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이틀 뒤, 오후 무렵의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Arlington) 카운티.
독일 데겐도르프에서 작전을 마치고, 막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오자마자, 짐을 풀고 제대로 된 목욕을 한 뒤에 밀려 있던 일들을 좀 했다.
무성하게 잡초가 자란 정원을 밀고, 집을 청소하고, 얼큰한 라면 두 봉지를 끓여 먹는 것.
그러고 나서 곧장 스케줄을 진행했다.
MMA 체육관에 연락하고 사격장을 예약하는 일.
목욕 좀 한 것 빼고는 쉰 게 없었는데,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돌아온 집이 쉴 수 있는 편안한 집보다는 휑하기 그지없는 시설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그래서 괜한 딴생각이 떠오르곤 했었다.
“쯧…….”
짧게 혀를 찼다.
작전이 잘 끝나고, 내 몸뚱이가 멀쩡한 것과는 별개였다.
중요한 건 다른 데 있었다.
이 집이 휑해서, 들어올 때마다 적막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오랜만에 와서, 조용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집이 보금자리보다는 타 기관의 시설물처럼 느껴져서 그랬다.
내가 여기에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 내 소유고, 내 돈 들이고, 내가 자는 곳이지만, 그런 아쉬운 감정들이 진하고 분명하게 느껴졌다.
왜 그러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감정이 처음이 아니고, 자주 느껴 왔고, 오래전부터 지속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탈함, 혹은 쓸쓸함.
이건 라레플 밖에 있을, 노란 장판이 깔린 내 자취방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상황이 전부 바뀌긴 했지만, 나는 여전했으니까.
물론 몸뚱이나 얼굴이 만 29세의 훤칠한 쾌남이긴 했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건 10년은 더 궁핍하게 살았던 아저씨였다.
내일모레 마흔이 될 장애인.
그래서인지 작전이 끝날 때면 이런 허탈감이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해결 방법도 잘 알았다.
내가 원하는 연애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평범하게 사는 것.
그거면 됐다.
문제는 핵폭탄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즉, 나중에 고려할 문제라는 소리.
그래서 늘 그래 왔듯이, 씁쓸한 감정을 꾹 눌렀다.
그리고 일부러 할 일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일단 하체부터 차근차근 조지고, 내일 새벽부터는 조깅하고 체육관가고, 3분할로…….”
그렇게 집에 만든 개인 헬스장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몸을 달구고, 중량을 더해 허벅지에 부하를 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띵동―
핸드폰 벨소리와 함께 현관문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며 일어섰고, 이어서 전화를 받으면서 현관문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현관 인터폰 카메라 앞에 해리가 서 있었고, 전화를 건 대외협력국 담당 직원인 릴리 모건이 기다렸던 소식을 전해 왔기 때문이었다.
- 요청했던 2마일 이상의 사격장과 헬리콥터 모두 준비되었어요. 사격장으로 방문하면 서류를 전달하고 관련된 사항을 모두 설명해 준다고 하네요. 헬리콥터도 같은 장소에 있고, 주소는…….
그렇게 용건이 전달되는 사이, 인터폰 영상 속의 해리도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 선배님, 저 왔습니다. 말씀대로 가족하고 만나서 함께 식사하고 바로 왔습니다. 여자 친구와도 충분히 인사를 나눴고요. 선배님? 계신 건 맞죠?
그렇게 현관문을 열어 주면서, 동시에 릴리가 알려 주는 사격장의 주소를 들을 무렵.
어느새 해리가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어? 첫날부터 바로 운동 중이셨습니까? 뭐 하고 계셨던 겁니까? 하체?”
“하체 했었는데…….”
답하면서, 릴리의 전화를 끊고 말을 이었다.
“나가 봐야겠어.”
“나간다고요? 어디를… 아, 포상으로 준다는 사격장이 준비된 겁니까? 맞습니까? 통화 마친 걸 보니까, 딱 그거 같은데요.”
그의 짐작에 고개를 끄덕이자, 해리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밥만 먹고 바로 오길 잘했네요. 선배님 말씀대로 며칠 자고 왔다가는 이런 좋은 순간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리고 헬기는 어떻게 해 준답니까? 혹시 거기에 준비되어 있는 겁니까?”
“그래.”
“그럼 제가 조종하고, 조종법도 선배님께 알려 드리면 되겠군요. 일찍 오길 정말 잘하지 않았습니까?”
호세에 버금갈 정도로 수다스러운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좀 낫네.”
* * *
리비아, 트리폴리(Tripoli) 중심지의 특급 호텔 객실.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는 지안드로의 눈가에 여러 개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못마땅하기 그지없는 모습.
근래 고용한 용병들이 유럽에서 벌어진 소탕 작전으로 전멸했고, 소재지 발각이 우려되어 튀니지에서 리비아로 호텔을 옮긴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지안드로가 눈살을 구긴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모니터 속에 담긴 제법 긴 내용의 보고서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강태가 휴가 기간 동안 방문한 장소나 그간 타고 다니는 중고차의 방탄 성능 그리고 거주 중인 주택의 개조 업체 같은 자료들.
이는 지안드로가 알아 오라고 지시했던 내용의 일부였다.
아직 차량 내부 구조나 주택의 개조 목적, 성능 따위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
그러나 그 일부만 보고도, 지안드로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일반적인 용병이 할 짓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도 안 되는 행태가 줄줄이 나열된 탓이었다.
군 시절 버금가는 꽉 찬, 또한 벅차기도 한 훈련에다가 전쟁을 대비하는 것 같은 모습.
