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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39화 (139/185)

139화

스텔스 고속 단정은 쾌속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계기판에 표시된 수치나 물결을 타고 넘어가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몸이 받는 압력이 달랐다.

화물선에서 내린 뒤, 타릴 제도로 접근했던 때와 다른 적잖은 힘이 몸 전체에 가해지고 있었다.

더불어 울렁거리는 뱃속 감각이나 두통도 좀 더 심해졌다.

일종의 멀미.

어지러움에 강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수 미터의 파도를 뚫는 느낌이 전신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서 알았다.

침투할 때와 달리, 한계 속력인 60노트, 시속으로 약 111㎞에 근접했다는 사실을.

처음에 투입할 때, 신무기 시연회나 박람회를 하듯 옆에서 이것저것 알려 줘서 아는 사실이었다.

그 외에도 스텔스 고속단정에 대한 제원을 꽤 많이 들었다.

얼마나 빠른지, 몇 미터 이상의 너울을 버틸 수 있는지, 방탄 성능을 포함한 내구도는 얼마나 좋은지, 그 외의 기능은 뭐가 있는지.

그때만 해도 새 장비를 체험하는 느낌이라, 접대겠거니 그러려니 했었다.

날씨 역시 비바람이 몰아칠 정도로 나쁘기는 해도, RIB 고속 단정이나 IBS로도 침투가 가능한 정도였고.

쉽게 말해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스텔스 고속 단정이 미국 해군 신무기의 주력 상품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 속도로, 이 날씨에, 전복되지도 않고 미친 듯이 질주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차이도 좁혀지고 있었다.

- 타깃과의 거리 2.8마일(약 4.5㎞)!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할 무렵.

그 뒤로 이어지는 무전에 주춤하고 말았다.

- 미식별 화물선 육안 확인! 타깃 해당 선박으로 접근 중!

“벌써?”

한국말이 절로 나왔다.

내 생각보다 시점이 빠른 탓이었다.

해상에서 가까이 접근해 생포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함께 있던 호세도 같은 생각인 듯 중얼거렸다.

- 제기랄, 벌써 화물선이 나와? 빌어먹을 화물선 경로도 바꾼 모양인데?

“이러면은…….”

그 뒤에 나오던 대답이 절로 흐려졌다.

핵 개발 연구원 생포는 물 건너가고, 사살로 가닥을 잡아야 하는데, 그것 역시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리와 환경 모두 최악이었으니까.

상황이 이대로 흘러간다면, 땅에서 진행해도 쉽지 않은 초장거리 저격을 비바람 치는 해상에서 하게 될 게 분명했다.

핵 개발 연구원이 탄 보트가 중간에 뒤집어지지 않는다면, 필히 그렇게 해야 할 터.

그걸 아는 호세의 목소리가 무겁게 닿아 왔다.

- 리, 이번에도 네가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

말하는 그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말투도 좀 더 무거웠다.

왜 그런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내게 부탁해야 하는 일이 가능성을 물어볼 정도로 어려웠으니까.

정확히는 해상에서의 초장거리 저격.

그것도 널리 알려진 저격 기록보다 더 먼 거리를 쏴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멀리 있는 표적을 맞힌 적은 많았다.

해리 삼촌네 휴경지에서 그리고 국무부가 준 땅에서 사격 연습을 해 봐서 자신도 있었다.

다만, 조건이 너무 달랐다.

여기는 삼각대로 관측경을 세울 만한 공간이 없었고, 엎드릴 수 있는 잔디밭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서서 쏠 때 총을 거치할 만한 벽체가 전부.

그나마도 양각대를 제대로 펼 수 없었다.

이건 저격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신속 기동을 위해 만들어진 9인승 고속 단정이었으니까.

또한 비바람이 불고, 파도까지 치는 상황이었다.

쉽게 말해 저격에 불리한 모든 악조건을 이겨 내야 하는 셈.

그중에서도 최악은 두 명을 쏴야 한다는 거였다.

자칫 잘못하면 둘 다 놓칠지도 몰랐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

호세가 가능하겠냐고 물어볼 만했다.

내가 잘 쏘기는 해도,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호세와 같은 생각인지, 나를 바라보는 데브그루 대원들의 얼굴도 심각했다.

