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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08화 (108/185)

108화

“살면서 이런 경험을 다 해 볼 줄이야…….”

“마침 남쪽에 51구역도 있던데… 거기서 탈출한 초능력자는 아닌가?”

“탈출보다는 51구역에서 내보내서 성능 테스트를 하는 걸지도 몰라. 아! 제이크도 거기서 나온 괴물일 수도 있겠군.”

모의 교전이 모두 끝나고 난 뒤, 한쪽에서 바비큐를 준비하면서 나누는 대화였다.

그걸 듣던 강태가 쓴웃음을 지을 무렵.

“이봐, 친구. 혹시 격투기는? 그것도 사격 실력과 비슷한가?”

누군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고기와 맥주를 마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게 입식 타격 룰의 스파링이기 때문이었다.

그릇 따위를 가져오던 강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격투기는 평범해. 배운지도 얼마 안 됐고.”

“아아, 그것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군. 그 사격 실력에 육탄전까지 뛰어났다면…….”

말꼬리를 흐린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떠는 사이.

옆에서 찔러 오듯 말을 걸었다.

“그럼 스파링은 어때? 한번 해 보겠나?”

“해 봐야지.”

강태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안 그래도 휴가 기간 내내 MMA 체육관을 다니면서 실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상대가 매번 같아서 내심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배운 것 위주로 스파링을 하다 보니, 실전성도 조금 떨어졌고.

‘여긴 많이 다르겠지, MMA 기술은 몰라도 정말로 요인 암살까지 했을 대원들일 테니까…….’

강태가 반가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주변에서 몇몇 사내들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수심 같은 건 아니지만, 강태와 한번 붙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그들을 일으킨 것이었다.

애초에 승부욕과 호승심도 대단한 부류이기도 했고.

그 틈에서 한 사람이 확 튀어나왔다.

“이봐, 나하고 하지.”

테런스였다.

그가 어느새 몇 걸음 다가오면서 말을 이었다.

“저쪽은 다들 체급 차이가 나 보이고… 나하고 비슷하지 않겠나?”

답을 기다리는 그의 흰자위가 까만 피부에 비해 발광하듯 번들거렸다.

진갈색의 홍채도 화악 넓어질 무렵.

“아, 나야 좋지.”

강태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의 심보가 뭔진 몰라도, 스파링에서 질 것 같진 않았다.

휴가 나온 거의 모든 날 MMA 체육관에 가서 훈련하고, 집에 와서는 근력 운동을 반복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호감을 가진 이도 좋지만, 불편한 감정을 가진 상대도 좋았다.

그래야 반칙을 쓰든, 뭘 하든 간에 좀 더 현실적인, 전장에서 볼 법한 싸움이 될 테니까.

물론 테런스의 감정도 여전히 좋진 못했다.

아시안 인종과 정체 모를 특수부대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강태가 그저 돌연변이처럼 보일 뿐.

‘저 말이 겸손 따위가 아니라면, 격투에서는 내가 충분히 이기겠지.’

테런스는 자신이 스파링을 하고, 실전에서 격투를 벌였던 세월을 돌이켜 봤다.

아직 서른도 안 된 강태가 근접할 게 아니었다.

물론 힘 차이가 크진 않겠지만, 테런스는 오랫동안 복싱을 배워서 기술과 체력이 좋았다.

현역 때보다 여유가 생긴 지금이 오히려 더 나을 정도.

그렇게 핸드 랩을 약식으로 감고 두툼한 16온스 글러브를 받아드는 사이, 제이크가 심판처럼 두 사람 사이에 서며 말했다.

“서로 주의하면서 해, 상처 입혀서 좋을 건 없으니까.”

“부하가 많이 걱정되나?”

“너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야, 테런스.”

“그런 건 초보자한테 어울리는 말이지, 제이크. 난 스파링 봐주는 상대라고.”

답하는 테런스가 강태를 훑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까지 짰다.

‘3분 2라운드… 종 울리기 전에 주저앉게 만들어 주지.’

다운도 좋았고, 체력 부담으로 인한 포기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쓰러뜨리는 게 가장 좋지만, 턱을 함부로 돌려놓으면 제이크에게 질책을 듣게 될 터.

‘간에 한 방 넣어 주거나… 체력 고갈로 자빠지게 만드는 게 최선이겠군.’

