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5월 말, 인도 구자라트(Gujarat)주 칸들라(Kandla)시.
암스테르담과 뭄바이를 경유하는 22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는 순간,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콩고 뺨치는 날씬데, 이거……?”
뜨겁고 끈적한 공기가 전신을 엄습하고, 콧속으로 들어가 기도를 꽉 채운 탓이었다.
흡사 폭염 때의 한국 같은 느낌.
미국에 있던 엊그제만 해도 아침에 긴팔 티셔츠와 바람막이까지 챙겨 입었던 터라, 기온 변화가 더더욱 분명하게 체감됐다.
곁에 있던 호세도 느끼는 게 비슷한지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바닷가 습기 때문인지 숨쉬기가 힘들 정돈데……? 차라리 콩고가 훨씬 낫겠어.”
그의 불평에 고개를 끄덕일 무렵.
다행히 더한 소리가 나오기 전에 우리를 태워 갈, 에어컨이 가동 중인 승합차 한 대가 도착했다.
그것도 미군 항공기로 실어 온 화기가 있는 차량.
차에 탑승해서 자연스럽게 각자 총기와 탄약을 장비하는 사이, 운전석에서 뒤쪽으로 뭔가 불쑥 나왔다.
CIA에서 협조차 나왔을 운전사가 내민 새까만 가방이었다.
일명 007 가방.
어느새 총기 확인을 마친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이게 뭡니까?”
“전달하라고 지시받았을 뿐입니다.”
교과서 같은 답에 더 묻는 대신, 제이크가 받아 가방을 열었다.
이미 음어를 주고받으면서 피아 식별은 마쳤으니, 의심할 만한 건 없었다.
따로 가방을 주는 경우가 드물었을 뿐.
이윽고 두꺼운 제이크의 엄지가 가방의 잠금장치를 젖혔다.
달칵.
내심 뭐가 들어 있나, 나도 총기 점검을 하다가 살피던 무렵.
금세 가방의 내부가 드러났다.
‘전화기?’
딱 봐도 각종 보안 처리가 됐을 법한, 어마어마하게 큰 전화기가 들어 있었다.
한국 육군의 대표 통신기기인 PRC-999K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인데, 훨씬 세련되게 생긴 모습.
금세 벨소리가 울렸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제이크가 전화를 받았고, 얼마간의 통화를 한 뒤.
돌연 내게 수화기를 건넸다.
“저요?”
“그래, 리. 받아 봐.”
“아, 예.”
그렇게 전화를 받자, 간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외협력국장 로버트.
국무부 장관과 만나는 자리에 동석해야 했던 그를 이제야 통화로 만나는 것이었다.
-방금 제이크에게 작전 설명은 마쳤습니다, 리. 당신에게 전화를 건네 달라고 한 건…….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릴 무렵.
-아마 이번 작전의 끝에 당신이 말했던 그자, 피칼이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아, 잘됐… 잘됐다기보다는, 하여튼 잘되어 가고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잘되어 간다는 증거지요. 이번 작전 이후로는 정보 취합이 가능해서 머지않아 관련 자료를 전파할 수 있을 겁니다.
“예, 잘됐네요.”
-그리고 이번 작전의 결과에 따라, 추후 작전부터는 대통령 직보도 가능해질 겁니다.
“오… 그것도 잘됐고요.”
대답해 주는 사이, 잠시 뜸을 들이듯 주춤하다가 목소리가 넘어왔다.
-이번 휴가 때 만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참 아쉽습니다. 장관님께 말씀드렸다던 포상 관련한 것도 알려 주려고 했는데, 제가 일이 바쁘다 보니…….
“아, 그거… 예,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는데, 급한 건 아니라 괜찮습니다. 말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해리가 말했던 엄청나게 큰 부지와 자가용 헬리콥터 따위가 확 떠오를 무렵.
로버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마 이번 작전 이후로 어느 정도 진전이 있을 겁니다. 부지 확인 중이고, 확보도 곧 이뤄질 예정이며… 헬리콥터 매물과 면허 수료 과정도 준비를 해 뒀습니다.
“아휴,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이번 작전 역시 잘 부탁합니다, 미스터 리.
