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지안드로 바시카날이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에 뜬 파일 때문이었다.
바로 G&G Corp에 소속된 직원 몇 명에 대한 정보.
개중 험상궂은 인상의 제이크를 비롯해 아시아 인종인 강태의 얼굴을 본 지안드로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흘렸다.
“후, 이 벌레 같은 것들이 또 왔구나…….”
대외적인 신분 정도야 파악하고 있긴 했지만, 아직 그 정체가 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특히 배후.
파악한 바로는 최소 유력가인 개인, 혹은 CIA 같은 정보 기관, 더 나아가 미국 자체가 뒷배로 있을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아니면 유럽 같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열강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컸다.
그 이상은 파악이 쉽지 않았다.
피칼이 자신의 뒤를 봐주며 정보를 희석해 주듯, G&G Corp의 TF(Task Force) 역시 상세한 내역은 삭제 처리되어 파악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더불어 휴가철마다 서류, 행정상으로 조직 개편이 이뤄져서 정보를 따라 쫓는 게 어렵기도 했다.
임무 투입 직전에야 확정되므로, 염두에 두고 일을 벌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육안으로 보는 게 가장 확실했다.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부하의 보고도 직접 확인해서 이뤄진 거였고.
그래서 영 까다로웠으나, 그렇다고 치명적일 만큼 위협적이진 않았다.
애초에 피칼의 대업을 막을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피칼의 칼과 총이었던 세르게이가 그 과정에서 팀과 함께 처절하게 전멸하긴 했으나, 그건 모습을 드러낸 그의 잘못이었다.
‘직접 움직일 때와 사람을 써야 할 때도 구분하지 못하고, 늘 뛰어든 게 문제였어…….’
지안드로가 혀를 찼다.
그가 용병을 고용해서 세계 각지로 보낸 것도 같은 이유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도 마찬가지.
괜히 사람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피칼의 흉내를 내기 위함도 아니고, 권위를 부리려는 것도 아니었다.
손발을 대행하는 자로서 조심했어야 했다.
반면에 세르게이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걱정하지 않았고, 너무 무식하게 움직였었다.
죽은 이유도 다른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교전 현장에 발 담그지 않았다면 지금도 살아 있었을 테니까.
‘보스의 대업을 맡기에는 부족했던 거지. 전투와 테러에 능하다고 해 봐야… 결국 현장에서 일할 놈이고.’
지안드로가 그렇게 바다가 내다보이는 발코니로 시선을 옮겼다.
비슷한 바다지만, 명백히 달랐다.
그는 트리에스테가 아닌 지중해 건너편의 모로코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일은 진행이 됐다.
장거리일수록 통신이 어렵고, 감청이나 재밍 따위를 조심해야 하지만, 드러나지만 않으면 쫓아올 수도 없었다.
물론 콩고민주공화국의 광산 따위가 발각되는 바람에 아직까지 이유를 파악중이긴 했지만, 여러 번의 검토 결과에도 큰 실책은 없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내부자 연루나 정보 유출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깨끗했고.
“놈들의 운이 좋았다고 봐야겠지, 우연이든…….”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달리 생각할 다른 구실은 없었다.
지안드로가 피칼을 만나게 되었던 것처럼, 우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신적인 존재가 계시라도 줬다면 모르겠으나, 설령 그렇게 되었다 한들 걱정할 만한 건 없었다.
대업은 굳건했다.
콩고에서 이뤄진 온갖 교전에도 불구하고, 더 이전에 세르게이가 죽었을 때도 그렇고, 모든 일정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전 세계의 질서를 바로 잡든, 멸망으로 몰아넣을 일.
바로 핵 개발이었다.
‘이것만 완성된다면… 보스의 대업도 이룰 수 있겠지. 혁명이 머지않았어.’
지안드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적이 코앞까지 다가오긴 했으나,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트리에스테라는 땅이 그랬다.
세르비아 접경 지역으로 핵 개발 중인 동유럽으로 가는 길목이면서, 피칼과 가까운 중국의 영향력이 막강한 항구도시.
