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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28화 (128/185)

128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래그(Fort Bragg).

약 20분간의 영상 보고가 끝나고 화면이 꺼지자, 필립 애드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화면을 보고 주춤했던 것도 잠시, 현실을 깨닫고 크게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호흡 조절이나 마인드 컨트롤 같은 건 전혀 소용없었다.

마주한 사람이 연대장이나 사단장 같은 고위급 상사도 아닌, 그보다 한참 위에 있던 국방부 장관인 탓이었다.

미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기구를 관리, 감독하고 책임지는 인물이면서 미국의 안보와 세계 군사 전략 한가운데 있는 사람.

그와 1 대 1로 대면해서 직접 보고했고, 심지어 몇 가지 질의응답을 한 뒤 의견까지 말했다.

이는 필립에게 있어서, 임관 이후 최대의 고비면서 또한 기회였던 순간이었다.

일개 중위가 맞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영관급도 당연하고, 장성급들도 국방부 장관과 단둘이 대화할 기회는 드물었다.

군인이 아닌 다른 고위직 인사들도 마찬가지.

뒤늦게서야 언뜻 인지했던 스크린 속 상황도 상당히 바빠 보였었다.

‘아마 항공기였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가, 한참 지난 나중에서야 알아차린 거였다.

비행기 같은 내부, 서류를 갖고 오고 귓속말을 옮기는 비서들.

그 속에서 보고와 질의응답이 있었다.

무려 20분이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필립이 꺼진 스크린 앞에서도 발을 떼지 못하고,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이유.

국방부 장관의 말 한 줄 때문이었다.

‘현재 임무를 지속할 수 있습니까?’

그 뒤로 출장이나 파견, 고난도 임무의 가능성이 덧붙었으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할 수 있냐는 물음 그 자체였다.

해석하자면 해 오던 걸 계속해서 하겠냐고 의향을 묻는 것이었으나, 필립은 다르게 이해했다.

애초에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불가능했다.

국방부 장관이 고작 그걸 묻자고 일개 중위를 직접 부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필립의 임무 대상이 포트 브래그의 시설 대부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생체 실험이 의심될 만큼 초인적인 사격술을 가진 강태였다.

그 모든 걸 종합하면, 결론은 하나였다.

해야 한다는 것.

그 외에 답은 없었다.

국방부 장관이 직접 묻는 일생일대의 기회이면서, 동시에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필립은 국가 안보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싶은, 나중에는 장군이 되어 명예롭게 퇴역하고 싶은 혈기 왕성한, 능력 좋은 젊은 장교였다.

‘그래, 펜타곤에서 고작 안내나 맡기려고 연락 장교를 파견할 리가 없지. 특별 관리가 필요한 일이니까, 그것도 장관이 직접 신경 써야만 하는…….’

그 생각 뒤로 필립의 가슴이 뛰었다.

이번에는 긴장이 아닌, 기대로 인해 흥분해서 뛰는 박동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제대로 아는 거라고는 강태를 안내 및 감시하는 임무밖에 없었지만, 필립은 그것만으로도 좋게 생각했다.

강태가 의심할 만한 외부인이 아니라, 초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행실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인간적으로도 괜찮았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리와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장관도 그걸 바랐던 것처럼 말했고…….’

그렇게 국방부 장관과의 대화를 떠올릴 무렵.

우우우웅─

필립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저장되지 않은 사무실 번호에 주춤했으나, 현역 장교인 필립으로서는 전화를 무시하거나 미룰 순 없었다.

그렇게 통화를 수락한 순간.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적잖이 놀랄 만한 말이 들려왔다.

- 여기는 국방부 장관 비서실입니다. 필립 애드먼 중위 맞습니까?

“아, 네. 접니다.”

- 반갑습니다, 연락처 확인하고, 간단한 전달 사항 알려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좋습니다. 말해 주십시오.”

