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오, 독일이요?! 그것참, 다행이군요. 어서 이 빌어먹게 더운 나라를 뜹시다. 숨쉬기가 짜증 날… 아, 젠장할. 이제는 미지근한 비까지 내리는군요.”
말을 잇던 호세가 하늘을 올려다봤고, 나도 같이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해가 지면서 어둑해진 가운데 빗방울이 추적추적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세의 말마따나 미지근한, 그래서 찜찜한 느낌의 비였다.
“나는 아무래도 인도하고 안 맞는 것 같아. 여긴 여행도 못 오겠어.”
호세의 불평 섞인 말이 떨어지는 비에 섞여서 사라질 무렵, 이윽고 제이크의 말이 덧붙었다.
독일에서 해야 하는 임무를 간략하게 알려 준 것이었다.
적 제거 혹은 생포, SSE(Sensitive Site Exploitation: 정보 수집)까지.
평소에 하던 것들인데, 이번에도 주춤하고 말았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독일은 분쟁 지역과는 거리가 먼 선진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탈리아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훌륭하게 완수했으나, 독일에서도 그렇게 잘될 거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애초에 운이 좋았다.
만약 이탈리아에서도 외따로 떨어진 저택이 아닌 시내나 마을 한복판에서 교전을 벌였다면, 지금 즈음 갑판이 아니라 감옥에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라면 이탈리아 군경을 피해서 한창 도주 중이거나.
‘독일도 좀 한적한 시골 같은 데서 했으면 좋겠는데…….’
내심 바랐으나, 그런 걸 알아볼 만한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들을 순 없었다.
이번에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다.
애초에 제이크가 언급한 작전지역조차 구체적인 도시명이 아닌 독일에 불과했으니까.
“세부적인 정보는 현지에서 통보해 준다더군.”
“또 보안 때문입니까?”
“그래, 이번에도 업무 협조 같은 게 많은 모양이야. 단독 작전이 아닐 수도 있고 이탈리아보다 독일의 작전이 더 버거울 수도 있어.”
“혹시 무슨 말이라도 들은 겁니까?”
“이번에도 CIA 같은 기관의 도움을 받게 될 건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게 무슨… 아! 아니면 여기에 뭐가 있는 겁니까?”
어느새 해리가 불쑥 물으면서 주변을 휙휙 살피자, 제이크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 내며 답했다.
“그렇진 않아. 이동 중에도 평소 이상으로 경계하라고 했거든.”
“음, 이런… 그건 불안한 말이네요. 우리가 저격 대상이 됐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
“아, 젠장… 날씨에 비까지 내려서 엿같은데, 더더욱 엿같은 소식이군요. 혹시 독일도 배로 가는 겁니까? 설마? 아니면 육로?”
이내 염려가 담긴 듯한 호세의 음성에 제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여객기로 가게 될 거야. 도착지는 뮌헨이고.”
“뮌헨… 듣기만 해도 눈치가 보이는 도시군요. 당연히 외딴 데로 좀 들어가겠죠? 우리가 상대할 놈들이 멀쩡히 대도시를 활보하기는 어려울 테니…….”
“그래, 이만 하선하자고.”
제이크가 말하면서 비에 젖고 있던 배낭을 짊어졌고, 나도 배낭을 메면서 움직였다.
이탈리아에서 인도, 이어서 독일로 가는 이상한 여정이지만, 그러려니 했다.
내가 신경 쓰고 바라는 건 따로 있었다.
‘교전만 좀 편하게 했으면…….’
일종의 교전 장소가 있는 곳이 나았다.
예컨대 게임 시작 맵이었던 알 자마쉬 같은 가장의 분쟁 도시.
물론 테러가 빈번한 위험 지역이긴 하지만, 거기서는 내가 뭘 하든 눈치 볼 게 없었다.
기관총을 갈기든, 로켓포를 쏘든.
적을 제압하기만 하면 됐다. 수습은 나중에 미군이 해도 그만이었다.
하다못해 민가에서 총성이 터져도 군경이 개입할 일이 없었다. 군경도 오지 않는, 원래 그런 곳이니까.
