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02화 (102/185)

102화

오전 무렵의 네바다주 엘코 리저널 공항.

입구에 차를 대놓고 있던 제이크가 시선을 들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큼직한 하드 케이스를 하나씩 챙겨 든 강태와 해리.

제이크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비행은 괜찮았나?”

“그럭저럭이요. 근데… 팀장도 괜찮죠? 포틀랜드에서 여기까지 운전해 왔으면…….”

강태가 큼직한 픽업트럭을 보며 말했다.

잘은 몰라도 주 경계를 넘는 일이라, 족히 온종일 운전해야 하는 탓이었다.

워싱턴 덜레스공항에서 비행해 온 시간보다 더 길었을 터.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해리, 자네는?”

“어제 하체를 하는 바람에 허벅지가 좀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체? 아… 하하하하, 작전지의 일과를 여기서도 그대로 지키는 모양이군.”

“그것보다 더 합니다. 쉬질 않아요.”

“휴가 동안 제대로 배웠겠군.”

“네, 정말… 선배님이 정말 대단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해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가가 끝나 가는 4주 내내 MMA 체육관과 초장거리 사격, 집에서의 피트니스를 쉬지 않고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답하는 제이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오늘 배운 걸 보여 주면 되겠어. 자, 어서 타. 여기서도 한두 시간은 가야 할 거야.”

제이크가 말하며 운전석으로 돌아갔고, 강태와 해리가 자리에 올랐다.

덜컹.

이어서 좌석에 앉으며 차 문을 닫자마자, 해리가 감탄을 흘렸다.

“와… 선배님보다 더한 차라더니, 정말이었군요. 이건 험비가 따로 없네요.”

“너도 하나 사 둬, 리가 괜히 산 게 아냐.”

“넵, 저도 다음 휴가 때는 한 대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벨트 매, 출발할 테니까.”

말하면서 제이크가 시동을 걸었고, 액셀을 밟아 공항을 빠져나갔다.

낮은 건물들이 있던 전경이 금세 바뀌었다.

“역시 미국… 드럽게 넓네.”

차창 너머를 내다보던 강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로와 땅밖에 없는 황량한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완만하게 굴곡진 산이 지평선을 가리고, 건조해 보이는 수풀들이 듬성듬성 깔린 광경.

강태가 재차 감탄하고, 이어서 잡담까지 몇 마디 나눌 무렵.

어느덧 차량이 멈춰 섰다.

메마른 데다가 광활한 주변 경치는 달려오던 도로 근방과 다를 게 없었으나, 목적지라는 건 강태와 해리도 알 수 있었다.

사격장으로 쓸 법한 큼직한 언덕 근처에 조립식 건물 여러 채가 있었고, 그 앞에 차도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큼직한 왜건이나 SUV, 픽업트럭까지.

“자, 다 왔군.”

주차까지 마친 제이크의 말에 강태가 내릴 즈음, 차를 알아본 이가 다가왔다.

강태의 첫 저격을 도왔던 현역 델타포스 저격수, 브래드였다.

“제이크, 리! 그리고 새로운 분은… 전화로 말했던 SOAR(Special Operations Aviation Regiment: 제160특수작전항공연대)입니까?”

“네, 맞습니다.”

해리가 자연스럽게 악수를 권하며 답하고, 강태 역시 이어서 브래드와 손을 맞잡으며 인사할 무렵.

하드 케이스를 챙겨 든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다들 먼저 온 모양이군.”

“네, 제이크가 마지막이었어요. 어서 들어가죠, 다들 기다립니다.”

“점심 준비를 벌써 다 했나?”

제이크가 걸음을 옮기며 묻자, 브래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멀었죠, 제이크가 손님을 데려온다기에 다들 궁금해하던 참입니다.”

“전에 마커스도 데려온 적 있잖나?”

“그 친구는 델타고, 여기 두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브래드가 그러면서 뒤를 다시 보며 물었다.

“혹시 마커스도 오는 겁니까? 마커스가 오는 걸로 아는 놈도 있던데요.”

“아냐, 마커스는 가족과 놀러 갔어.”

“아쉽군요. 그 친구가 술은 잘 마시던데… 그래도 여기 슈퍼 솔져가 왔으니, 그것도 좋습니다. 리, 술은 좀 마십니까?”

“요새 좀 안 먹어서 많이 줄었어요.”