테런스가 그렇게 계산을 마쳤다.

제풀에 나가떨어지도록 유도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적당히 빈틈을 보여 주면 꼴에 좀 배웠다고 달려들 게 뻔했고, 이후에는 알아서 체력을 내다 버릴 테니까.

그럼 그 틈에 일명 리버샷을 한 방 넣어도 될 일이었다.

이윽고 테런스가 슬쩍 언질까지 했다.

“리, 원한다면 당신은 좀 세게 해도 돼. 내가 다 받아 줄 테니까.”

“그거 좋네, 배운 거 다 써 봐도 되나?”

“할 수 있다면.”

답하는 테런스가 피식 웃을 무렵.

하얀 선을 그어 만든 잔디밭 위로 두 사람이 섰다.

나서기 좋아하던 대원 한 명이 심판을 자처했고, 둘러앉은 관중석에서는 누군가가 야구 모자를 들고서 베팅 금액을 걷기 시작했다.

“버팅 금지, 후두부 가격, 낭심 주의하고… 각자 자리로.”

삐익―

어느새 준비된 호루라기 소리로 경기가 시작됐다.

타닥, 휙!

짧게 잽을 던져 보고, 스탭으로 간을 보던 테런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의 예측대로였다.

‘배우긴 배웠는데… 아직 능숙하진 못하군.’

근 20년간 복싱을 해 온 테런스 자신에 비하면, 강태는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30초 만에 파악을 마친 테런스가 바짝 가드를 올린 강태를 넘겨다보면서 슬쩍 가드를 내린 순간.

주먹이 날아왔다.

휙─ 퍼억! 퍽!

테런스의 안면 좌우로 주먹이 꽂힌 것이었다.

그러나 슬쩍 물러나던, 가드에 가려진 테런스의 눈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일부러 대 줬기 때문이었다.

‘미끼를 물었군.’

맞는 순간에 슬쩍 고개를 돌리고, 몸까지 빼서 충격은 별로 없었다.

반면에 강태는 잘됐다는 듯 달려들고 있었다.

방금 말했듯이 배운 것을 다 써 볼 것처럼 눈을 빛내고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으로.

“들어와!”

테런스 역시 재차 도발한 뒤.

강태가 함정처럼 내어 준 안면부와 복부로 콤비네이션을 쏟아부었다.

중간중간에 로우킥과 미들킥도 섞였고.

바쁘게 주먹을 걷어 내고, 물러서고, 돌아 나오면서도 간간히 빈 곳을 대 주던 테런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힘은 나쁘지 않다만… 이래서야 1라운드 안에 토하면서 주저앉게 되겠군, 멍청한 놈.’

테런스 역시 간이 위치한 복부를 노렸으나, 강태도 방심하지 않는 듯 빈틈을 내어 주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테런스가 일부러 드러낸 기회를 잡기 위해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1라운드 내내.

말 그대로 쉬지 않고 이어진 펀치와 킥의 향연 끝에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삐이익―

동시에 테런스가 가드를 내리면서, 거친 호흡과 함께 강태를 쳐다봤다.

“후욱… 후우… 이런 미친…….”

테런스의 입에서 날숨과 함께 욕설이 나왔다.

어깨를 붕붕 돌려 대는 강태의 모습이 처음처럼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입도 닫혀 있고, 가슴팍도 별로 오르내리질 않는 모습.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3분을 내내 공격하면서 방어도 나름 신경 쓸 만큼 스파링에 공을 들인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녹초는 아니더라도, 체력이 깎여야 정상이었다.

한데 강태는 휴식이 무의미한 표정으로 서 있다 못해, 오히려 잽과 스트레이트를 뻗고 있었다.

마치 1라운드의 감각을 이어 가려는 듯.

그 광경을 보던 테런스의 머리통이 작게 흔들렸다.

‘이걸 2라운드를 어떻게 하라고…….’

이해가 안 되는 건 둘째치고, 그의 체력이 문제였다.

다행히 토하거나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결코 괜찮다거나 버틸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다 받아 준다는 말처럼 피하고 맞아 주느라 바빴던 탓이었다.

호흡이 턱끝까지 가득 차서 밀려 나오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강태보다 먼저 주저앉게 될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빈틈을 만들어 때려 넣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강태가 막 배우긴 했어도, 기초가 꽤 탄탄한 탓이었다.

