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배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출항했다.
연안에서 금세 멀어졌고, 후덥지근했던 날씨가 풀리기 시작했다.
대신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눅진하게 들러붙었는데, 바람이 불어와서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밤에 물들기 시작한 바다 풍경도 괜찮았고.
걱정이라면 앞으로 수행하게 될 임무와 바닷바람으로 인한 총기 수입만 있을 뿐.
“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느새 화장실을 다녀온 호세가 다가오며 묻기에, 총기 멜빵에 걸린 HK416을 들어 보였다.
“이거 닦을 생각.”
“왜… 아, 염분 때문에 그래?”
“경계 근무 끝나자마자 바로 해야겠어. 총도 벌써 끈적거리는 것 같아. 까딱 잘못하면 기능 고장 나게 생겼어.”
“흐흐흐, 역시… 너답군. 다들 딴생각부터 하는데.”
“나는 할 생각도 없어.”
“없기는? 물론 네게 가정이나 애인이 없긴 하지만, 앞으로 레이첼과의 관계라던가. 장래, 은퇴한 다음의 일이나…….”
호세가 늘어놓는 말에 끼어들어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레이첼이 왜 나와?”
“두 사람, 서로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누가 그래?”
“아무도 말하진 않지만, 다들 아는 사실인걸.”
“다들 안다고? 무슨… 이번 휴가 때도 연락 안 하고, 만나서도 별일 없는데… 뭘 보고……?”
의아해서 되물었는데, 호세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으음, 제이크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나 같은 로맨티스트의 눈을 피할 순 없지.”
말을 잇던 그가 어느새 헬멧에 달린 야투경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보다는 너의 앞으로가 중요한 거지.”
“앞으로가 중요하긴 하지.”
곧 수행하게 될 이탈리아에서의 작전, 피칼의 행방이나 핵전쟁까지.
중요하지 않은 게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가 흘러나왔다.
“레이첼이 어떻게 먼저 연락하겠어? 네가 놀거나 쉬는 거면 몰라도… 4주 내내 훈련했다면서? 해리 말로는 포트 잭슨(미 육군훈련소) 일정하고 다를 게 없다던데. 거기에 전화해서 데이트하자고 연락할 수 있을 것 같아?”
“하면 하는 거지, 뭘…….”
“오, 이런. 레이첼이 너처럼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훈련 중인 사람에게 연락하겠어? 쉬거나 노는 거라면 몰라도 말이야.”
“너처럼이라니…….”
“그것보다 리, 휴가 중에 하루도 안 쉬고 훈련 루틴을 그대로 반복하는 이유는 뭐야? 정말 인간 병기라도 될 생각이야? 너는 이미 괴물 같은 놈이잖아.”
“아냐, 아직 멀었어. 배울 것도 많고. 그리고 놀 때도 아니야, 지금은.”
“놀 때가 아니라고? 왜?”
호세의 물음에 나도 야투경을 내리면서 대답했다.
“작전 준비해야지. 까딱 잘못하면… 알잖아, 너도?”
“오, 이런. 평소에도 그 생각뿐이야?”
“일단은.”
말은 ‘일단’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피칼이 사라지면서 핵전쟁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였다.
아니면 다른 꿈을 꿀 수조차 없었다. 세계가 초토화될 테니까.
“와… 넌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놈이었구나. 델타 모임을 초토화시켰다더니… 근본부터 너는 인간 병기였던 거야.”
“칭찬으로 들을게.”
“젠장… 팁을 줄려고 했더니, 신경도 안 쓰겠군.”
“팁?”
무슨 소린가 묻자, 호세가 야투경의 터렛을 돌려 단단히 고정하면서 답했다.
“레이첼이 어떤지 모르지?”
“어떻다니?”
“그녀가 멀미를 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눈만 깜빡였다.
게임하면서는 당연히 언급된 적 없던 얘기였거니와, 현실에서도 굳이 물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호세가 지나가듯 물었던, 멀미는 없냐는 말이 떠올랐다.
“알아서 약도 다 챙겨 왔더군. 심해 보이진 않았는데… 멀미가 있다는 걸 알고 보니 티가 나더라고. 그러니까 리, 너도 동료에게 관심 좀 가져.”
늘 말 많던 그가 한 말이라서 가볍게 대꾸하고 말았는데, 돌아보니 호세는 그렇게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냥 떠든 게 아니었다.