- 애드먼 중위는 계속해서 표면적으로 연락 장교의 임무를 수행하되, 내일부터는 교육대대장 예하로 배속되어 필요한 훈련 일과를 모두 수행해야 합니다. 앞으로 최소 2주, 길면 언제까지 지속될 지 모릅니다. 미스터 리의 방문 시에만 훈련에서 열외되고, 관련한 상세한 내용은 교육대대장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좋다고 가볍게 대답했던 필립이 주춤했다.

“훈련 일과라는 게… 저도 같이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까?”

- 그렇습니다.

간결한 답에 필립이 아주 잠시 주춤했다.

그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펜타곤에서 파견 오게 된 부대가 포트 브래그라는 훈련소였으니까.

그것도 기초 군사 훈련과는 거리가 먼 공수 및 특수전 훈련을 하게 되는 장소가 이곳이었다.

어쩌면 공수 레펠이라던가, 필요한 특수전 훈련을 수행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도 아예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수료해 본 것도 있었고.

다만, 지금은 따질 게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필립이 단단하게 대답했다.

미 육군 장교로서 명령을 받았으니, 마땅히 수행해야만 했다.

그게 아니어도 해야만 했다.

앞으로도 초인 같은 강태를 담당해야 하고, 행정 작업 외에 현장에 나가게 된다면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야 할 곳이 어디든.

* * *

리비아, 트리폴리(Tripoli) 중심지의 특급 호텔 객실.

“아쉽군…….”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던 지안드로가 말을 중얼거렸다.

저격수와 박격포 사수, 자폭용 드론 조종사 여러 명을 준비한 가운데 빠진 게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능한 현장 지휘관.

정확히는 지안드로의 명령을 이해하고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 그리고 특수전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 없었다.

굳이 꼽자면 지안드로 본인뿐.

그러나 직접 갈 순 없었다. 가선 안 됐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작전이긴 해도, 완벽하다고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불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늘 마시던 에스프레소도 실수로 흘리거나 엎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보다 더 정교하고 복잡한, 여러 명이 합을 맞춘 작전은 더한 변수가 잠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안드로가 현장에 절대 나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사전에 모든 걸 통제한다고는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물론 작전지역으로 그의 오른팔이자, 전직 장교였던 수하를 보낼 예정이지만, 그는 훌륭한 지휘관이라고 하기에는 경험이나 능력이 조금씩 부족했다.

그래서 아쉬워하고 있었다.

현장으로 보낼 만한, 그러나 보낼 수 없는 사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세르게이 볼코프…….’

비록 죽긴 했지만, 그는 현장에서 알아주는 지휘관이었다.

그 끝이 팀의 전멸이었고, 본인마저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사망했다는 게 우습지만, 어쨌든 과거의 공적만큼은 지안드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역이었던 알파 시절에도 그렇고, 전역 후에 피칼을 위해 일할 때도 마찬가지.

특히나 지금은 꽤 중요한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종의 이중 작전.

핵 개발 연구원을 데려오면서, 동시에 간섭하는 강태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말이 간단하지, 아주 정교한 약속들로 이뤄져 있었다.

화물선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고, 하선할 무인도의 위치는 어느 쪽인지, 연구원이 배를 갈아탈 시점과 방법, 라디오 암호를 비롯한 오리지날 수신호까지.

심지어 준비 이전에 밑밥도 뿌리고 있었다.

예컨대 거짓이 섞인 정보들.

밀항 일자나 루트, 갈아탈 화물선 등등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흘렸다.

대북 정보력이 높은 한국이 반응하고 있었고, 정보 공유 중인 미국 역시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한발 앞서가고 있었다.

그것도 함정을 파둔, 무대가 될 장소로 알아서 들어오는 것이었다.

바로 타릴 제도.

죽은 세르게이의 흔적을 쫓아 미국이 접근했던 바로 그곳이 무대였다.

* * *

이튿날, 늦은 밤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 본관.

해외, 대북 담당인 제1차장은 근래 북한의 새로운 동향 파악과 분석으로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였다.

사무실의 소파에서 쪽잠을 4시간 잤고, 중간중간 낮잠을 자면서 업무 중인 상황.

