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7월 초순, 워싱턴 D.C, 해리 S. 트루먼 빌딩의 대외협력국 국장실.
CIA와 국무부 산하 정보조사국, 국방부 소속의 국가안보국에서 온 각종 업무 협조 보고서까지 전달되면서,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비롯된 작전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손에 들어온 자료를 토대로 새 계획을 수립하고 지시를 내려야 했다.
심지어 이어지는 일이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취조한 용병에게 사주했을 지안드로와 그의 배후에 있는 피칼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었으니까.
이에 로버트가 관련 보고서 내용을 파악할 때였다.
“흠…….”
끝까지 읽기도 전에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말았다.
보고서가 열악하거나 나빠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담긴 정보는 충분했다.
오히려 많았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납치한 2인에 대한 반복된 심문과 정신적인 고문, 약물 투여로 인한 취조 결과와 아덴만에서 습격했던 해적들을 체포하여 조사했던 결과가 아주 좋았다.
제법 유의미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지안드로가 핵미사일에 관심을 두고 실제로 구입하려고 하거나 개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그와 관계된 여러 용병의 대략적인 신상명세, 주 활동 지역과 관련된 테러 등의 적잖은 정보까지.
이에 이미 요원들을 유럽 전역에 뿌리듯 배치해 원거리에서 추적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번에는 작전 실행조차 벅차군.’
로버트의 인상이 구겨진 채 펴지질 않았다.
대략적인 밑그림이 보였는데, 그 위에 필요한 색을 채울수록 심란했기 때문이었다.
할 게 많았는데, 쉽지 않았다.
보고서에 기재된 독일과 스위스,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코소보, 벨라루스, 조지아에 위치한 용병들의 근거지를 가능한 한 빨리, 동시에 습격해서 관련자들을 죽이거나 잡아 와야만 하는 탓이었다.
쉽게 말해, 유럽 전역에서 일시에 벌어지는 사살과 생포, 납치 같은 고위험 임무라는 뜻.
이는 나눠서, 혹은 순차적으로 할 일이 아니었다.
차이를 두게 되면 연락을 받아서 도망갈 뿐만 아니라, 되려 함정에 걸려서 역으로 당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합을 맞춰서 일시에 치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나라를 모두 습격할 정도로 대외협력국의 위장 요원들이 많지 못했다.
이번에 임무를 수행한 G&G Corp TF만이 아니라, 현지에서 고정적으로 임무를 수행 중인 위장 요원을 다 합쳐도 턱도 없이 부족했다.
한두 명씩 나눠서 팀을 짜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상대가 한두 명이 아닌 여러 명, 혹은 십수 명이면 오히려 잡혀서 총살을 당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터.
결론은 하나였다.
“…작전을 나눠야겠군.”
대외협력국 단독이 아닌, 관계 기관과의 연합 작전이 필요했다.
여태 비슷하게 해 오긴 했으나, 아예 작전까지 외주를 주듯 넘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자존심도 그렇고, 보안도 걸려 있던 탓이었다.
물론 업무를 철저하게 나누고 세분화하면 보안이 무방비하게 다 털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보화니, 첨단화니, 뭐니 해도 결국에 필요한 건 사람이고, 대외협력국은 사람이 부족한 탓이었다.
반대로 사람이 가장 많은 건 CIA 같은 대형 조직이었고.
이윽고 몇 가지 판단을 마친 로버트가 보고서의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내리고서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팀장급 전원 호출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주요 타깃과 작전 난이도 구분에 따른 인력 배정, 연계 기관과의 구체적인 협조 내용, 끝으로 강태가 투입될 지역 선정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단연코 강태의 업무였다.
수십 명의 특수부대원을 능가하는 인적 자원으로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인물.
출신 부대인 대한민국 특전사의 슬로건과 어울리는 말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그걸 조용히 읊조린 로버트가 강태를 떠올리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있다면, 염려할 만한 건 없었다.
전장에는 늘 변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변수마저 압도하는 게 강태였기 때문이었다.
‘리가 핵심적인 부분만 처리해 준다면… 작전을 조각내도 큰 손해는 없겠지.’
* * *
해적들의 습격 이후로는 별일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미 해군이 근거리에서 에스코트라도 해 주듯 함께 이동한 덕분이었다.