“하여튼 알코올 알레르기가 없다는 소리죠? 그거면 됩니다. 직접 맥주를 만드는 놈이 있는데, 그놈 물건이 기가 막히거든요.”

“오… 수제 맥주 좋죠.”

그렇게 강태와 브래드가 잡담을 나누며 걷고, 사격장 리셉션에 들어갔을 때였다.

덜컹.

문이 열리자마자, 강태가 움찔하고 말았다.

“……!”

십수 명의 시선이 확 쏠렸는데, 그게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현직 델타포스 출신의 번들거리는 눈.

‘웬만한 테러범들은 지리겠는데…….’

눈빛만이 아니라, 단단한 체구와 온갖 문신, 거기에 파편 따위가 뽑혔을 흉터까지 볼만했다.

가히 미국 최강 전력이라 불리는 인간 병기들다운 모습.

그 시선이 곧 단번에 끊어졌다.

“다들 오랜만이군.”

걸걸한 목소리의 제이크가 주의를 환기하듯 이목을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그가 곧 강태와 해리를 돌아보며 소개했다.

“여긴 나와 함께 일하는 한국계 특수부대를 나온 리, 이쪽은 SOAR 출신의 해리 톰슨. 마커스하고도 함께 일하는 동료니까, 다들 인사하도록 해.”

그 말에 몇몇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군, 리? 그렇게 부르면 되나?”

나름대로 친절을 섞은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강태에 이어서 해리까지.

사내들이 두루두루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바라보는 몇몇의 시선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장년의 흑인, 테런스의 시선이 가장 삐딱했다.

‘제이크도 늙었나… 저런 애송이들을 데리고 와?’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명색이 델타포스 모임인데, 일반인들이 끼어든 격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깥이었다면 같이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전혀 개의치 않았겠지만. 이곳은 전현직 델타 모임이었다.

아무나 올 곳이 아니었다.

나이트 스토커 출신인 해리 톰슨도 마찬가지.

뭐든 간에 혹독한 훈련과 위험한 작전을 겪었던 테런스로서는 두 사람을 같은 울타리에 잠깐이라도 놔둘 수가 없었다.

특수부대의 시초인 SAS 정도면 모를까, 적어도 두 사람은 안 됐다.

그러나 굳이 불쾌한 표를 내진 않았다.

어쨌든 이 바닥의 전설이라 불리는 제이크가 데려오고, 브래드 역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대신 앉은 자세에서 짧게 눈만 마주쳤다.

여기서 성질을 내는 것보다 이따가 다가올 시간에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주는 게 나았다.

내기 사격이나 스파링, 모의 전투까지.

여러 항목을 떠올리는 테런스는 뭐가 됐든 좋다고 생각했다.

자신 있었다. 전역한 지 이제 1년밖에 안 됐고, 현역 때도 부족한 것 하나 없었으니까.

그렇게 테런스의 표정이 굳어 가는 사이, 그와 시선을 마주한 강태의 얼굴은 반대로 밝아지고 있었다.

델타포스를 만나서 마냥 기뻐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델타의 곤조인가? 이거 꺾는 맛이 있겠는데…….’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표를 안 내는 것 같으나,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군 생활 10년에 실제 나이 마흔이고, 용병 생활과 미국 거주로 인종 차별 비스무레한 것도 당해 봤기 때문이었다.

아시안치고 큰 185㎝의 키와 85㎏에 달하는 몸무게 덕분에 문제없이 넘어갔을 뿐.

강태는 자신을 보는 흑인, 테런스의 시선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못마땅함, 짜증, 차별 등등.

이에 감정을 꺾고자 하는 묘한 희열감과 기대감으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었다.

특히나 상대는 동네에서 흔히 볼만한 흑인 직장인이 아닌, 델타포스 출신의 건장한 사내였다.

그런 이의 시선이 바뀐다면 볼만할 터.

강태가 미소를 머금은 사이, 주변에서 호기심 어린 말이 날아왔다.

북한에 침투해 봤는지, 어느 전장에 갔었는지, 제이크와는 어디에 다녀온 건지 등등.

“북한에 침투한 적은 없었고…….”

그렇게 강태가 다소 싱거운 대답을 하며 대화를 이어 갈 무렵.

음식 냄새와 함께 요리를 준비하던 이들이 들어왔다.