‘수다맨으로 알았더니…….’
호세가 새삼 다시 보일 무렵.
“근무 끝나고 슬쩍 가 봐. 몸 괜찮냐고 물어보고.”
“어떤데? 임무 수행은 할 수 있고?”
“이런 젠장, 이 와중에도 임무 타령이야?”
“당연하지, 여기서 레이첼처럼 드론 조종할 수 있는 사람 있어? 아니어도 그녀는 웬만한 특수부대 1인분 몫을 하는…….”
“알았으니까, 하여튼 가 보기나 해.”
그나마 다행인 건, 배에서 내리면 멀미가 낫는다는 점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충분히 제 몫을 할 터.
그사이, 호세의 목소리가 다시금 뒤를 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리. 내가 왜 네 첫 근무 파트너인 줄 알아?”
“글쎄?”
“내가 씰이잖아, 우리 중 유일한 바다의 전문가. 네가 인간 병기이긴 하지만, 특전사였다면서? 그래서 널 가르치기 위해 같은 조가 된 거야. 보조하고 도움도 주고. 방금 레이첼에 대해서 조언을 해 준 것처럼.”
“잡담은 아니고?”
“무슨 소리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뼈와 살이 될 거야. 이건 배를 타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거든.”
그렇게 야투경을 쓴 호세와 내가 나란히 앉아서, 모래 포대 너머로 바다를 보며 대화를 나눴다.
따지자면 주로 호세가 말하고, 나는 묻거나 대꾸한 게 전부였지마는.
어쨌든 거기서도 배운 게 있었다.
일종의 썰 비슷한 자랑과 쓸데없는 얘기가 다수였으나, 그 얘기들이 각종 해상 교전에서 비롯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어선으로 변장한 해적들의 특징과 행동 양상, 전투력까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역시 네이비씰 짬…….’
그렇게 근무 시간 내내 지루할 틈 없이 온갖 얘기를 듣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다음 근무자인 해리와 마커스가 오고 있었다.
교대를 마치고 선실로 돌아가는데, 호세가 헤어지기 전에 내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가서 잘 자는지 확인해 봐.”
“…이 시간에? 당연히 잘 자겠지, 뭘…….”
“이런, 안 되겠군.”
“뭐가… 어?!”
말하던 중에 호세가 돌연 선실 문 하나를 두드렸다.
쿵쿵쿵!
레이첼이 배정받은 공간.
동시에 호세가 훌쩍 자리를 떴다.
“난 갈게. 피곤해서 말이지.”
“야이…….”
말하다가 싱글벙글 웃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무렵.
스윽.
닫혀 있던 선실 문이 열리면서, 부스스한 모습의 레이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총기를 든 모습.
“벌써 해적이라도 나온 거예요? 무슨 상황이에요?”
그러면서 눈을 껌뻑이기에, 호세가 두들겼다고 말해 주면서 물었다.
“…멀미라면서요? 괜찮은 거 맞죠?”
“당연히 괜찮아야죠. 출항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아프면 이 일 못해요.”
“아, 그래요?”
“그래요, 하여튼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나중에 심하면, 그때 돌봐 주러 와요. 지금은 좀 자 둬야 할 것 같아요. 심하면 잠도 못 자거든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항해한 지 3일 즈음 되었을 때.
평온해 보이던 아라비아해에 바람이 거세지면서 폭우까지 내린 탓이었다.
“와, 장난 아니네…….”
감탄이 절로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파도가 배를 거세게 때려 댄 탓이었다.
흡사 갑판 위를 쓸어 갈 정도.
날이 좋을 때는 화물선 근처를 얼씬 거리던, 해적선으로 의심될 만한 보트 같은 것도 진작부터 안 보였다.
콰가가가강―!
천둥 소리까지 몰아치면서, 비로소 레이첼이 떠올랐다.
이에 흔들리는 복도를 걸어 도착하자, 예상대로 안 좋은 안색을 한 레이첼이 나를 맞이했다.
“어후, 많이 힘들죠?”
묻자마자, 그녀가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심하면 오라고 했더니, 정말 심할 때 온 거예요? 온 김에 잠깐 앉아 있다가 가요. 음, 기절하면 응급 조치도 해 주고요.”
“예? 기절? 그 정도예요?”
“아직 기절한 적은 없는데, 혹시 몰라서 한 말이에요.”