위장 크림 위로 젖은 흙과 풀떼기가 묻어서 참혹하다 느낄 무렵.

늦기 전에 답해 주었다.

“해야지.”

다른 대답은 내 선택지에 없었다.

애초에 그나마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기도 했거니와, 핵 개발 연구원을 이대로 보내 줄 마음도 전혀 없었다.

핵미사일 개발을 더더욱 늦춰야만 했다.

이미 세르게이를 비롯한 악역을 제거하면서 늦어졌을 거라고 추측이 됐지마는, 그걸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핵심 인력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일을 벌이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물론 저격 타이밍이 나쁜 만큼, 육상에서 잡을 수도 있겠지마는, 그건 다른 이유로 불가능했다.

핵 개발 연구원이 갈아타려는 선박이 중국의 화물선이고, 그 화물선의 목적지가 다름 아닌 흑해의 노보로시스크(Novorossiisk)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러시아.

즉, 북한에서 중국, 중국에서 러시아로 이어지는 아주 개같은 루트였다.

지금 해상에서 처리하지 못하면 중국 화물선을 상대로 수작을 벌이든지, 흑해의 러시아 영토로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

고로, 내가 할 일도 하나뿐이었다.

핵 개발 연구원이 중국의 화물선으로 오르기 전에 먼저 처리하는 것.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침투나 암살 작전을 벌여야 하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물론 내가 플레이 했던 라레플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긴 했는데, 다시 하고 싶진 않았다.

너무 많이 죽고, 또한 죽여야 해서.

이에 늦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일단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최대한 접근해 보고, 타깃이 정지하고 화물선하고 접촉할 때 우리도 정지하는 걸로 합시다.”

-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호세가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사이, 데브그루 대원으로부터 단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 알겠습니다, 에코 10.

그 대답을 듣고서 나도 저격을 준비하려던 때였다.

쿠우우웅─

멀찍이서 폭음이 들려왔다.

우리가 떠나온 타릴 제도에서 들려온 것이었고, 그 뒤로 빗소리에 옅어진 총성도 전달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교전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심 우려가 돼서 그랬다.

패배 같은 것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이기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G&G Corp TF부터 빼어난 데다가, 현역 데브그루 요원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센 전력이었으니까.

특히 그들을 지휘하는 제이크는 델타포스에서도 전설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힘만 센 괴물이 아니었다.

특수전의 대가였고, 리더의 자질을 가진 남자 중의 남자.

그라면 마땅히 이길 게 분명했다.

하나, 다칠 가능성이 있어서 우려가 됐다.

베테랑이든, 신병이든 눈먼 총알이나 파편 따위에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기도 하니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총상을 입은 어깨를, 그것도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꿰맸었다.

거기 말고도 자잘하게 다친 부위가 많았고.

심지어 지금은 보병끼리의 총격전이 아닌, 몰살의 위험이 있는 박격포를 상대로 교전 중인 상황이라 더 위험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저 안에는 내가 없었다.

아무래도 상황 정리가 좀 더 늦어질 거고, 늘어난 시간만큼 누군가 죽거나 다칠 확률도 높아질 터.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들이 안 좋은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으나, 그마저도 털어 내야 했다.

추가로 무전이 들어온 탓이었다.

- 에코 10, 타깃과 화물선 접촉했습니다. 타깃과의 거리는…….

잠시 말끝이 흐려지다가 숫자와 단위가 묵직하게 깔려 나왔다.

- 2.4마일(약 3.8㎞)입니다.

“…존나게 머네, 씨팔 거.”

한국 욕이 절로 나왔다.

정말 세계 최장거리 저격 거리보다 더 멀리서 쏴야 하는데, 그것도 한참이나 뛰어넘은 탓이었다.

그래도 당황해서 내빼진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지만, 나도 나름 준비해 온 비장의 한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장거리 저격에 입문하면서 사용했던 TAC-50.

50구경 탄환을 쓰는 볼트 액션식 저격 소총으로, 방금까지 사용했던 반자동 저격총인 MK.20보다 더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 맞힐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게 이 고속 단정에 있었다.

정확히는 화물선에 탈 때부터 갖고 왔던 그리고 내릴 때 고속단정에 옮겨 실었던 총기였다.