여태 들어간, 그리고 들어갈 중국의 자금은 수억 유로에 달했다.
피칼의 돈도 어느 정도 들어갔을 수도 있었고.
그런 이유로 트리에스테에서는 제이크나 강태가 갖지 못할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고, 보장받고 있었다.
그래서 완전 무장을 하고 등장했어도 두렵지가 않았다.
거긴 전장이었으나, 트리에스테는 멀쩡한 항구도시로 제대로 된 총기 소유도 어려울 테니까.
‘해 봤자, 권총으로 뭘 하려고?’
제대로 된 돌격 소총과는 위력과 사정 거리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게 권총이었다.
트리에스테에 있는 그의 부하와 용병들을 이길 순 없었다.
군대에 버금가도록 무장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지안드로가 부하에게 들은 정보를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겨 추가했고, 보안 처리된 회선을 통해 자료를 업로드했다.
딸깍. 딸깍.
서류 가방보다 두꺼운 노트북 화면을 보며 마우스를 누르던 그가 곧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새 선불 폰을 꺼내어 준비했다.
곧 진행될 접선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예정이었다.
‘어떤 수작을 부릴진 모르겠지만, 여길 뚫겠다면야… 두 팔 벌려 환영해야겠군.’
지안드로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화면 속에는 족히 수십 명이 넘는 용병들이 완전 무장하고 대기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 * *
속리산에 비트를 파고 들어가서 3박 4일 내내 대기했던 날이 떠올랐다.
더불어 완전군장을 하고도 출동하지 않고 종일 영내 대기했던 때나 탑승한 수송 버스에서 한나절을 기다렸던 날까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마냥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와 상황이 같진 않았다.
위치한 곳부터 훈련지인 산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항구도시고, 전투복 대신에 청바지에 긴팔 셔츠를 입었고, 짬 대신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즉, 정박한 화물선에서 내려서 2주간 휴가를 받아 쉬는 거였다.
그것도 레이첼과 함께.
정확히는 2인 1조로 팀을 짜서 위장 근무 중인 상황이었고, CIA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컨데 타깃 이동이나 관련된 다른 정보들.
그사이, 레이첼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특이사항이라도 있어요?”
“아… 아뇨, 그냥 옛날 생각해요.”
“옛날이라고 하면, 유치원 다녔던 때를 말하는 거예요?”
레이첼이 그렇게 말하면서 웃어 보였다.
“생일도 아직 안 지나서 29살일 텐데… 옛날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아요?”
“음, 스물아홉이었지. 그럼 적당히 예전으로 합시다.”
“푸흐흐, 나이 많은 아저씨가 정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러기에는 너무 눈치가 없구…….”
“크흠.”
나이 많은 아저씨. 한국의 내 몸뚱이가 절로 떠오르기에, 얼른 화두를 바꿨다.
“근데 몸은 좀 괜찮아 보이네요. 배에서 내리니까 많이 나은 모양이죠?”
“네, 이제 살 것 같아요.”
“돌아갈 때는 또 어떻게… 배 타야 하잖아요? 말해서 비행기 따로 타고 가요.”
배려해서 말했더니, 레이첼이 고개를 저었다.
“상황 봐 가면서 해야 되는 거면 이 일 그만둬야죠.”
“바닷길이 그래도 한가하잖아요. 해적도 쉽게 안 덤비고, 그거 아니어도 할 것도 없고.”
“저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거야 그런데…….”
“혹시 여자로 보는 거면, 그것까지 부정하진 않을게요.”
그 소리에 눈을 껌뻑이는 사이.
치지직―
무전 잡음이 들려왔다.
지난 며칠간 해 왔던 감도 체크나 특이 사항을 묻는 것으로 생각할 무렵.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폭스트롯1, 타깃 이동 확인되었으며, 전원 이동 준비하도록.
“……!”
주춤하는데, 같은 내용을 듣던 레이첼의 눈빛도 일순 바뀌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내내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는데, 그와 별개로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대외협력국에서 최초에 제공한 정보부터 아주 제한적이었다.
지안드로와 수하인 타깃의 사진, 이름, 신분, 위치 같은 간단한 신상 명세 등등.