“물론이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소 잡담이 덧붙은 것 같은 전화가 끝나고, 동시에 차량도 멈췄다.
“다 왔군, 하차해.”
제이크의 말에 007 가방을 앞으로 넘겨주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
총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나, 다행히 이목을 끌거나 제지받을 일은 없었다.
화물 선적 중인 항구여서 민간인이 드물기도 했으나, 현지 브로커로 위장한 CIA 요원이 등장해서 빠르게 안내해 준 덕분이었다.
반곱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데다가 영어마저 인도식인 사내.
사전에 약속된 음어가 아니었다면, 전혀 알아보기 어려웠을 그가 화물선으로 인도해 주고서는 금세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여기까집니다, 여러분은 선상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
설마 하는 얼굴로 바라봤다.
배는 예상한 커다란 화물선이 맞긴 한데, CIA 위장 요원이 한 거라고는 고작 수백 미터를 인도해 준 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게 끝인가 했는데, 예상이 맞다는 듯 아예 등까지 돌려서 떠났다.
호세 역시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으음, 이번 작전은 보안 등급이 좀 높은 것 같군. 저 콧대 높은 놈들이 운전사와 가이드 역할까지 나눠서 해 줄 줄이야. 거기다 우리 팀장까지 여태 작전 설명도 없고…….”
그 말에 자연스레 제이크를 봤는데, 그제야 대답이 들려왔다.
“정확해, 호세.”
“역시. 자, 해리! 너도 이런 걸 배워야 해. 내가, 아니… 설마 너도 짐작했었어?”
“그럼요, 저도 CIA에서 1년 있었습니다.”
호세가 해리에게 묻고, 그가 답하는 사이.
제이크가 나직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각자 PDA 확인해 봐. 타깃 정보가 있어.”
그 말대로 개인용 PDA를 확인하자, 두 사람이 떠올랐다.
하나는 지안드로 바시카날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수하로 보이는 인물.
사진과 이름, 나이 등 각종 신상 정보와 간결한 이력이 적혀 있었는데, 보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최초에 예상했던, 해상 보안은 구실과 형식에 불과하고,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날이 제대로 된 작전 일시라고.
이어지는 제이크의 말도 마찬가지였다.
“선박이 이탈리아에 정박하고, 하역과 선적이 진행되는 2주 사이에 인원 일부가 선적을 나와서 작전을 진행하게 될 거야.”
“여기보다 날씨는 좋겠군요.”
추임새 같은 호세의 말이 쉼표 역할을 한 뒤, 이어지는 말에 멈칫했다.
“예상한 바로는 타깃과 외부인의 접촉이 이뤄진다고 하니, 그때에 맞춰서 전원 납치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되, 불가능할 시 사살해야 한다.”
납치라는 단어는 작전 대부분이 단순 전투였거나 생포였던 것과는 다른 말이었다.
비슷한 맥락이지만 같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갈 곳은 내전 지역이 아니라, 선진국으로 꼽히는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돌격 소총 무장도 불가능할 터.
이윽고 예상했던 말이 들려왔다.
“하선 시에는 부무장만 은닉하고, 최소한의 발포로 적을 제압할 필요가 있고… 발각될 경우에는 개인 일탈로 치부될 거고, 회사 차원에서 변호사가 붙을 예정이야.”
여태 거쳐 왔던 알 자마쉬, 카마르니아, 콩고민주공화국과는 다른 얘기였다.
물론 라레플에서 비슷한 플레이를 해 본 적이 있지마는, 당연히 지금과는 전혀 달라서 논할 거리가 되지 못했다.
스토리라도 좀 알면 도움이 될 텐데, 전혀 아니었으니까.
한마디로 빡세다는 거였다.
그러자 방금 전에 했던, 로버트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아, 혹시…….’
피칼 얘기는 그렇다 쳐도, 대통령 직보나 포상과 관련된 말이 왜 나왔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다.
‘미리 당근을 준 거였어.’
다가올 채찍을 견디기 위해, 로버트가 전화로나마 날 달래 줬을 가능성이 컸다.
이유도 뻔했다.
내 실력도 실력이라 대우해 주는 건데, 애국심이 실력에 비해 많이 떨어진 탓일 터.
