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리! 몸은 좀 괜찮습니까?”
강태가 선실을 나오자마자,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눈으로 상처가 있는지 살피던 그가 강태의 볼에 붙은 거즈를 보면서, 곧장 물음을 덧붙였다.
“뺨은 좀 어때요? 상처가 깊어 보이던데, 잘 처리됐습니까?
“흉터는 좀 남는데요.”
“아, 그렇군요. 그래도 심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 말에 강태도 고갯짓만 하고 넘어가려 하자, 눈치를 보던 필립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참, 그리고 마침 전달할 얘기가 있는데…….”
“예, 말씀하십쇼.”
“다른 게 아니라, 리의 회사와 추후 일정을 협의 중이어서 며칠 정도 여기서 더 머물게 될 겁니다.”
“이 배에서? 며칠이나 있는 겁니까?”
강태가 바로 되물었다.
이번 작전 일정이 3주도 채 안 될 만큼 짧아서, 이어서 다음 일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직 휴가를 가기에는 근무 일자가 너무 부족했다.
약 5주 정도를 더 일해야 했다.
G&G Corp의 방침이 8주 근무 후 4주 휴식이기 때문이었다.
앞뒤로 며칠 정도 차이가 날 수는 있으나, 어쨌든 5주 이상은 대외협력국의 의도가 반영된 회사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강태 역시 곧바로 어디론가 가리라 예상했었다.
한데 여기서 며칠을 머물고, 그사이에 무슨 협의를 진행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
강태가 바라보는 사이, 필립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너무 길진 않을 겁니다. 그 기간 동안 국방부와 협의해서 이어질 업무도 함께하게 될 것 같고요.”
“아, 그러면 뭐…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강태가 지나가려던 순간.
필립이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함께 일하는 건?”
“미군하고요?”
“네, 굳이 오늘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떤지가 중요하죠.”
부연 설명 뒤로 강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확실히 미군이 밀어주는 게 낫긴 나아 보였습니다. 상황이 좋지 못했지, 함대에다가 전투기까지 떴으니…….”
폭격 직전에 상황이 마무리되어 F-5 전투기 2대가 선회해서 돌아갔으나, 어쨌든 마하의 속도로 날아와 저공비행까지 했었다.
육안으로 섬 내 위험 요소를 파악하겠다는 듯.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작전 지역에 적이 있었다면,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반군들이면 기관포나 공대지미사일 맛을 보기도 전에, 비행 중에 나오는 굉음만 듣고도 그 자리에서 소변을 지렸을 터.
그 생각을 하던 강태를 향해 필립이 나란히 걸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함께하는 건 어떻습니까? 리, 당신도 미군이 되어서.”
이게 본론이었다.
정확히는 위에서 지시한, 강태에게 전하라고 했던 서두였다.
넌지시 말을 꺼내는 것.
이에 걷고 있던 강태가 눈을 껌뻑거렸다.
“그거, 전에 대답했었잖아요?”
처음 들은 얘기가 아니라서 그랬다,
노스캐롤라이나의 군사 훈련소인 포트 브래그에서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미군이 되면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겠노라고, 그러니 미군이 되라고.
물론 강태의 대답은 반응과 같았다.
“제안은 고마운데, 지금은 생각이 없는…….”
“아직 할 얘기가 더 있습니다.”
“예?”
전에 없던 말에 강태의 눈이 동그래지자,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깔았다.
“원하는 것을 말씀만 하면, 그걸 전부 이뤄 주겠다고 했습니다.”
강태를 자연스럽게 회유하려던 본래 작전과는 많이 다른, 대놓고 포획하는 듯한 방식.
갑자기 내려온 명령이었다.
당황스럽긴 했으나, 필립은 따로 불만 따위를 갖지 않았다.
군인, 그것도 장교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강태의 실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까, 급하게 움직이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먼저 지휘부에 얘기를 꺼내 보려던 참이었다.