그것도 주요 구간인 소말리아 북동부 해안만이 아니라, 아덴만을 완전히 다 벗어나서 아라비아해에 이르기까지 내내 함께했었다.
그 덕분에 이전에는 눈치 보듯 어슬렁거리던 보트까지 싹 다 사라졌다.
정신 나간 해적들도 덤비지 않을 정도로 크기나 색깔, 외형까지 티가 나는 게 군함이기 때문이었다.
기다란 포신과 세워진 헬기, 수병들까지.
그 모습을 보면서 호세가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는데, 그것도 1주일이 채 안 되어 끝났다.
어느새 인도 영해에 가까이 다가간 탓이었다.
근방에 인도 해군도 있었고.
이를 보던 호세의 입에서도 아쉬워하는 듯한 말이 나왔다.
“왜 점점 더워지나 했더니, 벌써 인도에 도착한 모양이군…….”
아덴만 이야기부터 아라비아해에서의 작전까지 한창 떠들던 그가 한숨까지 내뱉은 뒤.
이내 군함이 잘 보이는 쪽으로 몸을 틀더니 꼿꼿하게 섰다.
그리고 절도 있게 경례까지 했다.
척.
그 모습에 쓰게 웃자, 천천히 손을 내린 호세가 멀리 바다를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음, 이렇게 된 김에 동료들과 한번 만나야겠어. 괜히 보고 싶은데…….”
그러던 그가 내 쪽으로 스윽 시선을 돌렸다.
“리, 그럼 말이야……. 너도 나와 함께 가 보는 건 어때? 팀장처럼 동료들과 사격이나 격투기 같은 걸 하진 않지만, 네가 원한다면 한번 제안해 볼게. 아마 거절하는 동기들은 없을 거야. 다들 마시고 먹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명색이 씰이니까 죽이고 싸우는 것도 좋아하거든.”
그 말에 바로 고개부터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2티어라고는 하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당히 대중적인 특수부대 중 한 곳으로 실력도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델타포스와 만났을 때도 배운 게 꽤 많았던 만큼, 네이비씰 출신도 분명 도움이 될 터.
물로 그것만이 아니라, 네이비씰 출신과 겨뤄 볼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았다.
이게 도장 깨기랑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도 있었고.
“나야 좋지.”
얼른 대답하자, 호세도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델타에서는 차별하는 놈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내 친구 중에 그런 놈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아, 정 안 되면 한번 붙지, 뭐.”
소위 말하는 맞짱으로 해결하면 된다.
제이크 같은 힘이나 속도가 없을지언정, 나도 꾸준한 훈련으로 이젠 주먹질이라면 그렇게 부족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스파링하면서도 느꼈던 바였고.
한데 돌아오는 답은 예상 밖이었다.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해?”
“어?”
무슨 소린가 바라보자, 호세가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해 주고, 내가 초대한 동료가 모욕받고 있는데, 내가 그걸 가만히 지켜볼 머저리 같아? 그럴 일도 없겠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네가 나서게 두지 않아. 그 전에 내가 해결할 거야.”
“아…….”
그제야 제이크가 한 손으로 사람을 기절시켰던 순간이 떠올랐다.
정작 모욕의 당사자인 나는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듣지 못했었는데, 제이크는 그것과 별개로 나서서 턱을 부숴 놨었다.
그제야 놓치고 있던 게 떠올랐다.
‘그렇지. 이런 건 내가 할 게 아니지.’
돌아보니 이런 일까지 혼자 감당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습관 같았다.
작전 현장에서 동료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내 힘으로 일을 해결해 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해결할 자신이 있기도 했고.
다만, 제이크나 호세가 어떨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 생활 10년의 경험이 이럴 때는 왜 별 반응이 없는지 웃기다가도, 전역 후 살아온 10년의 세월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인생 한 번 조졌었으니, 원…….’
훈련이나 작전이 완벽할 순 있어도, 그 외의 인생까지 부드러울 수는 없었다.
골반과 무릎이 박살 났던 것 이상으로 정신도 무너진 탓이었다.
보훈 대상이니, 보상이니, 보험이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내 전부였던 군복을 벗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랬다.
그것도 작전이나 훈련 중 부상이 아니라, 휴가 중의 교통사고라서 더더욱 억울했고.
이후 10년은 정말 죽지 못해 살았었다.
당연하게도 생활이 전체적으로 열악해졌고, 얼마 안 남은 인간관계도 사라지고 몇 명 안 남았었다.
