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며칠 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국가정보원 본관.
“어, 들어와.”
제1차장이 문가를 향해 손짓했다.
열린 문 앞에 서 있던 전직 국제안전실장이자, 현재는 교육원으로 대기 발령 난 2급 요원 조범용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손짓에 눈치를 살피면서 자리에 앉았다.
긴장한 기색이 다문 입으로 새어 나왔다.
대기 발령이 난 이후로 본관에 무려 1개월 만에 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징계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고 국정원장부터 기획조정실장, 제1~3차장, 30여 명의 1급 요원이 차례로 바뀌고, 2급 요원인 조범용 역시 물갈이 대상이 됐을 뿐.
정권 교체 때마다 벌어지는 흔한 일인지라, 그도 얌전히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방이나 개도국 이하의 해외 발령을 짐작하던 와중이었고.
한데 새로 바뀐 제1차장이 부른 것이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제1차장이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던 무렵.
집무용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고, 마우스를 딸깍이던 그가 서류철 하나를 챙겨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냐, 앉아 있어.”
조범용도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들썩이기에, 만류한 제1차장이 응접용 소파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서류철을 까닥이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알고 왔나?”
“모릅니다.”
“전혀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조범용이 얼른 대답했다.
동시에 제1차장의 표정도 슬쩍 살폈으나, 부정적인 분위기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살피는 듯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내가 밖에 있는 동안에 일은 잘했던 모양이야? 평이 나쁘지 않던데?”
“…아닙니다.”
감사 인사를 할까 고민하던 조범용이 겸손의 답을 내놨다.
그의 말마따나 제1차장은 저번 정권에서 중동과 유럽을 도는 바람에 한국 땅을 몇 년이나 못 밟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는 소리.
이내 제1차장의 말이 이어졌다.
“잘했던데 뭘, 작년에 한번 삐끗한 거 빼고.”
“……!”
삐끗이라는 말에 조범용이 움찔했다.
그리고 해외에 있던 제1차장의 신경을 거슬렀을 만한 게 뭔지 돌아볼 무렵.
“이거 당신 작품이잖아?”
툭.
말과 함께 서류 몇 장이 응접용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조범용의 시선도 급하게 서류로 향했다.
동공이 확장되고, 눈알이 활자를 읽기 위해 좌우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한 사람의 이름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강태.
‘국무부 연줄……!’
작년 늦가을, 인천국제공항에서 멋모르고 잡아 두려 했던 그리고 독일의 병원까지 찾아가서 국적 포기를 확인했던 인물이었다.
동시에 제1차장이 말한 ‘삐끗’이라는 뜻도 알아들었다.
미 국무부의 전화.
당시에 오금이 저렸었는데, 다행히 큰 문제없이 넘어갔었다.
막상 풀어 주고 나니, 미 국무부에서도 덮고 지나가는 것처럼 조용히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질책도 거의 없었다.
말 그대로 삐끗하기만 했을 뿐, 넘어지거나 다치진 않았었다.
그리고 동시에 조범용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 이름이 왜……?’
온갖 가능성을 떠올리면서, 서류 내용을 마저 읽어 내려갈 때.
조범용을 본 제1차장이 떠보듯 물었다.
“기억나는 모양이지?”
“네, 차장님.”
“얼마나?”
바로 답했던 조범용이 그 말에 멈칫했다.
‘얼마나……?’
듣기로 보고서에 누락된 게 있거나 더 채워 놓아야 한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시선을 들자, 제1차장의 말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어졌다.
“좀 됐잖아? 얼마나 기억하지? 희석되거나 흐려진 기억은? 혹시 빼먹었던 거나 덧붙일 게 있나?”
“즉시 확인하고 보완하겠습니다.”
영문을 모르지만, 조범용이 최대한 빨리 대답했다.
그것도 말만 한 게 아니라, 하계 정장 안주머니에서 만년필까지 꺼내면서.
그 모습을 눈여겨보던 제1차장의 음성이 덧붙었다.
“접촉은?”
“작년에 귀화 과정을 확인할 때 한 번 하고…….”
“그 뒤로는 없고?”
“그렇습니다.”
“그럼 접촉한 사람은 당신이 유일하단 말이지?”
“제가 아는 한 그렇습니다.”
“흠…….”
조범용이 잽싸게 대답하고, 제1차장이 콧바람을 뿜다가 말했다.
