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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01화 (101/185)

101화

이어진 포상과 관련된 얘기는 금세 마무리됐다.

해리만 돌발 행동을 했을 뿐, 소신 있는 제이크를 시작으로 다들 무난한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더 바라는 게 없다느니, 포상금만으로도 좋다느니 하는 말들.

그래서 해리의 대답이 유독 튀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해리가 밉거나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거라서 크게 당황했을 뿐, 어쨌든 덕택에 땅과 헬리콥터를 갖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정말 주는 건지, 빌려주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국무부 장관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이뤄질 건 분명했다.

라레플의 시네마틱 영상에서나 엑스트라지, 현실에서의 그는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권력자면서 거물이었으니까.

그것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온 사람.

그 사람 앞에서 해리가 뜬금없는 말을 한 게 다시금 생각났다.

‘그런데… 확실히 머리가 좋긴 좋은 모양이지? 딱 한 번 했던 말을 여기서 할 줄이야…….’

생각만으로도 헛웃음이 날 것 같았다.

엊그제 한 거면 몰라도, 사격장을 처음 갔던 2주 전에 했던 얘기라서 더더욱 웃겼다.

그것도 흘러가듯 가볍게 한 말이었고.

한데 그 말이 여기서 나오다니?

내가 옆자리의 해리를 잠깐 바라봤는데, 그가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것 같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잘했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 뭐… 해리 정도면 괜찮지, 똘똘하고, 똘끼 있고…….’

가벼운 상념을 떠올릴 무렵.

이내 국무부 장관의 얘기가 점점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식사 전이나 중간에 떠든 날씨나 휴가 얘기와는 다른, 먹다가 들으면 체할 것 같은 미국의 안보와 미래를 위한 얘기였다.

그래서 디저트까지 다 비운 지금에서야 말하는 것 같았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국방과 안보는 모두 첨단화, 기계화, 인공지능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권총에도 컴퓨터를 집어넣고, 총알에도 기계를 넣어서 유도 탄알을 만드는 세상이죠. 아마 많은 이들이 지상군 같은 병사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마는…….”

잠시 힘을 빼듯 우리를 둘러본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대통령께서도 그렇고, 나 역시도 여러분 같은 자원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반대로 테러범들은 점점 아날로그화 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종이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발로 뛰어서 통신하고… 이런 건 정찰기나 휴민트로도 잡아낼 수 없는 거지요. 여러분들 같은 사람이 투입되어 끊어 내야 하는 일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작게 입이 벌어졌다.

감동하거나 감탄한 게 아니었다.

국무부 장관이나 대통령 같은 고위직 인사들이 등장했던 시네마틱 영상과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같은 중간 실무자에게 했던 말 중 하나.

대사가 전부 똑같지는 않아도, 뉘앙스와 내용이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저 말이 나오는 이유도 잘 알았다.

단순히 치하하는 게 아니었다.

엑스트라에게도 가치관을 줘서 게임의 개연성을 갖추고, 메인 스토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쉽게 말해 라레플의 작품성을 드러낸 부분 중 하나.

플레이 했던 때를 떠올릴 무렵.

어느새 말이 마무리됐다.

“…거창하게 미국의 안보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워 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끔찍하고 악랄한 테러를 끊고, 무고한 죽음과 희생을 막아 주십시오. 그럴 수 있는 것도 여러분들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정책을 만들고 지원해도, 행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오늘처럼 여러분들을 기억하고,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관님!”

제이크의 답이 가장 먼저 들려왔다.

힘이 바짝 들어간, 감동을 넘어서서 새로이 각오한 모습.

‘저 기세면… 사람도 손으로 찢겠는데……?’

제이크가 보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흘리는 사이, 국무부 장관이 들어올 때 그랬듯 우리에게 악수를 건네왔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됐을 때였다.

고맙다는 그리고 힘내라는 말을 해 오던 그가 나한테는 좀 다른 말을 했다.