“일단 먹고 합시다.”

* * *

“선배님, 어떠십니까?”

식사를 마칠 무렵, 해리가 슬쩍 물었고, 내가 쳐다보면서 말했다.

“뭐가?”

“분위기가… 저쪽에서는 좀 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기 목에 문신한 흑인, 이름이 테런스라고 했나…….”

“테런스?”

“네, 지나가다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를 별로 반기질 않는 것 같더군요. 팀장님이 아니었으면 쫓겨났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알아.”

“아, 알고 계셨습니까?”

“이런 건 너보다는 내가 많이 겪지 않았겠냐?”

“아…….”

해리가 답하는 사이, 우리와 정반대 쪽에 자리한 테런스를 쳐다봤다.

문신도 문신이지만, 체격이나 옷차림, 거기에 흉터까지 전형적인 특수부대 출신의 사내였다.

여태 말 한마디 안 거는 걸 보니, 뚝심이며 성질이 꽤 있는 것 같았고.

그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 입을 열었다.

“식사도 끝났으니, 간단하게 내기 사격부터 하죠? 100달러씩 걸고, 어때요?”

“시작부터 100달러씩이나?”

“제이크가 데려온 손님도 있으니까, 제대로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군. 그럼 하던 대로?”

“당연하죠. 늘 하던 대로.”

뭘 하려나 하고 둘러보는데, 옆에서 제이크가 짧게 알려 줬다.

“토너먼트로 내기해서 승자가 다 갖는 거지.”

“무슨 사격인데요? 전술 사격이요?”

“그건 나중에 할 거야. 지금은 식후에 하는 가벼운 놀이지. 여기 레일 들어가서 쏘는 거고, 먼저 놓치면 지는 거야.”

“아, 쉽겠네요.”

특수부대끼리 땀 흘리면서 싸우는 게 아닌, 말 그대로 식후에 할 만한 간단한 놀이라는 소리.

한데, 제이크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난 빠져야겠군.”

“예? 팀장이요?”

“그래, 인원이 안 맞거든, 내가 빠져야 14명으로 짝이 맞고, 또… 나는 자네의 실력을 잘 알잖나?”

“아…….”

“아마 자네를 이기려면 손이나 팔을 부러뜨려야 하겠지. 안 그래?”

이어서 사뭇 섬뜩한 물음 뒤로 옅은 웃음소리까지 딸려 나올 무렵.

해리가 눈치를 보듯 입을 열었다.

“어… 저도 선배님의 실력을 잘 알지만, 그래도 델타포스와 하는 사격이라서… 참가 경험에 의의를 두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넌 그냥 조용히 있어, 괜히 헛소리하지 말고.”

“아앗… 알겠습니다.”

해리가 비행기 태우듯 아부성 말을 할까 싶어서 입단속을 시켰을 때였다.

쿵.

제이크가 테이블을 때렸다.

아니, 정확히는 손바닥으로 엎어 치듯이 때린 것이었다.

뭔가 싶었는데, 가려져 있던 게 드러났다.

방금 누군가가 언급한 내기용 액수.

100달러짜리 지폐였다.

설마 하는 사이,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나는 100달러 내고 기권할 테니까, 나머지가 짝 맞춰서 진행해 봐.”

그와 동시에 다른 이들의 시선과 목소리가 달려들듯 튀어나왔다.

“제이크? 사격을 포기해? 당신이?”

“무슨 소립니까, 제이크.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겁니까?”

“머릿수 때문에 그런 거라면 부전승으로 한 명 올리면 되잖아요? 왜 그런 거예요?”

말이 와글와글 쏟아지던 끝에 제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냐.”

“……?”

“여기선 리를 이길 수 없거든.”

“……?!”

그 말에 시선 여러 개가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몇몇의 입에서는 욕설도 튀어나왔다.

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테런스의 얼굴은 거의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제이크는 업계 전설로 불리는 사람으로, 포기와는 거리가 먼 델타포스 출신이었으니까.

시도조차 안 할 줄은 몰랐을 터.

단순히 놀랐을 수도 있고, 크게 실망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제이크의 결정은 옳았다.

변수가 있는 전장이라면 몰라도, 사격장에서는 내가 질 리가 없었으니까.

스윽.

어느새 제이크가 100달러를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놓으면서 말했다.

“더 말할 것 없어, 일단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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