그러나 선진국은 달랐다.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상황과 장소를 따져야 했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외딴 저택에 침투할 때도, 수류탄을 빼놓고 가야 했었다.
독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외딴 마을이라고 해도, 누군가 총성이나 폭음을 듣게 되면 신고할 테니까.
물론 조건이 나쁘다고 한들,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미사일 맞는 거만 아니면 뭐…….’
특성도 그렇고, 훈련도 그렇고, 실전도 많이 겪어서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전투가 느려지거나 번거로워져서 그럴뿐.
무엇보다 나는 국정원 흑색 요원 같은 비밀 첩보원이 아닌, 10년짜리 군 생활을 받은 특전사 출신의 이강태였다.
그림자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것보다 직선적으로 팍팍 치고 나가는 게 낫다는 뜻.
그러나 뜻대로 안 된다고 해서 작전을 바꾸거나 흔들 생각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깠던 육군 부사관 출신이기도 하나, 핵전쟁 예방을 위해서는 뭐든 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대외협려국의 작전을 도맡아 처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라레플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피칼을 쫓는 건 이들뿐이었으니까.
* * *
이른 아침의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
공항에서 동쪽으로 3㎞가량 떨어진 마을은 독일 남부의 흔한 마을을 닮아 있었다.
군데군데 보수된 정갈하고 좁은 도로, 단정한 모양의 2층짜리 주택들, 주황색 지붕,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분위기까지.
그곳으로 다소 이질적인 밴 한 대가 들어갔다.
향한 곳은 마을 외곽의 창고 앞.
노후된 푸조 세단과 생활 집기가 놓인 틈으로 밴이 천천히 서서 완전하게 정차했고, 운전석을 제외한 모든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내렸다.
큼직한 가방을 멘, 여섯 명의 G&G Corp TF였다.
“와, 역시! 이런 게 제대로 된 날씨지. 습하긴 해도 훨씬 시원하잖아?”
호세가 중얼거렸고, 그 옆에 있던 마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리 말고 정보원이나 찾아봐. 도대체 어디 숨은 거야?”
“이미 찾았어. 딱 보면 몰라? 저기잖아.”
호세가 말하면서 닫힌 창고 문 쪽으로 턱짓했다.
그냥 닫힌 문이 아니었다.
신호로 쓰이는 우편물이 끄트머리를 접은 채 꽂혀 있는 접선지였다.
동시에 제이크도 입을 열었다.
“전원 진입 준비해.”
이윽고 그들을 내려 줬던 밴이 조용히 빠져나가는 사이, 자세를 잡은 6명의 G&G Corp TF가 창고로 접근했다.
선두에는 소음기를 낀 글록19를 든 강태.
그가 바짝 긴장하며 접근했는데, 굳게 닫혀 있던 창고문이 턱 열렸다.
“……!”
다들 주춤하며 총기를 드는 순간.
“어……?”
선두에 있던 강태가 가장 먼저 주춤했고, 그 뒤로 나머지 인원들도 모두 눈을 깜박이거나 좁게 뜨면서 등장한 사내를 바라봤다.
“이 사람은……?”
누군가가 의아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사이, 강태의 입도 열렸다.
“그… 경찰특공대?”
동시에 강태의 맞은편에서 깜짝 놀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업!”
“아, 맞네. 맞지? 그… 콜롬비아 출신이라고 했나?”
한 걸음 성큼 다가가면서 묻자, 다시금 물러난 루이스 몬테로가 입을 열었다.
“그, 그렇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우라늄 광산을 탈출하다가 강태에게 사살될 뻔한, 그래서 먼저 항복을 선언했던 바로 그 용병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나?”
“저, 저는 C, CIA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오시면서 제 얘기 못 들으신 겁니까?”
루이스가 당황하며 되묻자, 제이크가 인상을 구긴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기는 없었어.”
“예?! 아니… 그, 그게… 저는 오늘 오게 될 사람을 안내하고 이후로는 통제 받으라고 해서… 여기서 대기 중인데…….”
크게 놀란 듯 더듬는 대답에 제이크가 손짓했다.
