지만, 앞서 도착한 문자에 정보원을 뜻하는 암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백악관과 국방부를 드나드는 내통자 중 한 명.
통화를 수락하고서 서로 간에 코드를 읊자, 지안드로의 귀에 새 정보가 들어왔다.
- 폭스트롯이 오늘 산타크루즈델라시에라(Santa Cruz de la Sierra)에 도착했고, 파파와 찰리도 현지에 함께 있음.
“……!”
지안드로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폭스트롯은 강태를 뜻하는 Freak(괴짜, 괴물)의 첫 글자인 ‘F’에서 나온 알파벳이고, 파파와 찰리는 각각 펜타곤과 CIA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즉, 강태가 국방부, CIA와 함께 볼리비아에 갔다는 뜻.
“수신 양호.”
이에 대답하자마자, 바로 통화가 종료됐다.
그리고 끊어진 전화기를 보던 지안드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정보 내용이 마뜩잖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소식을 전달해 줄 수하가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즈에 있는데, 그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은 탓이었다.
몰라서 전화를 안 했을 리는 없었다.
단순히 산타크루즈에 머물면서 중계기 역할만 한 게 아니라, 현지 군경은 물론이고 카르텔과도 관계를 맺어서 용병 브로커의 역할까지 수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비밀리에 침투한 특수부대라면 모를까, 비행기를 타고 온 강태를 몰라선 안 됐다.
입국하고 30분 안에 파악하고 보고해야만 했다.
한데 아무런 연락도 없는 상황.
결론은 간단했다.
‘…문제가 생겼군.’
물론 짐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관련된 정보가 없었으니까.
다만, 무턱대고 수하에게 전화할 순 없었다.
그가 미 정부에게 체포되어 있다면, 새 선불 폰으로 전화하는 순간에 바로 추적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관할 기지국만이 아니라, 호텔 위치까지 금세 알아낼 수 있을 터.
이에 고민하던 지안드로가 시계를 들여다봤다.
통화가 추적될 때 얼마나 걸리는지, 여유가 어느 정도 남는지 가늠한 것이었다.
“빠듯하겠어…….”
중얼거리듯 말꼬리를 흐리고 고민하길 잠시.
지안드로가 선불 폰을 하나 꺼내어 번호를 눌렀다.
만에 하나, 그의 수하가 미국에 체포됐다면, 체포됐다는 사실이라도 알아야 했으므로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불확실한 것보다는 확실한 게 나으니까.
그렇게 통화 연결음이 두 번, 세 번, 네 번으로 넘어갈 때였다.
- 여보세요? 지안드로인가?
“……?!”
지안드로가 주춤하고 말았다.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딴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 전화기가 맛이 갔나? 아아, 여보세요? 이봐, 지안드로? 안 들리나?
산타크루즈 카르텔의 간부, 미겔 알바레즈.
오래전, 남미에 있던 시절에 교류했던, 지안드로의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 중의 하나였다.
이윽고 지안드로의 얼굴이 구겨지고, 목소리에는 분노가 실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그의 수하가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암호를 주고받아 상태를 확인해야 했는데, 그걸 뜬금없이 미겔이 받은 것이었다.
- 들리면 재깍재깍 답을 하지 그래? 겁쟁이처럼 간이라도 보는 건가?
“답이나 해. 어떻게 된 거야?”
- 아아, 네 부하 대신에 왜 내가 전화를 받았냐고?
“…….”
지안드로가 말하는 대신 답을 기다릴 무렵.
날카로운 음성이 돌아왔다.
- 전화받아도 말을 못 할 거야, 소리를 존나게 지르는 바람에 목소리가 안 나오더라고. 그리고 존나게 처맞아서 정신이 나가기도 했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 그러니까 좀 일찍 전화하지 그랬어? 아니면 네 부하한테 전화할 권한을 주든가? 그랬으면 좀 덜 맞았을 텐데. 지금 개처럼 빌빌 기고 있는데…….
“미겔 알바레즈!”
지안드로의 언성이 절로 높아진 순간.
미겔이 답했다.
- 성까지 부르다니, 굉장히 무섭군. 이봐, 지안드로 바시카날. 왜 이렇게 사람을 실망시키나? 네 부하가 병신이 됐으면, 왜 그렇게 됐는지 생각해 봐야 할 거 아냐? 감히 소리를 질러?
