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발이 붓다 못해 물에 불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호우 경보 수준으로 비가 쏟아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걷고 있는 지면에 바닷물이 자잘하게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섬 깊숙이까지.
여기서 자라는 나무들은 염분을 처먹고도 어떻게 자라나 싶었는데, 돌아보니 라레플을 플레이 하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냥 그러겠거니 하고 플레이에 열중했었다.
물이 찰박거려도, 비가 내려도, 쉬프트 키와 이동 키를 누르면 캐릭터는 바로 전력 질주로 뛰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날씨 때문에 작전을 못해 먹겠다는 건 아니었다.
나는 괜찮았다.
명사수 특성 덕분에 형체만 보여도 즉각 사격이 가능했고, 특급 체력의 효과로 악천후에도 몸은 멀쩡했으며, 강철 멘탈이 정신적인 위기도 막아 줬으니까.
‘…개인전이면 모르겠는데, 팀전이 문제지.’
시선이 앞뒤로 있는 우리 팀과 데브그루를 훑게 됐다.
그들은 특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악천후에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비바람에 체력이 빠질 거고, 총구는 흔들리며, 끝내 굳건한 정신력도 부담을 받게 될 것이었다.
적이 기습이라도 가하면 견디기 쉽지 않을 거였다.
미군이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면하겠지마는, 그사이에 누가 죽고 다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내 몸에 도비탄이 박힐지도 모른다.
그것도 머리통을 뚫을 가능성도 있었다.
함정을 파 놨다면은, 천하의 미군을 속였다는 뜻일 테니까.
그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걷던 와중에 드디어 선두부터 걸음이 멈췄고, 새 명령이 하달됐다.
- 여기는 범고래. 전원 정지. 각 팀별 위치로 이동해.
그 말에 수십 명의 데브그루 대원들이 흩어졌다.
통신 음어상 범고래로 정해진 지휘부를 기점으로 부채꼴처럼 퍼진 것이었다.
물론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설명을 들어서 연상이 됐다.
지형이 익숙하기도 했고.
여기서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예상도 됐는데, 내가 알던 시나리오하고는 딴판으로 달랐다.
그게 제법 신기할 정도.
‘…이게 이렇게 쓰이는구나.’
게임에서는 그냥 배경처럼 있던, 현지 소형 어선의 정박지가 배 갈아타기의 작전지역이 됐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경유지였다.
화물선에서 내린 타깃이 정박지에서 머물다가, 약속된 배에 다시 올라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북한이라는 출발지를 세탁한다는 소리.
우리는 그 중간 기점이자, 경유지가 될 타릴 제도에서 타깃을 잡겠다는 거였다.
가능하면 생포, 불가능하면 사살.
현재로서는 아주 완벽한 작전으로, 생포할 확률이 높았다.
날씨만 지랄 맞을 뿐, 작전 전부터 진행 중인 지금까지는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여기가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여러모로 신경을 좀 썼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별탈 없이 시간만 길어지고 있었다.
30분, 한 시간, 두 시간, 자정을 훌쩍 넘기더니, 어느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해가 뜨는 것이었다.
‘밤보다는 낫긴 한데…….’
중얼거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비가 그치지 않았고,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야투경을 벗긴 했으나, 먹구름 때문에 시계는 여전히 흐렸고.
은근한 추위를 견딜 무렵.
예상했던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 5시 방향, 1마일 거리에서 미식별 열 반응 확인, 반복한…….
무전 내용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정확히는 함정을 염두에 두고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했던 동작이 나오는 것이었다.
순식간이었다.
들여다본 스코프 너머로 반사광도 보였고, 머리가 반사적으로 낙차를 고려해서 오조준했다.
선상에서의 저격 훈련이 고스란히 이어진 듯.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 * *
지안드로가 고용한 암시장의 저격수 중 한 명인 히스패닉계 40대 중반의 사내가 열 영상 스코프를 보다가 인상을 썼다.
목표물이라고 전달받은 강태를 구분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야간이라서 야간 투시경을 내려 썼고, 심지어 심각한 폭우까지 쏟아지는 와중이라 알아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에 고민하던 그가 결국 선택을 내렸다.
“하…….”
한숨과 대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고용주와 통화 가능한 위성 전화를 갖고 있긴 하지만, 이건 길거리에서 전화하듯 핸드폰처럼 아무 때나 쓰는 게 아니었다.
단 한 번, 임무가 끝났을 때 써야 했다.
성공하거나 실패했을 경우.
그리고 지금은 둘 다 아닌, 아직 방아쇠도 당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1차적으로 목표물이라도 알아봐야 했다.
그래야 저격에 실패하더라도, 대기 중인 박격포가 해당 지점을 초토화시킬 테니까.
“정말 아쉬운 일이군. 타깃이 코앞 어딘가에 있는데 누군지 몰라 죽일 수가 없다니.”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다 쏘고 싶지만, 다 죽일 수가 없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더구나 여러 개의 팀으로 쪼개진 상황.
무리해선 안 됐다. 선을 지켜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다 말아먹을 수도 있었다.
쉽게 말해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고, 모아 놨던 돈도 쓰지 못한다는 소리.
다행히도 사내는 정도를 벗어나는, 실수하는 어정쩡한 특수부대 출신과는 격이 다른 진짜배기였다.
죽음이 드리운 암시장에서 무려 십수 년을 살아남은 용병이고, 동시에 남미 최고의 특수부대인 브라질 BOPE(Batalhão de Operações Policiais Especiais: 경찰특수부대)의 저격수 출신.
2004년도에 대대적인 감사 과정에서 뇌물과 횡령이 발각되어 옷을 벗었지만, 그 출신만큼은 뼛속에 각인되듯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에 기다리기로 결심한 그가 좌우를 돌아봤다.