나머지는 현지에서 업무 협조 중인 CIA의 도움을 받아 확보해야 하는데, 그들의 움직임도 보안 때문에 제한되어 있어서 다소 부실했다.
육안 감시와 미행, 기계를 통한 감청을 시행 중이라는데, 얻은 게 없었다.
단 하나, 예정된 미팅이 있다는 사실뿐.
상대가 누구인지, 언제 만날 건지, 뭘 할 예정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타깃의 무전이 온 것이었다.
아는 게 필요한 상황인지라, 해리와 짝을 이루고 있던 마커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폭스트롯1, 여기는 폭스트롯2. 추가 정보는 없는지? 위치나 인원…….
-움직인다는 정보만 전파되었음. 현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행동하되, 도심지 내에서의 격발은 가급적 주의하기 바람.
돌아온 답에 입술을 씹게 됐다.
여전히 정보가 없다는 말이고,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긴장이 되는 상황.
심지어 힘이 되어 줄 제이크는 너무 눈에 띄는 바람에 정박 중인 화물선에서 호세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즉, 자칫 잘못하면 4명이서 큰일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
-타깃 차량 이동 예상됨. 검은색 시트로엥 SUV. 차량 이미지 및 번호 PDA로 전파하겠음.
벌떡.
“가요, 진짜 데이트하러.”
레이첼이 짧은 말과 함께 바로 일어났고, 나도 뒤따라 일어나서 움직였다.
방향은 주차된 소형 세단.
명목상 대여했으나, CIA에서 업무 협조차 내어 준 차량으로 안에 준비된 게 제법 있었다.
다량의 탄약과 기관단총인 MP7, 총기 번호를 지운 구형 저격 소총 한 정 그리고 신호탄, 연막탄, 섬광탄까지 고루고루 있었다.
내가 쓰던 것들이 아니라 아쉽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긴 전장이 아닌, 이탈리아의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발각되도 그나마 괜찮은 것들로, CIA가 출처를 지우고 마련한 물건들이었다.
그사이, 레이첼이 운전석에 올랐다.
덜컹.
나는 조수석에 타면서 바로 허리춤 안에 넣었던 글록19부터 꺼내어 확인했다.
부르릉―
이어서 곧장 시동이 걸릴 무렵, PDA로 전달받은 차량 이미지를 보는데, 어느새 짐작했던 무전이 전파됐다.
-타깃 차량 이동 시작. 호텔 앞 도로에서 남동쪽 방면.
그리고 거의 동시에 레이첼이 액셀을 밟아 차량을 출발시켰다.
몸이 시트에 확 붙기를 잠시.
의자 밑에 은닉했던 MP7도 꺼내어서 약실과 탄창을 모두 확인했고, 들려오는 무전에 좀 더 긴장할 때였다.
-여기는 폭스트롯1, 폭스트롯6와 함께 합류하겠음.
제이크가 해리와 온다고 선언했고, 동시에 바뀌는 이동 방향이 들려왔다.
-현재 타깃 차량 SS14 도로 북동 방향으로 이동 중.
“이거… 어디 가는 거지?”
혼잣말과 함께 지도를 확인하는데,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트리에스테 도심지에서 점점 멀어지더니, 어느새 세르비아 접경지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국경 방향 아니에요?”
지도를 보지도 않고 레이첼이 묻기에 그렇다고 답하려던 순간, 다행스러운 말이 들려왔다.
-타깃 차량 정차, 폭스트롯 2와 약 3마일, 폭스트롯 3하고 2마일 정도 떨어짐.
2마일이면 내 총으로 저격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내다볼 무렵.
거리를 가늠하다가 주춤했다.
“아, 설마 저건가……?”
언덕과 비탈이 있는 산지의 도로로 접어들었는데, 커다란 건축물 하나가 보인 탓이었다.
거의 성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커다란 별장이었다.
그것도 이탈리아에 어울릴 만큼 멋드러진, 또한 사유지의 별장처럼 보이는 건물.
여태 거쳐 왔던 전장과는 확연히 다른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