도저히 쉴 수가 없었다.

북한의 핵 개발 연구원과 관련된 내용이 첩보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고, 거짓이라면 왜 거짓인지, 사실이라면 어디까지 연관된 것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으므로, 대통령 보고도 최단 시간에 이뤄질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는 정체되어 있었다.

“이 빨갱이 새끼들이…….”

며칠간 뼈 빠지게 수집한 기존의 휴민트 정보로 턱도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체적인 확인이 어려웠다.

핵 개발 팀원 한 명이 화물선을 통해 빠져나가고, 공해상에서 바꿔치기 된다는 말만 있을 뿐.

이유가 뭔지, 왜 그러는지는 전혀 없었다.

이에 그간 미뤄져 오던 대북 침투까지 고려하려던 무렵.

띠리리리─

사내 인터폰이 울리면서 LCD 화면에 휘하 팀장 번호가 떠올랐다.

달칵, 제1차장이 받자마자 멈칫했다.

- 차장님, 미 동부에 있던 저희 측 정보원 하나가 구금됐고, 펜타곤에서 관련 자료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뭐? 정보원?”

- 예,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 인근에서 군 헌병에게 체포되어 수사받는 중이고, 그 과정에서 국정원이 언급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씨발, 그게 무슨 개소리야? 포트 브래그? 군사 훈련소 말하는 거야?! 거길 왜 가?”

- 예? 차장님께서 재가하신 사안이라고…….

“무슨 개소리를……!”

대답하던 제1차장이 움찔하고 말았다.

“…아.”

불현듯 떠오른 것이었다.

물론 미 군사시설 접근 같은 걸 허락한 건 아니었다.

최근에 올라온 조범용의 보고서에서 ‘포트 브래그’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제1차장도 바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강태의 노스캐롤라이나주 별장에 대해 서술하면서, 인근에 위치한 군사시설까지 리스트업 해 왔던 거였다.

별것 아니었다.

한데 그게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고 있었다.

리스트업 했던 단어 하나가 수십년 국정원 생활을 해 왔던 제1차장의 뇌리에 스쳐 간 것이었다.

“정보원 신상명세 보내고, 조범용 불러와.”

- 예? 조범용 요원 말씀이십니까?

“어. 당장 데려와!”

덜컥.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구금됐다는 정보원의 간단한 신상명세가 도착했고, 이어서 30초 만에 전화가 울렸다.

제1차장이 찾던 조범용의 연락이었다.

“너 어디야?!”

제1차장이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고, 동시에 주춤하며 답이 건너왔다.

- 지금 김포 쪽에서…….

“김포?”

- 예, 타깃의 집과 부대가 근방이라 현장 조사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냐?”

- 네?

조범용의 음성이 움찔하듯 건너오자, 제1차장이 도착한 정보원의 신상명세를 보며 말했다.

“타깃한테 정보원 붙였어? 마이클?”

- 아?! 그걸 어떻게…….

“쯧…….”

조범용의 놀란 대답에 제1차장이 혀를 찼다.

조범용이 직접 미국까지 가긴 어려우니, 해외에 있던 정보원에게 미행을 시켰고, 그가 포트 브래그 근방까지 가서 잡힌 것이었다.

즉, 상황이 썩 안 좋게 꼬였다는 의미.

제1차장이 중요한 것부터 확인했다.

“마이클이란 놈이 아는 건 뭔데? 너 노출됐냐?”

- 아닙니다, 저와 관련된 건 전부 가명으로 진행했고, 국정원이라는 사실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짐작할 수는 있는데…….

“어쨌든 네 입으로 말한 건 없다는 소리지?”

- 그렇습니다, 전혀…….

“일단은… 일단은 회사로 복귀해.”

- 네, 차장님.

조범용이 답하는 동시에 제1차장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상황이 우습게 됐는데, 다행히 커다란 힌트 하나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펜타곤의 연락 그리고 포트 브래그까지.

“미 국무부에 국방부라…….”

중얼거리는 제1차장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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