‘내가 미국을 사랑하진 않지만… 그래도 일을 골라하진 않지.’
고개를 젓고 말았다.
나는 라레플을 플레이 했던 사람이었다.
대외협력국의 일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또한 여러 미션도 비밀 공작처럼 이뤄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게임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핵전쟁을 막아야만 한다는 뜻.
부담이 큰 납치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냥 해야만 했다.
피칼을 쫓는 건 게임 설정상 대외협력국이 유일했고, 또한 제일 가까이 갔던 기관이기 때문이었다.
CIA나 NSA도 움직일 수 있겠지마는, 내가 거기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조직이 커서 스파이가 있을 가능성도 있고.
이어지는 제이크의 말도 같았다.
“현지에서 요원들이 보조한다고는 하지만, 큰 역할을 하긴 힘들 거야. 보안 때문에 임무의 전체 맥락을 아는 건 우리밖에 없고, 그들은 단기 임무만 맡았거든. 방금 운전사나 브로커처럼.”
“으음, 그럼 이탈리아에서는 날씨만 좋겠군요, 젠장. 현지 지원도 부족하면 일이 쉽지 않을텐데.”
호세가 고개를 젓는 사이.
어느덧 계단을 올라 선상에 도착했고, 마중 나온 이들 여러 명을 만났다.
선장과 갑판장 등의 주요 승무원들.
그들 중 통성명을 마친 선장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미국 업체고,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들은 직후였다.
“드디어 회사에서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요. 제대로 된 사람들을 보내 줄 줄이야!”
이유를 묻기도 전에 선장이 응어리를 풀어내듯 떠들기 시작했다.
“특히 저번에 출항할 때는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모릅니다. 여기 인도 현지 놈들하고 파키스탄, 대만, 무슨 머저리 같은 아시아계 놈들이 개판을 쳐 놔서… 아아! 이런, 미안합니다.”
말을 잇던 선장이 날 보고 흠칫 놀라며 사과했는데, 그러려니 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PMC업의 발달과 확대로 인해 부작용이 생긴 걸 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재하청, 재재하청에다가 인건비 슈킹까지.
라레플에 들어와 생활하면서 직접 듣고 본 게 있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곧 선장이 움찔하며 말을 이었다.
“그… 미국인 맞죠? 아니면 출신지가…….”
“예, 미국인입니다. 한국 출신이고요.”
“후… 그렇군요, 거긴 말을 안 해서 다행, 아니… 하여튼 실수해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재차 사과하는 그를 만류했는데, 머지않아 왜 그랬는지 알 만했다.
출항 전에 갑판을 돌아다니면서 주요 경계 지역과 사각 지대 따위를 파악했는데, 곳곳에 만들어진 모래 포대 초소가 엉망이기 때문이었다.
위치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이것만 봐도 선장이 왜 우리를 환영했는지 알 것 같군. 정말 일하기 싫었던 모양인데? 아니면 아예 할 줄 몰랐거나.”
호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귀 기울여 듣던 해리가 질문을 했다.
“이렇게 해도 탈이 없다는 건 해적이 정말 많이 줄어들었다는 뜻 아닙니까?”
“아, 소말리아 놈들? 전보다 줄어들긴 했어. 해적질 하던 놈들이 해상 보안 요원을 하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털어먹기도 하거든.”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는 모양이군요.”
“이렇게 일하는 놈들을 고용하는 이유가 뭐겠어? 아직도 까트(Khat: 마약류 식물)를 씹어 대면서 달려드는 병신들이 있거든. 군함도 못 알아보고 AK를 난사하기도 하고. 아! 해리, 해상 보안은 처음이었지?”
“아, 그렇습니다.”
“하하하, 그래. 이번에는 나한테 좀 배워, 내가 많이 알려 줄게. 리, 너도 처음이잖아? 맞지?”
호세가 웃으며 말하기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처음이지.”
말하면서도 멀리 내다봤다.
갑판 난간 너머, 아라비아해의 너른 바다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짙은 바다색에 쭉 뻗은 수평선까지.
너무나도 고요해 보여서 왠지 폭풍 전야처럼 평온해 보였다.
불안하진 않았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다.
‘이번 건 얼마나 빡세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