현역 특수부대원들도 안 할 짓이었다.
이 정도면 그가 봐 왔던 내전 지역의 군부 지도자와 다를 게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보다 더한 광기가 있었다.
술과 마약, 매춘 등의 향락도 전혀 없이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지안드로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분노가 다 타고, 재가 남은 듯.
“하… 그래… 그런 실력을 가지려면 이 정도는 미쳐야지. 평범한 새끼가 그렇게 될 순 없지…….”
지안드로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와 아덴만, 독일 데겐도르프의 사건들을 돌아보듯 중얼거렸다.
전부 말이 안 됐다.
그중에서도 아덴만에서 이뤄진 해상 저격은 여전히 믿기지가 않지만, 그것도 사실이라고 상정해 둬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번 전멸 같은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다.
특히나 지금은 강태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의 정보까지 수집하고 있는 상황.
최악을 가정해야지, 얕잡아 봐선 안 됐다.
아니면 직접 출동했던 그리고 결국에 숨을 거둔 세르게이와 다를 바가 없을 터.
다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지안드로가 그렇게 죽을 리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추적을 당할 가능성은 있겠으나, 지금처럼 또다시 거처를 옮겨서 잡힐 일도 없을 터.
그렇다고 실패할 생각도 없었다.
이미 비용과 자존심, 기회를 적잖게 소비한 탓이었다.
또한 강태를 여기서 놓치게 된다면, 다음 기회가 올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었다.
확실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그 방법 역시 정보를 받기 전부터 진즉에 세워 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적을 제거하는 방법은 획기적일 게 없는, 아주 진부하고도 뻔한 몇 가지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물량이나 화력 혹은 저격.
그중 사람을 수십, 수백 명을 동원한 물량전에서 실패했으니, 이제 남은 건 두 가지였다.
화력과 저격.
당연하게도 지안드로는 그 모든 걸 한 번에 사용할 요량이었다.
물론 시간 차이가 약간 있겠으나, 어차피 곧장 이어서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순서 역시 뻔했다.
저격으로 사살하거나 스코프로 좌표를 확보한 뒤 포격.
생각을 정리한 지안드로가 타자를 두들기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타다다다닥─ 딸깍, 딸깍.
구상했던 작전에 살을 붙이는 과정이었는데, 단순히 계획에 관련된 글자를 써 내려가는 게 아니었다.
그 안에는 필요한 이름과 연락처도 있었다.
예컨대 떠올린 저격수.
주특기가 저격이었다던가, 저격수 흉내 내는 용병들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현역 특수부대 저격수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실력으로 암시장에서 활약하고 살아남은 베테랑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래서 입력한 연락처는 몇 개 없었다.
다해서 3개.
정리하는 지안드로가 짧게 계산했다.
‘동서남북 중에 세 곳을 포위하고, 열어 둔 곳으로 몰아서 포격을 가하면… 토끼몰이가 완성되는군.’
포위 과정에서 저격수가 사살해도 그만이니, 우려되는 건 없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때와 장소.
그걸 알아야 저격이든, 포격이든, 뭐든 준비할 수 있었다.
이에 지안드로가 고개를 저었다.
보고서 중간에 나온, 미친 것 같은 강태의 휴가 일정 때문이었다.
‘저격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포격이 어렵겠군.’
구할 수 있는 거라고 해 봐야 RPG-7이나 박격포였다.
만에 하나, 미국이 강태의 뒤를 봐준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제대로 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게 아니어도 작전은 쉽지 않았다.
해외가 아닌, 미국 본토였으니까.
이내 결론이 나왔다.
‘…미국 밖에서 처리해야겠어.’
이윽고 지안드로가 쓸 만한 방법을 떠올렸다.
브로커답게 가장 먼저 필요한 인적 자원부터 가늠한 것이었다.
미국 고위직 공무원이자, 약간의 실수가 발각되어 한직으로 좌천된 월터 그레이슨.
그라면 아직 쓸모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미국에서 피칼에게 충성하는, 보기 힘든 고위직 공무원이었으니까.
다만, 아직 감시 중이라는 게 문제였다.
행동에 제약이 있었다.
그 끝에 다른 이들을 떠올려 봤으나, 미국 핵심에 접근할 만한 요인은 없었다.
물론 피칼이라면 알고 있을 터.
그러나 모른다고, 알려 달라고 떼를 쓸 순 없었다.
필요한 일을 행해야 했다.
그게 지안드로의 임무였으니까.
“흐음…….”
강태와 관련된 불완전한 자료와 그가 갖고 있는 브로커로서의 정보를 살피던 무렵.
지안드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쓸 만한 계획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돌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죽이는 방법.
지안드로가 소리내어 단어 하나를 뱉었다.
“그래, 북한……!”
간 김에 중국인 핵물리학자를 대체할 인력도 구하고, 침투해 온 강태를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강태가 미국을 위해 일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했는데, 그건 계약서나 요원 명단이 없어서 확신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다만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CIA인지, 뭔지는 몰라도 강태는 분명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은 미국이 방관할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움직이게 만들어 주면 됐다.
다만 피칼의 도움이 조금 필요했다.
정확히는 그가 갖고 있는, 중세 유럽 시절부터 소유해 온 자본.
그중 손톱만큼만 내어 줘도, 북한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 줄 게 분명했다.
그러면 눈엣가시인 강태를 처리할 수 있었다.
시간도, 장소도 모두 그의 것이 될 터.
이내 지안드로가 벽돌처럼 큼직한 위성 전화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