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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41화 (141/185)

141화

미군 깃발이 달린 함정에 몸을 싣고 나서야, 마커스가 갑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뒤따라 올라왔던 해리가 얼른 그의 팔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더럽게 피곤해. 전투도 아주 개같았고 말이야.”

“아… 그랬죠.”

부상이 있는지 물어보려던 해리가 금세 수긍했다.

그도 상당한 피로를 느껴서 그랬다.

밤중에 침투한 이후로 날이 밝을 때까지 잠 한숨 못 자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잠은 좀 덜 자도 그만이었다.

군에서 가장 많이 하는 훈련 중의 하나도 수면을 줄이거나 제한하는 거라서 어려울 게 없었다.

중요한 건 다른 데 있었다.

타릴 제도의 교전.

무엇보다 함정에서 비롯된 위험과 퇴출 과정이 문제였다.

물리적 위협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스트레스.

그건 직장인들이 겪는 것과는 궤가 달랐다.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공포에서부터 발로한, 군인들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일명 PTSD로 몰아넣는 커다란 심적 압박이었다.

당장 누군가 과호흡으로 쓰러지거나 경련을 일으켜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안전하다고 여겼던 주변 환경이 위험 지대가 되었고, 적은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발견한 적은 거리가 멀어서 공격할 방도도 없었으니까.

정신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닌 척하려고 해도, 밀려오는 갖은 생각과 감정이 계속해서 속을 뒤집어 댔었고.

그게 마커스와 해리는 물론이고, 현장에 있던 모두에게 닥쳐왔던 것이었다.

이윽고 상기하던 마커스의 입이 재차 열렸다.

“넌… 아직 젊어서 괜찮나? 튼튼한 모양이지?”

그가 해리를 보며 물었다.

베테랑인 마커스에 비해 나이나 경험이 한참이나 부족하고, 그만큼 데미지를 입을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방금 상황만 봐도 몰살의 위험이 당장 코앞에 있었고,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몸이 갈가리 찢겼을 만큼 위험했다.

그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특이 사항이 없었다면, 아마 그렇게 됐을 것이었다.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군사위성을 속일 만한 함정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갔으니까.

죽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현장에 있던 누구든,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강태가 첫 발을 쏘기 전까지.

이에 지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즈음, 해리가 짧게 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휴가 기간에도 선배님과 함께 지내서… 뭔가를 해 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리가 첫 발을 쏘기 전에도 말인가?”

마커스가 궁금하단 얼굴로 물었고, 해리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하죠.”

“오… 믿음이 대단한데? 거의 신앙 같군.”

마커스가 감탄했다.

그도 강태를 알고 또한 믿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반자동 저격 소총인 MK.20으로 유효 사거리의 2배 거리에 있는 적을 사살하는데, 그것도 엎드려 쏴 자세로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선 채로 방아쇠를 당기다니?

저격수 셋을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이 대략 10초 정도였다.

박격포를 다루던 용병들도 약 15초 정도 쏴 대서 6명을 사살했었고.

심지어 해상에서는 그보다 더했다.

‘2.4마일(약 3.8㎞)에 있는 적을 죽였다고…….’

호세가 떠들어 대던 말에 마커스의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탓이었다.

거짓은 아니겠지만, 아직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상이었으면 몰라도, 해상이었으니까.

그 생각을 하는 사이, 해리도 기억을 끄집어내듯 천천히 말했다.

“처음부터 열성적이긴 했지만, 휴가 기간에 함께하면서 믿음이 점점 더 단단해졌습니다. 솔직히 저는 선배가 영화 원티드처럼 총알 궤적을 휜다고 해도 믿을 것 같습니다.”

“…….”

지쳐서 늘어지던 마커스의 눈매가 좁아지고, 눈꼬리에 주름이 잡혔다.

그리고 팔자 주름이 진하게 그려지면서 입이 열렸다.

“너 진짜 미친놈이었어?”