CIA나 국토 안보부 같은 기관에서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먼저 채 가야 했으니까.
그사이, 강태가 필립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원하는 거라면… 어디까지 되는 겁니까?”
내심 궁금하다는 말투에, 필립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대답할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그냥 말 한마디만 던져 놓는 것보다는 강태가 관심 가질 만한 것을 말해 두는 게 나을 테니까.
필립이 전과 같이 힘이 들어간, 그리고 묵직하게 깔아 둔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테러 척결이라면 테러범을 죽일 수 있는 기회와 함께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많은 재산을 바란다면 그 어떤 군인보다도 많은 액수의 봉급을 지급하고, 은퇴한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연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둘이 아니라면, 그게 뭐든 원하는 걸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테러 척결이라…….”
중얼거리는 듯한 반응에 듣고 있던 필립의 눈이 반짝였다.
긍정적인 신호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필립이 그간 분석한 정보에 어울리는 태도.
‘역시 테러에 가장 크게 반응하는군. 먼저 말하길 잘했어.’
아직 이유나 원인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필립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강태가 가장 경멸하는 게 바로 테러였다.
그가 즐기는 사격, 운동, 격투 역시 모두 테러를 막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지금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이 증명된 셈.
필립이 눈치껏 설명을 달았다.
“미군에는 모든 신상 정보가 기밀로 처리된 특작 요원들이 있습니다. 당신도 그중 한 명이 될 수 있죠. 그리고 원하는 방식으로, 테러 전담 팀 같은 걸로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만이 아니라, 팀 모두가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말하고서 필립이 미소까지 머금었다.
강태가 쉽게 된다, 안 된다 하는 대신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필립이 마무리를 짓듯 말했다.
“그럼 머무는 동안 충분히 생각해 보고…….”
그리고 나중에 편하게 얘기해 달라고 하려던 때.
강태가 입을 열었다.
“그거 참 좋긴 한데, 아무래도 안 될 거 같은데요.”
“…네? 아니, 이유가 뭡니까?”
필립이 주춤했다가도 주어진 직무에 맞게 얼른 물어봤다.
거절의 원인을 해소할 목적으로.
이에 쳐다보자, 강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도 괜찮거든요.”
“……?!”
필립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강태는 여전히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솔직한 심정이라 그랬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당장 피칼에 대해 알려 주고, 찾아내서 반드시 죽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피칼을 어떻게 아는지 해명하기도 막막한 데다가, 피칼을 찾아내서 죽이는 게 쉽지도 않을뿐더러, 중간에 말이 새서 피칼을 죽이기 전에 관련 소식이 전달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계획이 엎어질 터.
물론 작전과 관련된 내용은 지금도 새어 나가고 있겠으나, 그건 피칼이 언급된 게 아니라 차이가 컸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지금처럼 진행하는 게 나았다.
필요할 때 업무 협조를 하면서.
이에 강태가 결정을 내리고 담담하게 답을 한 순간, 필립이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 아니… 지금도 괜찮지만, 원하는 건 있을 거 아닙니까? 아니면 미군에 소속되기 싫은 이유라든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욕심을 갖고 살기 마련인데, 강태는 삶을 초탈한 듯 대꾸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무소유로 떠도는 고명한 목회자처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던 필립은 강태와 관련된 정보 하나를 떠올렸다.
세계 최고, 최대의 정보기관인 CIA를 거절했다는 소식.
그게 정보기관을 싫어하거나 군대를 더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면, 애초에 물질이나 보상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면……?
일순, 필립의 얼굴에 확 그늘이 드리워졌다.
뭔가 뇌리를 스쳐 간 것이었다.
테러 사건이 없는 한국에서 태어난 강태가 테러를 왜 그리 싫어하는지, 휴가 기간에 쉬지 않고 훈련만 하는 이유가 뭔지, 여흥이나 이성에는 왜 관심이 없는지 등등.
강태와 관련된 생각이었는데, 그 끝에 결론이 나왔다.
