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며칠이 더 흐른 6월 말, 워싱턴 D.C, 해리 S. 트루먼 빌딩.
국무부 대외협력국으로 기밀 처리된 전자메일이 도착한 뒤, 로버트가 곧장 암호를 입력하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가 기다렸던 보고서였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저택에서 수집한 증거물 분석을 비롯해 중부 유럽에 위치한 CIA의 블랙 사이트(Black Site)에서 이뤄진, 중국인과 이탈리아인에 대한 각종 취조 내용을 담은 결과물.
이를 일일이 확인하던 로버트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일그러지듯 주름이 잡혔다.
“설마…….”
혼잣말까지 흘려 낸 로버트가 보고서의 남은 부분까지 마저 읽어 내려갔으나,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중국인을 취조한 결과가 썩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 안에 쓰인 단어 몇 개가 제법 심각한 것들이었다.
‘중국의 핵물리학자에 핵무기 연구원 출신…….’
까딱 잘못하면 핵미사일 개발과 연결될 만한 키워드.
당연하게도 극도로 위험한, 또한 비상한 일이거나 대외협력국을 넘어서서 국가적인 대응이 필요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언급된 것들이 다름 아닌 핵이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추이를 살피는, 또한 미국이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부분.
다만, 아직 정확한 게 아니었다.
로버트가 너무 지나치게 상상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핵미사일이라는 게 중국인 한 명이 왔다고 해서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국가적인 역량이 필요했다.
그래서 확정 지을 순 없었으나, 그렇다고 예상이나 추측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탓이었다.
세르게이의 뒤를 이어 테러를 계획하고 저지르는, 전 이탈리아 특수부대 출신으로 대외협력국 추적 순위 1위에 오른 지안드로.
그는 최근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우라늄까지 불법 유통시켰었다.
판매라고 짐작했었으나, 이렇게 되면 우라늄을 가공하거나 사용했을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아쉬운 건 그 외에는 핵미사일과 연결시킬 만한 단서가 없다는 것이었다.
SSE를 진행한 각종 증거물이나 사망한 용병들과 관련된 내용이나 양손을 잃은 용병의 심문 결과도 마찬가지.
그 끝에 로버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쩌면 인질극도 협박이 아니라, 정말 살해하려던 것일 가능성도 있겠어. 계획 유출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
갖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판단을 내린 로버트가 콩고민주공화국의 작전 자료를 챙기며 일어났다.
서둘러 상부에 보고하려는 것이었다.
어쩌면 핵미사일과 관련된, 분초를 다툴 만한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국장실을 나가던 그가 주춤했다.
“……!”
상부에 보고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작전 당사자, G&G Corp TF.
‘위험할 가능성이 있겠어.’
단순 짐작에 불과하나, 작전을 진행했던 팀이 보복당할 수도 있었다.
테러를 저지르거나 사주하는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보복 심리가 센 미친 인간인 탓이었다.
40여 명이 몰살당한 트리에스테의 작전은 충분한 빌미가 될 터.
그나마 다행인 건 작전 이후로 열흘 이상 조용했다는 사실인데, 그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G&G Corp TF 팀 전원이 트리에스테의 5성급 호텔에 머물렀으니까.
심지어 외출도 거의 하질 않았었다.
작전 이후 보안을 목적으로 대기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승선 과정이나 아덴만, 혹은 공해에서 공격당할 가능성이 가장 큰데…….’
벽에 걸린 시계 중 이탈리아의 현지 시각을 확인한 로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승선은 이뤄졌고, 긴급한 연락은 없으니… 항해 과정이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물론 이 역시 미리 대처는 해 뒀었다.
바로 해군 함정 배치.
정확히는 화물선이 이동하는 경로 인근에서 순찰하도록 지시를 내려서, 비상시에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해 둔 것이었다.
인도의 구자라트주 칸들라 항구에서 출항할 때도 그랬었다.
주로 소말리아와 예멘 사이에 있는 아덴만과 아라비아해 일부 위주로.
알샤바브 무장 단체를 상대한다는 이유로 미군 아프리카 사령부 예하 병력도 소말리아 북동부 해안가에서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그러나 보복 테러가 준비됐을 가능성이 있다면 말이 달랐다.
