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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24화 (124/185)

124화

독일, 바이에른주, 데겐도르프(Deggendorf) 외곽에 위치한 마을.

침투한 도미토리형 숙소에서 SSE(Sensitive Site Exploitation: 정보 수집)를 마치자마자 CIA가 기다렸다는 듯 등장했다.

초 단위로 세도 될 만큼 정확한 타이밍.

CIA의 작전도 그만큼 정교하고 분명하게 이뤄졌다.

우리 TF가 사주경계를 서는 사이에 그들이 SSE 자료를 전달받고 시신을 치우며 관련 흔적까지 처리하는 것인데, 모든 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뤄졌다.

마치 도미토리룸에 와서 미리 예행 연습이라도 해 본 듯한 모습.

그 속에서도 우리 TF가 사주경계를 할 때였다.

어느새 정리를 마친 듯, CIA 요원 한 명이 우리 쪽으로 짧게 육성 지시했다.

“끝났습니다. 복귀하세요.”

세계 제일의 거대 정보기관답게 사무적이다 못해 차갑고 명령적인 어조였다.

간혹 보던 국정원 직원들과 비슷한 느낌.

우리 TF도 그러겠지만, 나 역시 그러려니 하고 대꾸 없이 CIA를 보내다가 주춤했다.

“아, 팀장은?”

부상자인 제이크가 아직 남아 있기에 묻는 것이었다.

당연히 데려가서 치료라도 해 줄 줄 알았는데, CIA가 저들끼리 현장을 뜨고 있었다.

이에 휙 돌아보자마자, 해리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은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제이크가 아무리 근육에 힘을 줬다고 하지만, 상대는 어린애 같은 약자가 아니었다.

나름 훈련받은 용병들.

은퇴하고 놀면서 무뎌졌다고는 해도 건장한 성인 남성보다도 훨씬 센 작자들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찔렀으니, 분명 외과적인 처치가 필요할 터.

한데 별일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멀쩡하니까, 퇴출 준비부터 해.”

어느새 현지의 대외협력국 요원과 인사를 마친 제이크가 내 뒤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행동 역시 다친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분 전만 해도 몸에 칼 두 자루가 박혀 있던 걸 떠올려 보면 사뭇 믿기지 않는 광경.

‘암만 그래도 칼빵인데……?’

그런 내 생각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해리의 목소리가 부연 설명처럼 따라붙었다.

“아… 저도 믿기진 않는데, 정말 괜찮을 겁니다. 일단 눈에 띄는 신경 손상의 증상도 없고요. 그리고 출혈도 멎었고, 스킨 스태이플러(Skin Stapler)로 임시 봉합도 마쳤고… 제 생각에는 아마 칼날이 방탄판과 플레이트 섬유조직에 맞물리면서 충격이 상쇄된 게 아닐까…….”

그러면서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라는 생각을 했지만, 정말 괴물 같은 근육이 칼을 잡은 게 맞을 겁니다. 무스(Moose: 말코손바닥사슴)나 바이슨(Bison: 아메리카들소)이 소구경 탄환에 끄떡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웬만한 SUV보다 커다란 사슴과 들소가 제이크랑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반인반수 같기도 하고, 반인반신 같기도 하고.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이 번져 갈 무렵, 내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창문 바깥을 경계하는 사이, 근처로 유럽을 담당하는 대외협력국 요원이 다가온 것이었다.

제대로 보니, 게임에서 택시 기사로 위장했던 인물로 보였다.

여전히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가 내게 불쑥 악수를 청해 왔다.

그것도 뜬금없는 소리와 함께.

“아마 당신이겠군요.”

“……?”

무슨 말인가 해서 바라보자, 반 박자 늦게 여유 있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아프리카 중부를 들쑤셨다는… 헛소문의 주인공 말입니다. 아, 이제 헛소문은 아니겠군요, 그 실체가 눈앞에 있으니.”

“아… 그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얘기하기에는 너무 긴 이야기일 거고, 그걸 전부 말하기도 어렵겠죠. 저도 당신의 정보를 얻으려고 얘기한 게 아니라… 오늘 결과를 보고 말을 걸었을 뿐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말하려고 온 겁니다.”

그 말에 가볍게 악수를 나눴는데, 생각해 보니 그럴 만했다.

현지 요원은 문을 열어 준 이후로 복도에서 2층을 경계했기에 나를 못 봤을 줄 알았는데, 대강은 본 모양이었다.