강태는 능력만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나 마음가짐까지 일반인과는 천지 차이라고.
전에도 짐작은 했는데, 이번에 대답을 들으면서 확신한 것이었다.
강태는 그냥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생각해선 안 됐다.
차라리 무욕의 성직자가 어울렸다.
강태가 추구하는 정의도 그렇고, 행동하는 바도 거기에 더 어울렸다.
‘…더 까다롭게 됐군.’
필립이 난감해하는 사이.
강태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하던 것처럼 하죠. 가끔씩 서로 손발 맞추는 정도면 좋겠는데요.”
“…나중이라면 언제를 말하는 겁니까?”
‘나중’이라는 단어를 들은 필립이 멈칫했다가 반응했다.
직전까지는 거의 포기 상태였는데, 강태의 말에서 아주 작은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태도 싫어하는 기색을 비친 건 아니었다.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
그래서 바짝 긴장하며 쳐다보자, 강태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정해 둔 건 없고요. 그냥 말 그대로 나중에요, 나중에.”
“…알겠습니다.”
필립이 참담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기약 없는 ‘나중’이라는 단어에서 느낀 희망이 더 작아진 탓이었다.
강태의 회유는 거의 물 건너간 셈.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필립이 희망을 갖긴 어려웠다.
미래에 작은 희망이 있다고 한들, 당장 실패했다는 보고서를 써야 하는 탓이었다.
분명 감점 요소가 될 터.
강태와 달리 보통의 장교들이 그러듯, 진급과 성적을 상당히 신경 쓰는 필립으로서는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내부에서 연락 장교를 예쁜 여군으로 바꾸는 건 어떠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미인계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용되는 효과적인 전술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필립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
그 효과가 발휘될지 어떨지는 모르나, 우선은 할 일을 해야 했다.
바로 보고서 작성.
“하…….”
강태와 헤어진 그가 한숨을 흘렸다.
이제 진짜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그것도 포장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다.
이제 선실로 돌아가는 필립의 눈가가 구겨졌으나, 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도착해서도 손이 쉬진 않았다.
애초에 안 쓸 도리가 없었다.
단어라도 조금 바꿔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힘이 닿는 대로 최대한 열심히 써야 했다.
그리고 일이 터졌으므로, 가급적 빨리 알려 줘야 그나마 덜 욕먹을 테니까.
그렇게 종일 작성한 보고서를 지휘부로 보낸 다음이었다.
마음 졸이던 무렵, 이틀 만에 연락이 왔다.
- 필립 애드먼 중위, 앞으로도 이 일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네? 아, 네! 물론입니다.”
- 오늘 같은 전투가 더 벌어질 수 있는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불명예스럽게 전역하거나 전사할 수도 있습니다.
“아…….”
필립이 대답하려다가 주춤했다.
수화기 너머로 언급한 것들이 무섭거나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죽을 뻔한 교전을 끝냈는데, 여태 강태 생각만 하느라고 별다른 동요 없이 생활했음을.
전장에서도 매복 같은 게 아니라, 강태 때문에 충격을 받았었다.
특히 바로 옆에서 목격했던 서서쏴 자세로 저격하는 장면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적의 사격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물론 불명예스러운 전역이나 전사가 걸리긴 했으나,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그가 담당하는 강태는 전쟁사나 첩보사에 한 획을 그을 인물이었다.
알려지지 않아도, 알려져도, 분명 중요한 사람이 될 터.
그런 사람을 두고 포기할 순 없었다.
아니면 발에 채이는 장교들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이윽고 필립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 좋습니다, 그럼 이동할 준비 하세요. 당신이 맡은 용병과 함께 3일 내로 움직일 겁니다.
“네, 어디로 갑니까?”
- 구체적인 지명은 공유되지 않았습니다만, 대략적인 위치는…….
흐려지는 대답에 필립이 더더욱 귀를 기울일 무렵, 다소 무거운 말이 건너왔다.
- 남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