육안이나 스코프로 확인할 순 없으나, 약 1~2㎞ 정도 떨어진 곳에 팀으로 활동 중인 동료들이 대기 중이기 때문이었다.
둘 다 남미계 특수부대 출신이고, 업계 구력도 각각 10년 정도 되는 베테랑들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도 마찬가지로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었다.
만약 찾았다면 진즉에 무전을 했을 터.
틱, 버튼을 누른 사내가 쏟아지는 빗속에서 목소리를 깔았다.
“일출로 시야 확보 가능해질 때까지 대기하도록 해. 특이 사항 발견 시에 말하고.”
앞으로 8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해가 뜨면 얼굴의 생김새가 더 잘 보이고, 야간 투시경도 올리면서 확인이 더 쉬워질 테니까.
안 그래도 지난 1주 내내 여기에 숨어 있었다.
생리 현상도 안에서 전부 해결했고, 식사도 가져온 최소한의 식사 대용 칼로리 바와 식수로 버텼었다.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자뒀으므로, 두 눈을 뜬 채로 자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새벽녘이 될 즈음.
사물의 윤곽이 드러나자, 사내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리던 야간 투시경을 벗은 덕분이었다.
“이제 좀 낫군.”
먹구름과 비바람으로 시야는 여전히 흐렸으나, 백인 혹은 흑인의 얼굴 정도는 보이기 시작했다.
등지거나 매복해서 확인이 불가능한 사람도 있어서 모두를 구분할 순 없었지만, 야간 투시경도 없는 얼굴로 인종을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죽여야 하는 표적이 흔한 백인의 얼굴이 아니라, 눈에 띄는 아시안이라 더더욱 할 만했다.
이에 눈매를 좁히던 무렵.
드디어 타깃으로 보이는 대상이 드러났다.
엄폐물로 삼은 듯한 나무 때문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근처에 바이킹 같은 백인이 보여서 짐작할 수 있었다.
미리 들은 정보였다.
표적인 아시안과 함께 다니는 동료들도 얼추 보였다.
‘여자만 있으면 확실한데… 아쉽게 아예 보이지 않는군. 저 덩치 큰 백인, 흑인은 딴 놈과 비슷하게 생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확신을 갖기 위해 좀 더 집중하던 순간.
치직―
무전 잡음과 함께, 함께 대기 중인 동료에게서 기다리던 소식이 들어왔다.
바로 타깃 발견.
구체적인 위치와 외형을 듣던 사내가 멈칫했다.
“내가 보는 것과 같은데, 각도가 잘 나오지 않아. 거기서는 각도 확보되나?”
- 나쁘진 않은데, 확실하지 않아.
“어떤데?”
- 어깨 한쪽, 상체는 2분의 1정도 보여. 그것도 비 때문에 맞을지 모르겠어.
“…나쁘진 않은데, 확실하진 않군.”
사내가 동료의 말을 반복하게 됐다.
말마따나 상체가 온전하게 보이면 맞힐 가능성이 높은데, 반이나 가려지면 그만큼 빗맞을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금세 무전으로 말이 건너왔다.
- 네 쪽에서는 얼마나 되겠어? 초탄 놓치면 맞힐 수 있겠어?
“상황을 봐야 하지만, 쉽지 않아. 타깃이 숨게 되면 바로 계획 B로 가야 해.”
계획 B.
직접 저격이 불가능할 경우, 박격포로 압살하는 작전이었다.
물론 박격포가 쏘기 좋게끔 저격수 팀은 양치기 개처럼 적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안으로 몰아넣어야 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보이는 놈들만 사살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숨기 때문이었다.
특히 훈련받은 군인일수록 잘 숨었다.
저격수 앞에서는 은‧엄폐가 기본이었으니까.
물론 보병 사이에도 지정사수나 저격수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고, 있다면 분명 반격할 것이었다.
그러나 걱정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됐다.
필요할 때는 목숨도 걸어야 했다. 그가 암시장에서 괜히 유명한 게 아니었다.
그만큼 실력과 배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스코프를 들여다보는 순간.
“……?!”
사내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변화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스코프 안의 저격 대상들이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응사하는 모습.
그러나 초탄 사격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미친……!”
그의 입이 절로 열렸다.
스코프 속에 있는 여러 명의 인원, 그중에도 타깃으로 의심되는 아시안이 동료가 있는 방향으로 총구를 겨누었기 때문이다.
놀란 그가 무전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터엉― 터엉― 터엉―
빗소리를 뚫고서 묵직한 총성이 연달아 들려왔다.
당황한 그가 주춤한 사이.
치직.
무전기 소리와 함께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웅얼대는 듯.
“뭐, 뭐라고? 이봐, 뭐라고 하는 거야?”
급하게 되묻던 그가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말이 아니었다.
- 으어억…….
신음이었다.
그것도 죽음을 맞이하는, 숨이 멎어 가는 소리였다.
“……!”
사내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설마 방금 전의 사격에 당했다고?’
적과의 거리가 최소 1.5㎞가 넘었고, 2주간 은‧엄폐했으며, 스코프를 들여다보며 감시하던 것도 그의 동료였다.
급하게 총구를 돌려서 쏜다고 맞을 게 아니었다.
1~200미터가 아니라, 1~2㎞였으니까.
한데 쏘지도 못하고 당하다니?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이 그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조용히 기어 온 적에게 당했다든가, 아니면 독사한테 물렸다든가, 그도 아니면 뇌출혈이 왔다든가 하는 것들.
그러나 생각은 구체화되지 못했다.
숱한 전장의 경험으로 그리고 본능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의 총성이 사망 원인이라는 것을.
“이런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