“자, 2라운드 준비해. 나와.”

억지로 숨을 고르던 테런스가 걸어 나갔고, 강태를 쳐다보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편견과 고집처럼 독기도 적잖게 있었다.

‘씨발, 일단 버티고… 기회 봐서 더티 복싱이라도 해야겠어.’

그렇게 각오했으나, 계획은 어그러졌다.

움직임이 둔해진 테런스를 상대로, 강태가 빠르게 오가면서 주먹과 발을 연달아 움직인 탓이었다.

퍽! 퍼억! 퍼버벅!

견고하게 방어하던 테런스는 새삼 깨달았다.

방어만 해도 진이 빠진다는 사실을.

만약 강태가 힘이 부족하거나 기초라도 딸렸으면 반격할 텐데, 쉽게 그럴 수도 없었다.

여기서 헛주먹을 휘둘렀다가는 카운터를 맞을 가능성이 컸다.

체력 차이 때문이었다.

둘 다 지쳤으면 모르겠는데, 한쪽만 일방적으로 지쳐 가는 상황.

심지어 복싱에 없는 발까지 문제였다.

힘이 세보이지 않아서 버틸 만한 공격일 줄 알았는데, 몇 대 누적되면서부터는 움직일 때마다 휘청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델타포스답게 꾸역꾸역 3분을 채운 테런스가 털썩 주저앉았다.

자의가 아니었다.

점차 쌓인 다리 통증과 체력 감소로 인해 몸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흐억… 흐어…….”

감출 수 없는 호흡을 내뱉는 사이, 강태가 흡족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혹시 스파링 더할 사람 있나?”

묻는 강태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체육관을 벗어난 입식 스파링이 색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상대를 이겼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제이크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역시… 늘 기대를 뛰어넘는군. 해리가 휴가를 함께하겠다고 매달릴 만해. 나까지 그러고 싶으니…….’

어느덧 강태의 첫 휴가가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저격 실력을 드러냈던 때였다.

이번에는 저격과 실용 사격, 거기다 FOF(Force On Force: 사람 대 사람)에서도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지치지 않는 체력에서 나온 격투 실력도 준수했고.

‘오늘처럼 흥미로운 휴가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강태의 활약을 봐서 기뻤으나, 내심 아쉽기도 했다.

어느새 휴가가 다 끝나 가는 탓이었다.

해도 저물고 있었고.

* * *

며칠 뒤, 미국 버지니아주, G&G Corp 본사 사무실.

휴가가 끝나고 오랜만에 본사로 불려 갔는데, 도착하자마자 새 임무와 관련된 문서부터 받았다.

기재된 최종 목적지는 이탈리아.

“오, 유럽…….”

아직 대외협력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설명을 듣진 못했으나, 보자마자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세르게이의 뒤를 잇는 지안드로가 이탈리아 출생이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와 관련이 있을 터.

아마도 신변을 확보하긴 어려울 테니, 관련된 증거나 인물들을 포착했을 확률이 높아 보였고.

그래서 G&G Corp에서 나온 대외적인, 형식적인 임무 용지를 확인할 때였다.

“와우, 이게 뭐야? 선박?!”

갑작스러운 호세의 말에 눈을 껌뻑였다.

항공 티켓이 첨부되어 있어서 들릴 만한 말이 아니었는데, 얼른 넘겨 보다가 깨달았다.

이 항공편은 출발지로 가는 표였다.

[인도 구자라트(Gujarat)주 칸들라(Kandla)시에서 호송할 선박에 탑승(관련 일시 아래 표에 첨부)한 뒤…….]

간단하게 말해서 인도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는 선박 보안 임무였다.

이 역시 라레플에서 해 본 적 없는 거였다.

배에 올라서 교전하는 내용이 조금 있긴 한데, 인도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전혀 없었다.

분명 지안드로 때문에 생긴 새 임무일 터.

“드디어 내 영역이라 기쁘긴 한데… 갑작스러워서 긴장되는군요, 팀장. 뭐 들은 건 없습니까?”

호세가 중얼대듯 말하다가 제이크를 쳐다봤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

제이크가 우리를 잠시 둘러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인도부터 가야 해. 거기서 전파해 준다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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