띡.
바로 인터폰 버튼을 누른 로버트가 비서의 대답도 듣기 전에 지시부터 내렸다.
“수에즈 운하부터 아덴만, 아라비아해까지 이어지는 항로 인근의 각국의 해군 현황과 5함대 상황 파악하고 협조 가능한지 확인해서 보고해.”
* * *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역시 드넓은 바다만큼 좋은 게 없어. 답답한 방구석의 공기 따위와는 차원이 달라. 마치 내 고향 같은 부대에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호세의 말이었다.
말을 중얼거린 그가 승선한 화물선 갑판의 난간을 쥐고서는 한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나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거대한 저택에서의 교전 이후로 내내 호텔에서 대기했기 때문이었다.
보안이나 안전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2주 가까이 호탤 내의 헬스장과 수영장만 들락날락거렸었다.
중간에 방안에서 마커스와 스파링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실수로 가구를 뒤꿈치로 찍어서 부수는 바람에 단발성으로 그쳤었다.
결국에 다소 답답한 생활만 했고, 출항 날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음, 리! 저거 보이나? 항구는 아름답고, 지중해는 근사하고… 네 생각에도 해군이 역시 낫겠지? 그중에서는 씰이야말로 최고라고 할 수 있고, 안 그래?”
“갑자기 해군을 왜… 그건 모르겠고, 바다가 멋있긴 멋있네.”
지중해를 보는 사이.
화물선이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항구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리가 배 폐쇄실에 보관해 두었던, 커스텀 된 우리 전용 총기를 배분했다.
철컥.
습관적으로 노리쇠부터 당기며 확인하고, 각종 장비 착용을 마친 뒤.
아직 멀쩡해 보이는 레이첼을 보며 물었다.
“레이첼, 너무 심하면 근무 같은 건 서지 말고 쉬어요. 내가 두 번 이어서 해도 되니까.”
오는 길에 배멀미에 끙끙 앓으면서도 불침번과 야간 경계를 꾸역구역 해낸 게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와의 근무 교대도 별로 내키지 않았었다.
단순히 아파서 배려한 게 아니었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힘든 탓이었다.
위험할 때는 내 등을 지켜 주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이유로 차라리 내가 대신 해 주고 싶었으나, 레이첼은 그 반대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 일은 내가 할게요, 괜찮아요.”
“오는 길에도 특이 사항 같은 게 없었으니까, 그냥 말대로 해요. 팀원 괴로운 걸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레이첼은 나 아프면 가만 놔둘 겁니까?”
“당신이 아프면… 마음이 아프겠네요. 그럼 나도 고려는 하고 있을게요.”
레이첼이 그러면서 자신의 무장을 챙기며 돌아섰고, 해리가 뒤에서 날 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씰룩이기는 호세도 마찬가지.
“…….”
괜한 소리가 나올까 싶어 돌아서서 미리 예정된 경계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아드리아해를 볼 무렵.
치직.
무전음이 도착했다.
- 여기는 제이크. 각 인원 무전 수신 여부 및 감도 확인 바람.
작전 전에 제이크가 통상 하는 내용에 답하고, 다른 이들의 목소리까지 들을 무렵.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 그리고 출항 과정에서 상부 전달 사항이 내려왔어. 기존 해적선만이 아니라, 다양한 루트의 적습이 예상되므로 각별히 주의할 것. 현장 판단에 따라 필요시 모든 선제적 조치를 허용함. 다들 들었나?
그의 말에 차례를 지켜 대답하면서도, 단어 몇 개를 곱씹었다.
적습 예상, 모든 선제적 조치 허용.
단순히 필요에 따라 선제공격을 허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제법에 따른 무기 제한 등을 어겨도 된다는 말처럼 들렸다.
맥락이 그랬다.
그저 먼저 공격해도 된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
동시에 짐작이 맞다는 듯한 답이 돌아왔다.