아니, 안 봤어도 현장에 있었으니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소리도 그렇고, 내 움직임도 사실상 사람을 초월한 티가 많이 났었으니까.

안 그러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 살 확률이 높아지고, 누군가 다칠 가능성도 줄어드니까.

특히나 현지 요원이면 짬을 먹을 만큼 먹은 빠꼼이라서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기가 더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니 굳이 다가와서 악수를 건네고 말을 걸고 있을 터.

내 활약에 면역을 갖게 된 우리 팀은 익숙하게 넘어가고 나도 그러려니 하지만, 처음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놀랄 만한 일임이 분명했다.

곧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든 정말 반갑습니다, 아니… 반가웠다고 해야겠군요. 제대로 인사하기에는 촉박하니… 그럼 성공적으로 퇴출하고, 다음에 다시 봅시다.”

“알겠습니다, 그쪽도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그와 힘 있게 악수를 하고, 짧게 고개도 숙였다.

미리 이 숙소에 침투해서 내부 정보를 전달하고, 관리 직원과 일반 손님에게 수면제를 투약해 잠들게 하고, 문까지 열어 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소속된 대외협력국에서 이름 없이, 정말 엑스트라처럼 존재하다가 죽거나 다치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고.

그래서 약간의 유대감을 담아 현지 요원과의 인사를 마친 뒤.

빠르게 퇴출을 시작했다.

순서에 맞게 경계하면서 나가고, 맞은편 임대 숙소에 주차한 차량에 올라 동네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이 역시 순식간에 이뤄졌다.

대기하면서 구두로 지시를 받았고, 기다리는 내내 시뮬레이션을 돌린 덕분이었다.

팀원 간의 호흡도 잘 맞았고.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차에 탑승해서 한숨 돌릴 때였다.

“…참, 리. 아까 대검 투척 말이야. 원래 그렇게 잘 던졌던 거야? 네 사격 솜씨처럼?”

“아, 그거? 뭐… 비슷해.”

대충 답하고 말았다.

이것도 결국에 명사수 특성의 효과를 받아서 발휘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대검 투척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알 자마쉬 같은 곳에서 특성을 테스트한다고 숙소 옆의 조그만 사격장에서 혼자서 몇 번 던진 적이 있긴 한데, 그게 전부였다.

특성이 적용되는지, 어떤지를 확인하는 게 전부여서 많이 해 보질 않았었다.

대검도 별것 없었고.

그보다는 사격에 매진했었다.

이 바닥에서 중요한 건 몇 미터 안 되는 대검 투척이 아니라, 수백 미터에서 수 킬로미터까지 커버할 수 있는 총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여 준 적 없던, 의도치 않게 숨겼던 실력이 드러난 상황.

호세의 감탄이 덧붙었다.

“꽤 놀랐었어. 네가 서커스라도 하는 줄 알았거든. 아니, 네 사격처럼 믿기 힘들더라고. 내가 던진 걸 뽑아서 다시 던질 줄은… 그것도 내가 하나 던질 때 두 개나 던졌었지?”

할 만한 대답이 없어서 입맛만 다시는 사이,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척도 잘하시는 겁니까? 선배님?”

“뭐… 좀 하지.”

“역시 대단하시군요. 나중에 한번 보여 주시면 안 됩니까?”

“…그만 떠들고 경계나 해라.”

“완벽하게 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그럼 이번 휴가 때도,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선배님하고 같이 있어도 됩니까?”

“또?”

“네, 선배님. 선배님?”

해리가 대답을 재촉하듯 부르기에 절로 된 소리가 나왔다.

“좀 미친놈 같긴 했는데… 너 가족 보러 안 가냐?”

“그럼 가족 보고 오겠습니다.”

“여자 친구는?”

“이해해 줄 겁니다. 결혼도 약속했습니다.”

“이 미친… 근데 나한테 뭐 배울 게 있다고 또 오냐? 저번에도 별거 없었잖아?”

희한해서 물었다.

해리 삼촌네 땅에서 수만 발의 MK.20을 사격했을 때도 별다른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려 줄 것도 없었다.

나름 후임처럼 길러 보려고 했는데, 돌아보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리가 원하는 건 결국에 내 명사수 특성인데, 그건 내가 알려 주거나 전수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냥 내게 적용된 능력일 뿐.

그래서 같이 열심히 사격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그냥 쉬지 않고 훈련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데 돌아오는 답에 주춤했다.

“별거 있었습니다.”