“학교 다닐 때도 그런 말 좀 들었습니다.”

“…미쳤다던 리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군. 우리 팀… 아니지, CIA에 어떻게 들어간 거야? 정신감정은 통과했나?”

“제가 알기로 정상인을 선발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다던데… 부팀장님도 델타 출신이니 잘 알지 않습니까?”

“…….”

마커스가 채 대답하질 못했다.

총알이 휘어서 날아가는 건 상상도 못 하지만, 특수부대에 정상인이 드문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이어도, 결국 비정상적으로 바뀌곤 했다.

이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죽일 죄가 있다고 해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건 쉬운 일이 아닌 탓이었다.

이에 입을 닫는 사이, 해리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습니다.”

“네가?”

뭐가 있겠냐는 듯 바라보는 순간, 해리가 젖은 흙과 이파리가 묻은 얼굴을 닦으며 답했다.

“선배님께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박격포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무력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도움이 될 수 있게, 휴가 때는 바로 찾아가서 가장 가까이서 노력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 괴리감도 큽니다,”

“이봐, 미친 나이트 스토커.”

마커스가 바로 해리를 부르고, 천천히 뒷말을 달았다.

“그런 광적인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왜 말도 안 되는 자괴감을 만들지?”

“부팀장님도 선배님의 노고를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알지. 그래서?”

마커스가 뭐가 문제냐는 듯 말을 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야, 그게 전부야. 리에게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마커스가 막 말을 마친 순간.

“오, 마커스? 웬일로 일장 연설을 하고 그래? 그것도 갑판에 주저앉아서 말이야. 선실로 안 들어가나?”

호세가 등장했다.

이미 다 듣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띤 채, 어느새 해리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들어 보니, 리와 관련된 고민 상담 같은 걸 하는 모양인데… 맞나?”

“아,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커스의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고, 그렇지? 평소에 말도 잘 안 하는 놈이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안 그래?”

“그건…….”

해리가 주춤하자, 호세가 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내가 알려 주지. 너보다 먼저 리와 함께 지내 왔던 선임으로서 그리고 오늘도 리의 전설적인 해상 저격을 목격한 동료로서 말이야.”

호세가 짐짓 힘을 주며 말하자, 마커스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나 하는 모습.

이내 호세가 빙긋 웃으면서, 해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리가 너무 대단해서, 네가 발끝도 못 따라가고 도움조차 안 된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 물론 그만큼 노력하겠지. 명색이 나이트 스토커 출신이니까, 안 그래?”

“당연하죠. 휴가 기간에도 선배님과 같은 루틴으로 훈련했습니다.”

“크으, 훌륭하군. 그래, 그런 식으로 해. 그럼 좆같은 고민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단 나아지지 않겠어? 리에게 손톱의 때만큼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그 말에 해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론적으로 마커스와 같은 소리지만, 고민을 부정했던 마커스와 다르게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해리의 눈에 이윽고 힘이 들어갔다.

밤을 지새우거나 함정에 빠진 적도 없고, 교전을 하지도 않은 것처럼.

“감사합니다. 다음 휴가도 선배님과 함께할 이유가 추가됐군요.”

“…음, 역시 미친놈이군.”

호세가 답하고, 해리가 마커스를 두고 일어나면서 물었다.

“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 가서 얘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아, 지금 얼굴 꿰매고 있을 거야. 잘생긴 얼굴에 흉터가 남게 될 거라고 걱정하던데, 으음… 생각해 보니 너나 리나 둘 다 미친놈이니까 어울리는 단짝이 되겠어.”

“감사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해리가 활달하게 답했고, 호세가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마커스를 쳐다보며 물었다.

“섬에서의 교전이 쉽게 끝나기라도 했었나?”

“아니… 박격포가 몇 발 떨어졌어. 거리 오측이라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지금 수술 중이었을 거야.”

“근데 저놈은 왜 저래? 힘이 넘치는데……. 어려서 그런가?”