- 그럼 현 시간부로 단순 해적선만이 아니라, 접근해 오는 모든 선박과 항공기도 경계 대상으로 간주한다. 필요시 자의적 판단에 의한 발포 역시 허가하며, 가능하면 위협사격을 하되, 필요하면 조준 사격하여 적을 무력화시키도록.
- AT4(일회용 대전차 화기)도 사용 가능합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해리가 물었는데, 허가가 금세 떨어졌다.
- 그래, 선박에 폭발물을 실었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도록.
AT4는 개인 무장이 아닌, 팀별 화기로 이 역시 화물선에 실린 물건이었다.
당연히 국제법상 용병이 쓸 수 있는 장소가 제한된 무기였는데, 그것도 다 무시한다는 소리였다.
동시에 왜 그러는지도 이해가 됐다.
‘아마, 그 과학자 때문이겠지.’
아마도 핵 개발과 관련된 인물일 것이고, 그를 토대로 핵미사일과의 연관점을 짚어 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강력한 지시가 내려왔을 터.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가다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과학자 뺏겼다고 보복하는 거라면…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는 말인데? 그럼 핵전쟁도 좀 더 늦춰졌다는 소리겠네.’
게임 내에서도 지금 즈음이면 주요 테러가 진행될 시점이었다.
눈가리개 따위로 쓰일 미국의 테러도 여름에 터질 거였고, 핵폭발 역시 반팔을 입을 즈음에 발생하는 엔딩이었다.
정확한 날짜까지 나오진 않지만, 따지자면 길어 봤자 2달 정도 남은 셈.
그러나 이는 게임 속의 일이었다.
대충 봐도 당장 핵전쟁이 일어나는 건 상당히 요원해 보였다.
물론 마냥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과학자를 데려가려던 것처럼, 여전히 핵을 갖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니까.
‘어휴, 바퀴벌레 같은 새끼…….’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모래포대 뒤에 서서 난간 너머의 배들을 경계했다.
멀찍이 여객선이나 어선 같은 게 떠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크게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었다.
아직은 가장 안전한 바다 중 한 곳인 지중해를 못 벗어난 탓이었다.
최소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서 홍해에 진입해야 신경 쓸 게 생겼고, 치안이 가장 불안한 예멘과 소말리아 사이의 아덴만은 해적의 근원지라고 볼 만한 바다라 더더욱 주의해야만 했다.
경험자인 호세가 알려 준 사실이니, 더더욱 믿을 만할 터.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 호세가 다가왔다.
“나만 믿으면 돼, 리.”
호세가 인도에서 출항했을 때처럼 그리고 여느 때처럼 웃으며 말했는데, 그 모습이 생각보다 든든해 보였다.
입이 가볍기는 해도, 거짓말을 하는 부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는 길에 그에게 들었던 여러 가지 정보들도 그저 썰이 아니라, 내가 모르던 정보이기도 했고.
“믿을게, 호세.”
그에게 답하고 난 며칠 뒤, 홍해를 지나 아덴만에 접어들 무렵에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호세, 여기는 리. 3시 방향 보여? 저거 해적 보트치고는 너무 큰데… 정체가 뭐야? 어선? 아니면 화물선이나 작업선 같은 거야?”
- 여기는 호세. 잠깐 기다려 봐. 3시 방향이라… 오, 제기랄.
“왜?”
갑작스러운 비속어에 되묻자, 흠칫할 만한 말이 들려왔다.
- 모선(母船)처럼 보여.
해적 보트를 내려다 주고, 해적들이 쉬는 일종의 본부 같은 거대한 배가 바로 모선이었다.
스타크래프트의 캐리어 같은 존재랄까?
화물선에 달려드는 보트는 거기서 나온 인터셉터와 비슷할 터.
이는 내가 아라비아해와 아덴만, 홍해를 지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저 호세에게서 얘기로만 들었던 배였다.
“그게 여기 있다는 건…….”
- 젠장, 근방에 해적들이 엿같이 많다는 뜻이지. 모선 뒤로 발생하는 물살이나 갑판에 움직이는 거 보여? 버려진 모선도 아니고, 아주 멀쩡한 거야.
그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여기는 레이첼. 7시 방향에서 미식별 선박 접근 중.
그 말에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이야… 시작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