“있다니?”

뭔 소린가 싶어서 쳐다보려다가, 주어진 임무에 맞게 차창 너머로 시선을 고정할 무렵.

해리의 음성이 이어졌다.

“선배님의 모든 일과가 특별했습니다.”

“뭐가?”

“저는 군 생활하면서 휴가 기간에 선배님처럼 고강도로 훈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술이나 담배, 여자도 없이, 흔한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게임도 하지 않고… 심지어 근무 기간에 전투를 지속했었는데도, 그만큼 격렬한 훈련을 한다는 게 특별한 일 아닙니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제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고, 스케줄을 따라가다 보면 저 역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과한 칭찬으로 이어지면서 쓴웃음이 절로 어릴 무렵.

호세의 추임새도 끼어들었다.

“흐음, 정말 부럽군. 해리 같은 후배라…….”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가자.”

그렇게 말을 막자, 해리의 말이 마무리 짓듯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휴가 때는 집에 들렀다가 선배님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 * *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웨스트윙.

용무를 마친 요인들이 지하 회의실에서 올라오고, 로버트 역시 백악관을 빠져나오려던 때였다.

“이보시오, 엔더슨 국장.”

국방부 장관이 그를 불러세웠고,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대통령께 보고하기 전에, 엔더슨 국장과 협의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시간을 좀 내주시겠소?”

“예, 언제가 좋겠습니까?”

“지금은 어떻소? 내가 오늘 찾아뵐 예정이라 말이지.”

“지금이라면 30분 정도 시간이 날 것 같은데, 그거면 충분하겠습니까?”

“나도 시간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30분이면 충분합니다.”

국방부 장관이 만족한다는 듯 웃었고, 로버트도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수긍했다.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는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리를 보고 가만히 두기가 더 어렵지. 특히나 그의 활약을 이해할 만큼의 군사적인 지식이 있다면…….’

로버트가 그런 생각과 함께 앞서 걷는 국방부 장관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 역시 강태를 바라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처럼 기관의 수장이 직접 움직인 건 아니었지만, CIA에서도 물밑으로 접촉해 온 경우가 많아서 아주 잘 알았다.

그들이 강태에게 쥐여 준 명함만 해도 열 장은 족히 넘어갔다.

정확히 몇 장인지 모를 정도.

그 와중에 다행인 건 강태가 그런 CIA에 털끝만큼의 관심도 내비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로버트도 담담할 수 있었다.

국방부 장관이 접촉하고 회유하더라도 강태가 대외협력국에 남아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여러 제안을 건넸다.

‘…목적이 뻔히 보이는군.’

정확하게는 군사위성이나 고고도 무인정찰기를 통한 상시 보호, 각종 군사교육 참여와 참관, 국방부의 최신 무기 테스트 등등으로 위장한 관찰과 접촉, 데이터 수집으로 이어지는 수단들.

그러나 로버트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저기 나온 모든 것이 강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군사교육 참여나 무기 테스트 같은 건 강태도 이전에 요청했던 사안 중의 하나고, 또한 아주 반길 만한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강태의 신변 보호가 가능해지니, 걱정도 덜어 낼 수 있을 터.

어느새 국방부 장관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미국인이고, 국가에 필요한 특별한 인재니… 이만한 조치가 있어야 하진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허용하는 겁니까?”

“네, 그렇게 대통령께 보고하시죠.”

“아…….”

흔쾌히 나온 답에 국방부 장관이 오히려 당황하다가 조심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소유가 그쪽 기관으로 되어 있소? 그러니까 개발한 슈퍼 솔져나…….”

“아닙니다.”

“약물이나 수술 같은 게 이뤄진 건 아니라고? 전혀?”

“전혀 아닙니다.”

“으음… 일단은 알겠소. 그럼 다음에 다시 봅시다.”

국방부 장관이 일어났다.

로버트가 방금 했던 대답을 온전히 믿지 못해서 그랬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휘하의 그 어떤 대원도 적과 아군이 얽힌 야간에, 그것도 채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글록19를 네 발이나 쏴서 전부 명중시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고 돌이켜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군, 어떻게 된 건지…….’

그렇게 국방부 장관이 생각을 정리하며 떠나는 사이.

그의 뒷모습을 보던 로버트의 입매에는 어느새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강태를 해부하지만 않았을 뿐, 가능한 모든 검사를 활용해서, 아주 낱낱이 확인해 봤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특이할 게 없었고.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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