“너도 어릴 때 비슷했을걸.”

“내가? 으음, 그럴 수도 있겠어. 워낙에 사교적이기도 했으니.”

“…미친놈.”

“흐흐, 굳이 비 오는 갑판에 앉은 너도 미친놈에 어울리는 거 아나? 일어나, 들어가서 편하게 쉬라고. 혹시 다리에 뭐 맞은 건 아니지?”

“그건 모르겠고, 은퇴나 하고 싶은데.”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기나 해. 은퇴는 무슨 은퇴야? 네가 은퇴하면 나는? 나도 심심해서 은퇴하게 될지도 몰라.”

호세가 그러면서 마커스를 부축했고, 몇 마디 잡담을 더 나누며 함정 내 선실로 들어갔다.

쇳덩이로 이뤄진, 다소 비좁고 낮은 내부로 들어가서 옷부터 갈아입길 잠시.

간단한 응급처치 따위를 마친 팀원들이 다 모이기 시작했다.

꿰맨 뒤 거즈를 붙인 강태까지.

“새로운 전설을 쓰고도, 흉터를 걱정하는 주인공이 등장하셨군.”

호세가 웃으면서 말했고. 들어서던 강태가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이 얼굴로 뭐 얼마나 살았다고… 하, 제대로 써 보지도 못했는데…….”

“‘얼마나’라니? 너도 이제 30살이나 됐잖아?”

“그래, 나이는 30인데……. 아, 팀장님?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중국 화물선에 총알이 몇 발 박혔는데, 시끄러워지진 않았죠?”

힘없이 대꾸하던 강태가 생각났다는 듯 제이크를 쳐다봤다.

급해서 일단 쏘고 봤는데, 50구경 탄환을 쏜 만큼 화물선에 총구멍이 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이에 총기 분해 후 정비하던 제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연락은 없지만, 신경 쓰진 않아도 될 거야. 지휘부에서 널 각별히 신경 쓰거든.”

“아, 그래요? 거, 다행이네요. 뭔 지랄을 할까 싶었는데…….”

“혹시 국방부로 옮길 건가?”

“제가요? 왜요?”

“이제 네게 그만한 대우를 해 줄 테니까. CIA에서도 명함 대신에 무한도 카드를 가져올 거고.”

그 말에 모든 팀원의 시선이 몰리는 사이, 강태가 고개를 저었다.

“안 가요.”

일말의 고민도 없는 답에 호세가 바로 대꾸했다.

“설마 우리 있다고 그러는 거 아니지? 네가 원한다면 국방부가 아니라도, CIA든 뭐든 더 해 줄 텐데. 우리 소속을 다 옮기는 것도 가능할걸?”

“나중에 갈 수도 있는데, 지금은 하던 일이 있잖아.”

“작전? 다 끝났… 아, 그 이탈리안 테러범?”

“그래, 근데 뒤에 더 있을 거야.”

호세의 말에 강태가 답하자, 지켜보고 있던 해리가 빠르게 답했다.

“그럼 뒤에 더 있다는 건 지안드로 바시카날의 동료나 그의 윗선, 아니면 배후겠군요.”

“그래, 배후.”

대답하는 강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핵 개발도 지연시켰고, 더불어 그 목적을 향해 한발 더 나아간 덕분이었다.

과정은 지저분했으나, 결과적으로 잘 풀리고 있었다.

물론 관련 정보에 대해 아직 들은 건 없지만, 그것도 머잖아 알게 될 것이었다.

인질을 생포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고, 커지는 만큼 미국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파이나 내통자 따위를 심어 둔 지안드로나 피칼도 뭔가를 알게 될 수도 있으나, 이는 감안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게임처럼 조용히 흘러가면, 엔딩처럼 핵전쟁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강태가 볼에 붙은 거즈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 얼굴로 인생 좀 제대로 살아봐야지, 씨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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