총기를 내리라는 신호.
G&G Corp TF 전원이 일시에 총구를 땅으로 내렸고, 홀스터에 채워 넣을 무렵, 호세가 한숨을 뱉었다.
“아, CIA 새끼들 일처리는 여전하네. 이런 건 미리 설명을 해 줘야지. 오발탄이라도 쏘면 어떡하려고 이런 식으로 배정을 해 놔?”
그 말에 어느새 안으로 들어선 레이첼이 짧게 대답했다.
“CIA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팀별로 확인 가능한 정보나 공유하는 자료가 달라서 놓쳤을 가능성이 클 거예요. 워낙 방대한 기구이기도 하고요.”
“그건 그렇다 치고, 어쩌다가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야? CIA가 당신을 왜 고용했지?”
호세가 다소 공격적으로 묻자, 루이스가 다시금 물러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을 더듬거렸으나, 요점은 간결했다.
CIA에게 끌려간 이후로 취조와 정신 개조를 거쳐 계약직 정보원이 됐다는 것.
“…특히 저는 콜롬비아 경찰특공대 경력도 있고, 불법 용병도 했던 터라 쓸모가 있다고 하더군요.”
“쓸모라… 이봐, 두 사람. 이런 경우가 있나? 아니, 믿어도 되는 건 맞아?”
호세가 CIA 경력이 있는 레이첼과 해리를 보며 묻자, 긍정의 답이 나왔다.
“저도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CIA에서 종종 쓰는 방법이죠. 그리고 우리와 접촉할 정도면 신뢰해도 되는 인물입니다.”
“어느 팀에서 어떻게 하는지 다 알진 못해도… 충분히 있는 일이에요.”
몇 마디의 대답 끝에, 제이크가 걸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회포는 이만 끝내고, 당신의 임무부터 설명해 봐.”
그 소리에 루이스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조심스럽게 관광용 지도 하나를 꺼냈다.
돌아다닐 각종 관광지가 표시된 맵이었는데, 루이스가 그중 한 곳을 짚었다.
“여기로 당신들을 안내하고, 임무에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데겐도르프(Deggendorf)? 마을 규모나 적의 상태 같은 아는 정보가 있나?”
“네, 여기… 2일 전까지 확인해서 기록했던 자료입니다.”
루이스가 얼른 수첩 하나를 더 꺼내어 내밀었다.
PDA 같은 게 아니라, 종이에 볼펜으로 갈겨 적은 다소 원시적인 방법이었으나, 알아보기 어렵진 않았다.
확인된 적은 최소 11명.
독일 동부의 트레킹 관광객으로 위장 중이며, 소지한 무기 파악은 불가능하나, 배낭 사이즈로 봐서는 소총 이상의 무기도 은닉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 따위였는데,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하… 이건 그냥 마을 한복판이잖아?”
마커스의 말이었다,
그 뒤로 PDA 따위를 꺼내어 연관된 자료 같은 걸 살피던 해리도 고개를 저었다.
“건물도 평범한 숙박 시설인데… 쉽진 않겠네요…….”
해리도 중얼거리듯 말을 덧붙이자, 루이스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침투 후 적 제거, 납치… 그런 겁니까?”
“그래.”
제이크가 짧게 답하는 순간, 루이스가 얼어붙듯 멈추고 말았다.
“아니, 이건… 불가능할 텐데…….”
그리고 중얼거렸는데, 생각보다 태연한 분위기에 멈칫하고 말았다.
이어서 눈을 껌뻑여 가면서 다시금 테이블을 봤다.
혹여 자신이 놓친 게 있나 하고.
하나, 아무리 봐도 지도며 수첩이며, 전부 불리하다는 사실만 가득했다.
가능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을 한복판의 숙박 시설로 침투해서, 더 많은 수의 적을 제거하고 납치해야 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다 떠오른 걸 붙잡듯 눈을 팍 떴다.
“아! 지원……! 지원군이 있군요?”
나름 눈치껏 말한 거였으나, 제이크가 그의 말을 잘랐다.
“이동할 준비나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