“어땠어?”
느닷없이 나온 물음에 조범용이 움찔했다.
질문이 너무 광범위한 탓이었다.
그러나 우물쭈물해서는 안 되기에, 필요할 것 같은 말을 꺼냈다.
“…트, 특별해 보이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여유가 상당히 있었고요.”
“그건 적었나?”
“아, 아닙니다. 개인적인 주관이라서 배제했었는데, 지금 적어 두겠습니다.”
답하면서 조범용이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제1차장의 반응을 보니, 원하던 답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화가 날 때는 화를 낼 것이었다.
국정원 간부가 부하의 눈치를 보거나 화를 참는 예는 없었으니까.
곧이어 말이 더 이어졌다.
“그럼 당신이 봤을 때 말이야.”
처음과 다름없는 말투였는데, 조범용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있었다.
어투는 가볍지만, 의견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질 질문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제1차장이 바라는 답변을 해야만 했다.
눈을 번뜩이듯 바라보는 사이.
곧 말이 이어졌다.
“주한미군으로 있다가 펜타곤(The Pentagon: 미 국방부 청사)으로 간 장교가 이강태를 알아보던데… 왜 그러는 것 같아?”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조범용의 눈 밑이 떨렸다.
‘펜타곤?!’
국무부라는 단어도 놀라운데, 이번에는 펜타곤이었다.
당연하게도 짐작할 만한 건 전혀 없었다.
용병 생활을 했다는 근거가 있긴 하나, 그건 이 서류에도 정리된 내용이었다.
제1차장도 안다는 소리.
조범용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늦지 않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모른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아까 말한 거 말이야, 접촉하고 느낀 감상… 그걸 좀 더 디테일하게 정리해 봐.”
“네, 차장님.”
“그거 보완할 때까지 회사로 출근해. 일단 보직은… 좀 기다려 봐, 상황 봐야 하니까.”
“……!”
조범용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희소식이었다.
지방이나 해외 발령을 생각했는데, 갑자기 본관으로 나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보직까지 언급된 걸로 봐서는 서울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컸다.
조범용의 머리가 바쁘게 돌았다.
‘보완할 때까지 출근하고… 상황을 봐야 한다?’
아직 이해하지 못할 말에 움찔할 무렵.
제1차장이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나가면 바로 이강태부터 자세하게 알아봐. 주변을 직접 파 보든, 전화하든, 만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나가면서 카드도 가져가.”
“예, 차장님!”
작년에 알아 둔 정보로는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카드도 가져가라는 지시.
‘해외, 대북 담당인 1차장이 이렇다는 건…….’
머리를 굴리는 조범용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이강태가 해외 테러, 아니면 대북 문제에 엮여 있다는 거지. 그것도 심증이 아니라, 실증이 있을 정도로……!’
펜타곤까지 언급했으니, 이 일 역시 사이즈가 보통이 아닐 것이었다.
조범용이 한차례 입술을 씹었다.
시작부터 너무 들뜨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당장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 *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래그(Fort Bragg).
일명 그린베레, 미 육군 스페셜포스 제7특전단에 연락장교로 파견된 한국계 중위 필립 애드먼은 지휘 통제실의 연락을 받고 헬기장으로 향했다.
그가 맞이해야 하는 그리고 안내와 관찰 대상인 강태가 또 왔기 때문이었다.
벌써 여섯 번째였다.
1주일에 3일씩, 오늘로 방문한 지 2주 차가 끝나는 날이었고.
투두두두두두두두─
MD 500의 민수용 버전인 500C가 풍압을 만들어 내며 착륙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간 필립이 완전하게 내려앉는 걸 보다가 직접 헬기 문까지 열어 줬다.
반가운 기색까지 담아서.
“미스터 리, 어서 오세요! 오늘은 조금 일찍 왔군요.”
“올 때마다 기대가 돼서 말이죠.”
“하하하, 저도 기대가 되네요. 커피부터 하시겠습니까?”
필립이 남아 있는 프로펠러 바람에 얼굴을 구기면서도 웃음을 머금었다.
강태가 한국의 핏줄이라서, 혹은 위에서 보낸 손님이라서 반가워하는 게 아니었다.
진심을 담은 환영이었다.
물론 강태를 처음 봤을 때는 기꺼워할 수가 없었다.