한 번도 꺼내 쓰진 않았지만, 내내 갖고 있었다.

예전에 세르게이에게 당할 때 HK416만 들고 가면서도 초고배율 스코프를 챙겼듯.

혹시 몰라서 챙겨 온 것이었다.

총기와 별개로 방독면이나 예비 필터도 마찬가지였고.

이에 케이스를 열면서 말했다.

“완전 정지하고, 문 개방합시다.”

속도가 줄어들던 고속 단정이 완전하게 멈췄다.

그리고 문이 열렸고, 케이스에서 꺼낸 TAC-50을 들어서 사격 준비에 들어갔다.

반사적으로 약실을 확인한 뒤, 장전과 조준에 앞서 MK.20에 있던 탄도 계산기를 레일에 부착했고, 거리를 입력하고 데이터 값을 받아 냈으며, 스코프 터렛을 돌려서 조정했다.

아니면 하늘을 보고 총을 쏴야 할 터.

이어서 장전하고 견착, 조준하고 스코프에 접안하고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얹었다.

당장이라도 쏘고 싶었으나, 조금 기다렸다.

파도로 인해서 몸이 계속해서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는 데다가, 타깃 역시 모습만 드러냈을 뿐 아직 사다리를 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2명을 다 맞혀야 하는 만큼, 두 사람이 전부 사다리를 타고 있을 때 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무 같은 장애물이 없다는 사실뿐.

물론 장점 같진 않았다.

기준점이 되어야 할 바다가 고정되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후으…….”

명사수 특성 덕분에 숨을 고를 필요가 없음에도 절로 긴 호흡이 흘러나왔다.

지상에서도 그리고 화물선에서 MK.20으로 사격 연습을 꽤 했음에도, 신경 쓰이는 게 많아서 그랬다.

특히 타이밍이 맞아야 하는데, 그걸 잡기가 어려웠다.

반자동 저격총인 MK.20은 빗나갈 것도 고려해서 탄창을 싹 비울 만큼 쏴도 되겠지만, TAC-50은 쏠 때마다 장전을 해야 하는 만큼 속사도 쉽지 않았고.

연달아 쏜다고 해도 잘해야 2~3번, 많아야 4번 정도가 한계였다.

그 이상 장전하게 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표적의 반응으로 인해 오히려 명중률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이에 몇 분이 흐르는 듯한 몇 초가 지날 무렵.

연구원 둘 중 하나가 먼저 사다리에 올랐고, 그 뒤로 한 명이 더 움직였다.

검지에 힘이 들어갔다.

쏴야 할 모든 타깃이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검지에 압력을 가하는 순간까지도 맞힐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하나도 어려운데, 둘이나 쏴야 했으니까.

내가 예상하지 못한 돌풍을 만나거나 날아가는 중간에 거센 폭우라도 끼어들면 탄이 스쳐 가거나 빗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쐈다.

나한테는 지금밖에 없었으니까.

텅―! 철컥!

격발 후 바로 노리쇠를 후퇴 전진 해서 약실에 탄을 장전했고, 반사적으로 탄도 계산기에 뜬 측풍 속도를 확인하면서 총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두 번째 타깃을 향해 쐈다.

터─엉! 철컥!

반사적으로 다시 장전하면서 깨달았다.

눈알만 굴려서 탄도 계산기를 확인하고, 숙련된 동작으로 쏘는데도 조금 늦었기 때문이었다.

총구를 살짝 움직이는 것도 시간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쏴야 했다.

터어엉―! 철컥!

반사적으로 재장전하고, 탄도 계산기를 확인하면서 또 총 손잡이를 쥐었다.

물론 반사적으로 움직일 뿐, 현실적으로 맞히기는 힘들었다.

이미 초탄을 쏜 뒤로 1초가 넘어갔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식으로든 인위적으로 움직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탄에 맞든, 스치든, 빗맞든.

떨어지거나 더 빨리 올라가게 될 거고, 내가 지금 쏜 탄도 아마 맞지 않을 것이었다.

확률이 있어도 희박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구경하듯이 안 쏠 순 없었다.

그래도 쏴야만 했다.

추상적인 앞날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앞으로 살날이 달려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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