까득, 지안드로가 이를 갈 뿐, 다른 소리를 내진 않았다.
참는 것이었다.
분노가 몸을 달구고 있음에도, 속을 가라앉히고 보는 것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차오르는 분노는 미겔이 왜 이러는지 그리고 부하의 상태는 어떤지, 다 알고 나서 해소해도 될 일이었다.
이에 지안드로가 잠깐 마음을 추스를 무렵.
미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상황 파악 중인가? 하여튼 그 입을 닥치니 훨씬 낫군. 아, 참고로 한 번만 더 소릴 지르면… 음, 네 부하의 눈알 하나를 뽑은 다음에 그 자리에 라마 좆을 박아 넣겠어.
지저분한 협박에 지안드로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필요한 건 정확한 정보였으니까.
“…이유부터 듣고 싶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 왜 이러냐니? 오, 정말 모르는 모양이군. 어리석은 지안드로, 사람을 몇 번이나 실망시키는 건가?
“…….”
지안드로가 다시금 화를 참는 사이.
어느새 답이 돌아왔다.
- 하… 네놈의 용병 사업에 쓸 새로운 놈들을 구해 달래서 알아보는데, 씨발… 알고 보니 유럽에서 아주 좆 됐다면서? 항복해서 미국에 붙어먹은 배신자까지 있고.
지안드로가 그제야 얕게 숨을 흘렸다.
상황 파악을 마친 것이었다.
유럽에서의 작전 실패가 불러온 용병의 생포 그리고 배신.
그것도 규모가 큰 작전이었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용병들이 수백 명에 달했으니까.
고로 화살이 향할 곳은 뻔했다.
그 모든 일을 꾸미고 진행한 자신, 지안드로.
다만, 중개 수수료를 받고, 후원금을 챙긴 카르텔이 볼 유형적인 손해는 없었다.
특히나 돈에 관련해서는 지안드로가 오차 없이 정리한 덕분이었다.
잘못된 게 있다면 단 하나, 체면뿐.
“…그래서 망신이라도 당했나?”
짐작하며 묻는 말에 탄식 같은 욕이 돌아왔다.
- 씨발, 이제야 알아듣는군. 그래, 나였으면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미겔도 결코 조용히 넘어갈 리는 없었으나, 지안드로는 이어질 말을 참고 기다렸다.
그래야 정보가 정확해질 테니까.
이에 지안드로가 얌전히 기다리는 사이, 곧 미겔의 사나운 말이 돌아왔다.
- 하필 디에고가 브라질 놈들과 만났어. 놈들이 얼마나 신나서 쏘아붙였을지… 가늠이 되나, 지안드로? 그리고 내가 무슨 모욕을 들었을지, 상상이 가나?
“…….”
지안드로는 대답하는 대신, 한숨을 삼켜야 했다.
미겔이 말한 디에고라는 이름이 누구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보스의 친조카.
카르텔 서열 3위로 고위 간부인 미겔보다 윗선에 있는 인물이 디에고였다.
쉽게 말해서 보스의 핏줄이 불쾌했기 때문에, 미겔이 그의 수하를 납치해서 폭행한 것이었다.
전화 내용이 불쾌한 것도 같은 이유였고.
‘상황이 번거롭게 꼬였군…….’
비로소 파악을 끝낸 지안드로의 눈이 감겼다.
화가 끓는 탓이었다.
전화를 대신 받고, 수하를 다치게 만든 미겔 때문에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향한 것이었다.
미국과 강태.
세계 경찰을 흉내 내는 패권 국가와 그 밑에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용병이 작전을 계속해서 망치고 있었다.
심지어 강태는 보스인 피칼이 직접 제거하라는 명령까지 내렸었다.
직접 죽이지 못할 경우를 고려한 듯 주변의 모든 것을 죽이고, 또 죽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었고.
이내 이를 갈 무렵, 미겔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 그러니 네가 책임을 져야겠어. 네 부하가 좀 맞은 건, 내 모욕값으로 쳐 줄 테니 넘어가도록 하고…….
“아니지.”
미겔의 말에 지안드로가 바로 선을 그었다.
“책임질 놈은 따로 있어.”