주어진 일이 형편없기 때문이었다.
한국계라는 이유로 차출됐다고, 정말 같잖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엘리트로서 복무 중인 펜타곤에서, 포트 브래그에 연락장교로 파견되어 한다는 게 고작 안내에 불과했으니까.
한데,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강태는 동료가 되고 싶을 정도로 아주 훌륭한 군인이었다.
한국에서 이미 전역했고, 지금은 용병이 되었으나, 그와 별개로 말과 행동이 모두 천상 군인의 것이었다.
특히 훈련에 임하는 태도가 그랬다.
그만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참여하곤 했었고, 하는 동안에 다른 군인들을 존중하기도 했었다.
종종 모난 이들은 실력으로 짓눌러서 둥그스름하게 만들어 줬고.
그리고 실력을 보면서 깨달았다.
자신에게 배정된 일은 전 미군에서 손꼽을 만큼 중요한 거고, 강태 역시 별 볼 일 없는 외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수한 정도가 아니라, 말도 안 될 정도로 대단한 탓이었다.
봐도 봐도 믿기질 않았다.
충분한 조준 사격이 필요한 200야드 거리의 적을 보자마자 쏴 대고, 정확하게 머리에 명중시켰으니까.
당연히 불가능한 경지였다.
떠오르는 단어도 그런 것들이었다.
‘슈퍼 솔져… 초능력자, 원 맨 아미(One Man Army)…….’
매체에서나 볼 법한 말이고, 사실상 음모론에 가까운 단어였다.
확인된 바가 없었으니까.
또한, 현역 군인인 필립은 그런 것들을 확인해 보려고 해서도 안 됐다.
그의 일은 국방을 위해 명령에 복종하는 거였으니까.
그럼에도 필립은 자신이 떠올린 몇 가지의 단어가 강태를 가리키는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사람이 대놓고 여길 돌아다닌다는 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보고서에 입력하는 내용이 말도 안 되는 건 변함없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알파벳 개수가 차이 날 뿐, 상상 속 단어나 보고를 위해 작성한 문장은 뜻이 같았다.
그리고 이는 강태 역시 짐작하는 바였다.
‘…감시인치고 사람 괜찮네.’
필립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어쩔 수 없었다.
훈련을 대충 할 순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주어진 기회를 걷어차고 체험하지 않을 수도 없었으니까.
그냥 감수하는 것이었다.
물론 국방부에서 바라는 게 뭔지, 충분히 알 만했다.
재입대.
그게 아니더라도, 국방부와의 계약을 권유할 게 분명해 보였다.
아마 하청을 가장한 임무 따위를 줄 터.
포트 브래그에서 보여 주는 모든 게 그랬다.
미군 부대가 얼마나 우수한지, 또한 군인에게 대우를 얼마나 잘해 주는지 등등.
결론적으로 선전용이었다.
이를 보는 강태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스무 살 적이었으면 홀랑 넘어갔겠는데…….’
사실상 불혹을 앞둔 강태가 보기에는 그러려니 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게 아니어도, 당장 군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우선은 핵전쟁을 막아야 했고, 또한 제이크를 비롯한 동료들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모를 일이었다.
모든 게 끝나고 난 뒤에, 미군으로 입대해서 임무를 수행할 수도 있었다.
필립이 보았듯 군인 정신이 여전했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강태는 군인보다 더 군인같이, 훈련 스케줄을 고스란히 이행했다.
거의 실전처럼 꾸며진 완벽한 장소에서 하는, 실전 같은 일과였다.
흘러간 시간은 대략 6시간.
신식 샤워장에서 땀을 씻어 낸 강태가 금세 부대를 떠났고 필립은 뜨는 헬기를 본 후 보고서를 쓰기 위해 사무실로 향했다.
올 때마다 그렇지만, 써야 할 게 매번 많았다.
한데, 갑작스러운 호출에 불려 갔다.
보고서도 쓰지 못한 상황이라서 기억이 흐려질까 몇 가지를 다시 상기할 무렵.
불려 간 사단장실에서 움찔하고 말았다.
스크린에 웬 얼굴이 하나 떠 있었는데, 너무나도 익숙한 외모였기 때문이었다.
‘국방부 장관……?’
필립이 주춤하는 사이.
화면 속 국방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 오늘은 직접 들어 보고, 물어볼 것도 있어서 호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