특전사 동기와 선후배 몇 명.
그 끝에 진지한 표정이 된 호세의 얼굴이 보였다.
“호세,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네 말이 맞아.”
“그러면 다음에 모이자고, 네가 팀장과 만나서 놀았다는 걸 듣고 은근히 부럽더라고. 델타들을 다 꺾었다는 것도 듣기 좋았고.”
그 말에 옅게 웃음이 났다.
“씰도 그렇게 될 텐데… 괜찮겠어?”
“흐흐흐, 실은 나도 그걸 보고 싶었거든.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씰을 상대해 본 적은 없잖아?”
“너 빼고는 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네가 델타 모임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더라고.”
그렇게 쓸데없는 잡담을 할 무렵, 근처의 인도 해군이 미 해군으로부터 인계라도 받듯 대신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출항했던 항구, 인도 구자라트(Gujarat)주의 칸들라(Kandla)시까지.
그렇게 늦은 저녁이 되고, 항구에 도착할 때였다.
- 전원 집합.
무전으로 제이크의 명령이 떨어졌다.
동시에 내 옆에서 내내 쉼 없이 말을 조잘대던 호세가 손으로 이해 못 할 제스처를 취했다.
“아, 이런… 저녁 먹을 시간에 새 임무라도 내려온 건가? 젠장할… 날도 더운데, 설마 인도에서 하진 않겠지? 좀 시원한 곳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불평이 담긴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제이크에게 가자, 그의 예상처럼 새 임무가 떨어졌다.
작전지역은 다행히 인도가 아니었다.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이었다.
* * *
“이런 병신들 같으니! 해적이란 새끼들이 그깟 화물선 하나 처리 못 하나?!”
말을 뱉은 지안드로가 주먹을 틀어쥐었다.
타깃으로 삼았던 화물선에 총탄 자국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탓이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저택에서 당한 습격과는 달랐다.
그때는 CIA와 정보조사국, 국가안보국 같은 유력 기관들이 개입해서 온갖 지원을 다 했고, 이번에는 반대로 지안드로가 피칼의 자금을 지원받아 해적들을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선 하나에 딸린 수백 명의 해적을 모조리 움직일 만한 거금을 동원했었다.
탄약과 총기까지 적잖게 지원해 줬고.
또한, 정확한 통신을 위해 수족들을 보내어 왜곡 없이 의사소통도 했었는데,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정보였다.
습격 방법과 규모, 위성사진, 배의 설계 도면 등등.
‘주둥이 앞까지 수프를 떠 줬더니, 그걸 못 처먹고 다 흘려……?’
그의 이가 빠득 갈렸다.
심지어 해적에게 모든 걸 맡기지도 않았었다.
보트 몇 척에는 용병들만 태웠었다.
주로 남미나 동유럽 특수부대 출신으로 이뤄진 이들.
한데 그들마저 연락이 끊겼다.
마지막에 소말리아에서 대기 중인 부하를 통해 전해 들은 얘기는 저격당했다는 소식이 전부였다.
물론 지안드로에게는 되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도 장교 출신이었고, 저격이라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코만도 출신이라는 새끼들마저 그런 병신 같은 변명을 하다니…….’
화물선의 모든 인원이 저격 소총을 든다고 해도, 100명이 넘는 해적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작전대로만 하면 절반 이상의 보트가 난간에 갈고리를 달 수 있고, 승선해서 교전 후 선박 납치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정 안 되면 RPG-7을 쏴도 될 일이고.
물론 인근에 해군들이 너무 가까이 있긴 했지만, 그걸 무시할 만큼 해적이 많았다.
보트 한두 척이 아닌, 수십 척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작전은 실패했다.
선수금만 수만 달러를 소요했고, 소말리아 북부로 해군들이 상륙해서 해적 근거지까지 털었다.
수하는 급하게 몸을 내뺐고.
그러나 아마 관련 정보가 어느 정도 새어 나갈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것도 걱정이 크진 않았다.
피칼의 선은 미국 내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으므로, 정보가 자신의 귀에도 들어올 터.
다만, 실패했다는 게 걸렸다.
세르게이처럼 자신이 죽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당하지도 못했다.
어쨌든 실패했으니.
“지상에서도, 해상에서도 이따위 상태라면…….”
지안드로가 중얼거리면서 결심을 내렸다.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