“해리 불러올까요?”
“괜찮아요. 피탄됐을 때하고 비슷한 것 같긴 한데… 피탄된 건 아니니까요.”
나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레이첼은 호세처럼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피탄된 것과 비슷하다면, 정말 총에 맞은 정도로 아프다고 봐야 했다.
심하면 쇼크로 의식을 잃거나 사망할 정도.
한데 그걸 말하는 레이첼은 좀 아파보이긴 했어도, 기절하거나 죽을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피탄된 건 아니라고 답하는 모습이 아주 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정신력이 보통이 아니네…….’
사명감이나 국가관만 뚜렷한 게 아니라, 인내심까지 대단한 사람이었다.
새삼 깨닫는 사이.
“그냥 거기 있어 줘요. 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좀 더 참을 만하네요.”
“아, 예. 그 정도야…….”
레이첼의 말에 그러겠노라 답하고 앉아 있자, 옅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푸흐, 그럴 줄 알았어요.”
내가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너무 조용해서 그런데 무슨 얘기 좀 해 줄래요? 당신이 한국에 있을 때의 일이나…….”
그렇게 레이첼과 잡담을 나누며 폭풍우를 넘긴 뒤.
오래지 않아 아덴만에 들어갔다.
소말리아 해적들의 고향인 북동부의 해안 지역을 지났고, 성경에도 나왔다던 홍해로 진입했다.
그동안에 별일은 없었다.
레이첼이 괴로워했던 폭풍우가 가장 큰 이슈였을 뿐.
가장 우려했던 해적들은 화물선의 근처를 어슬렁거릴 뿐,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교전 같은 것도 없었다.
매일 하는 거라고는 선내에 마련된 허접한 체력 단련실을 이용하거나 갑판을 뛰며, 종종 부표를 띄워 놓고 사격을 하는 게 다였다.
쉽게 말해서 2주 동안 제한된 훈련을 한 셈.
따지자면 4주간의 휴가하고 루틴은 거의 비슷했다.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나 훈련 방법이 여러모로 제약받았을 뿐.
그리고 어느새 지중해에 닿았다.
“크으, 이거지. 빌어먹을 인도의 날씨보다 백 배는 낫군.”
호세의 감탄을 들으면서 나도 난간 너머의 바다를 내다봤다.
여긴 확실히 경계할 게 없는 곳이었다.
정말 안전하다고 할 만한, 몇 안 되는 바다 중의 한 곳이었으니까.
선박도 탈 없이 항구에 접안했다.
이탈리아 북동부의 항구도시이자 동유럽의 길목 중 하나인 트리에스테(Trieste).
곧 무전기를 통해 제이크의 음성이 전해졌다.
“준비들 해.”
* * *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항구 근처의 호텔방.
이탈리아계 사내가 굳은 얼굴로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들을 바라봤다.
도합 5대의 선불폰.
걸려 올 전화를 기다리는 와중이었는데, 곧 하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휙, 낚아채듯 전화를 든 사내가 번호를 한번 확인하고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받았습니다.”
-7, 9, 8, 3.
“엑스레이, 킬로, 마이크, 파파.”
대뜸 나온 숫자에 알파벳을 차례로 부른 사내의 귀에 진중한 음성이 닿았다.
바로 지안드로 바시카날, 그의 상관이었던 인물이었다.
-방금 타깃과 연락했어. 내일 이탈리아에 도착할 예정이고 항구 통해서 들어온다고 하니, 마중 나가서 받아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자세한 시간은 내일 다시 줄 테니, 그때까지 대기해야 돼.
“예, 알겠습니다.”
-특이사항은?
“위장 요원으로 의심되는 이들의 입국 일자와 위치를 파악 중에 있습니다.”
-위장 요원이라면 그 미국 PMC?
“아직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필요시에 전부 사살해 버려. 우리 타깃을 죽여도 좋아. 정 어려우면 배를 터뜨려도 되고,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사내가 단단하게 답하고, 온화해진 지안드로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애써 주어서 고맙다. 네 덕에 일이 수월하게 흘러가고 있어.
“아닙니다,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아냐, 네 수고로움이 세계에 혁명을 불러오게 될 거야. 보스께서도 지켜보시고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다시금 나온 굳건한 대답.
지안드로의 음성이 만족스럽다는 듯 핸드폰을 건너왔다.
-그래, 조만간 직접 만나서 치하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