어느새 지안드로가 눈을 빛내면서 말을 이었다.
“거기 미국 용병들이 입국했을 거야, 알고 있겠지?”
- 그게 왜?
“그 안에 이 사태의 원인이 있어.”
- 뭐라고?
처음으로 미겔이 주춤했고, 그 틈을 치고 나가듯 지안드로가 말을 이었다.
“이름은 이강태, 아시아 인종의 한국계 미국인이야.”
-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네가 언질만 줬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고, 애초에 병신처럼 말아먹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만든 게 바로 그 아시안이야. 그리고 그 아시안의 다음 목표는… 산타크루즈야. 그곳 군경과 합동작전을 펼칠 거고, 그곳도 유럽처럼 좆같이 만들겠지.”
- 하, 개소리를 하는군.
미겔이 기가 찬다는 듯 말을 이었다.
- 그 군경이 미국놈들의 입국을 보고했어. 합동작전이 가능할 것 같나? 천만에,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해.
“내가 그것도 모르고 말했을 것 같나?”
- 뭐?
“차라리 이렇게 된 김에 너희가 다 쓸려 가도 볼만하겠어. 내 수하에게 손을 댄 값으로 과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군.”
지안드로의 확고한 말에 주춤하듯 물음이 넘어왔다.
- …증거가 있나?
“펜타곤과 CIA.”
세계 최고, 혹은 최대라고 부를 만한 두 조직을 언급하자, 핸드폰 너머가 멈칫했다.
지안드로가 스피커 너머의 숨소리를 듣다가 말을 이었다.
“그 둘이 아시안에게 사람을 붙여 놨어. 달리 말하면… 산타크루즈에 두 기관의 요원들이 입국했다는 사실이지.
- …씨발, 확실해?
“그건 군경이 알려 주지 않던가?”
- 너, 만약에 이게 개소리라면 네 부하는…….
“어쭙잖은 협박은 그만두고 어떻게 할 건지 제대로 얘기해 봐. 그래야 내가 필요한 정보라도 줄 거 아냐?”
- 제기랄…….
욕설 뒤로 미겔이 한숨을 섞어 뱉듯 물었다.
- …네가 바라는 건 뭐지? 그놈을 죽였으면 하나? CIA와 펜타곤에서 요원까지 보내 둔 놈을?
“감히 죽일 수나 있겠나? CIA에서 사람까지 보냈는데 말이야.”
- 그럼 책임이나 넘기려고 떠벌렸나?
“아니, 네가 그렇듯 나도 CIA를 좋아하진 않거든.”
- 그래서?
“네가 잡아 둔 내 부하를 풀어 주고, 그에게 현지의 모든 정보를 전달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준비한 계획은 없었지만, 지안드로는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아주 다양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공 가능성을 크게 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를 예상했었다.
다만, 눈먼 총알에라도 맞으면 손해가 아닌지라, 지안드로가 기다렸다는 듯 말한 것이었다.
곧이어 예감한 듯한 말이 넘어왔다.
- …알아서? 뭘 하려고?
“잡히게 된다면 물고문을 당하게 될 만한 건데, 정말 알고 싶나?”
답은 넘어오지 않았다.
지안드로가 말한 물고문을 당할 만한 단어는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테러.
허세나 거짓이 담겨 있을 수도 있으나, 지안드로는 이 바닥에서 신뢰가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부터 알고 지내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입 밖에 낸 건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여도 마찬가지.
또한, 긴 세월 동안 지안드로는 계산이 늘 확실했고, 실수가 없었으며, 근래에는 테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인터폴의 적색 수배자였다.
이에 미겔이 고심하듯 말을 이었다.
- …일단 확인부터 하고 다시 연락하는 게 좋겠군.
“넌 확인해 보고 시킨 거나 해 둬. 연락이든, 뭐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고… 이번 한 번 만이야. 내 사람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 네가 모은 용병들에게 총 맞아 죽기 싫으면.”
뚝.
곧장 전화를 끊은 지안드로는 바로 핸드폰 파기 작업에 들어갔고,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에 호텔을 나왔다.
마치 이른 트래킹을 나가는 여행객처럼.
그러나 설렘이나 피곤함이 어려 있는 트래커와 달리, 지안드로의 얼굴에는 화가 어려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변수가 생길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