“리, 미국 시민이 되어 줘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 네.”

“다음에 또 만나길 바랍니다.”

그렇게 손아귀에 힘을 준 그가 해리에게로 넘어가서 상투적인 말과 함께 악수한 뒤.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서는 정장 차림의 사내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덜컹.

문이 닫히는 순간에 호세의 목소리부터 들려왔다.

“오우, 국무부 장관을 만나다니! 세상에… 이게 현실이야? 진짜로?”

“그러게요.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레이첼도 놀랐다는 듯 대꾸하는 사이.

나는 방 한쪽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사내부터 불렀다.

“저기요? 이제 귀가시켜 줄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혹시 집 말고 다른 데로 가도 됩니까?”

“어디……?”

무뚝뚝하던 사내가 주춤하기에, 얼른 대답했다.

“켄터키 동부에 사격장이 있거든요. 거기로 바로 가도 되겠습니까? 뭐… 근데 이동하는데 서너 시간 이상 걸리면은 그냥 집으로 가고요.”

생각보다 시간이 남아서 묻는 거였다.

거리가 가까워서 한두 시간 안에 갈 수 있다면, 사격도 두어 시간은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내가 쓰던 총을 챙겨 오진 못했지만, 거기서 빌려 쓰면 되는 거라 문제는 안 됐다.

중요한 건 네 총 내 총이 아니라, 저격 소총에 대한 숙련도이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다양한 저격 소총을 써 보고 싶기도 했고.

“불가능합니다. 정해진 루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럽시다.”

역시나 처음처럼 딱딱한 태도에 그러려니 할 무렵,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리… 네 태도는 본받을 만하군.”

“아닙니다, 뭐… 할 게 없어서 그렇죠. 해야 할 훈련도 많고 해서…….”

“아니야, 나도 그렇게는 못하거든.”

그러다가 제이크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혹시 델타 모임에 올 생각 있나?”

“델타 모임이요?”

무슨 소린지 묻자, 그 옆에 있던 마커스가 입을 열었다.

“현역하고 전역자들 모여서 사격하고 스파링 하고, 바비큐 먹고 뭐, 그런 거야. 아, 전에 사격 연습을 함께했던 브래드도 있을걸?”

“오! 그거 좋긴 한데… 제가 가도 됩니까?”

그 말에 제이크를 향해 물었다.

특별히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델타포스 출신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세계 최고라고 봐도 무방한 이들이었으니까.

물론 내 특성에 비하면 좀 부족할지언정, 어쨌든 인간의 한계에 선 이들이 아니던가?

분명 뭐가 됐든 배울 게 있을 거였다.

예컨대 지금 연습 중인 저격 소총을 다루는 노하우나 MMA가 아닌, 실 작전지의 격투 등등.

그리고 다행히도 듬직하다 못해 무서운 허락이 돌아왔다.

“내가 초대하면 돼.”

“오… 역시……. 그럼 마커스는? 너도 델타잖아?”

제이크의 델타포스 후배인 마커스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딸들하고 캠핑 가야 해.”

“난 디즈니월드.”

호세까지 대답하자, 레이첼도 옅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마 팀원 전원에게 권유했던 모양.

“그러면은 뭐, 감사히 가겠습니다. 언제 가는 겁니까? 아, 오리건주로 가면 됩니까?”

제이크의 집이 오리건이라 물었는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네바다주.”

“어? 거기 51구역…….”

라레플에서는 여러 국가와 마찬가지로 방문은커녕 언급조차 안 됐던 51구역이 떠올라 물었는데, 걸걸한 웃음이 돌아왔다.

“하하하, 관광객들이 할 법한 말이군. 아쉽지만, 우리가 갈 곳은 거기서 수백 마일은 떨어진 사격장이야. 내 동기가 운영 중이지.”

“오…….”

“올 때 내기용 소총하고 글러브, 마우스피스만 가져오면 돼.”

“오오…….”

준비물에서도 델타포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이,

어느새 제이크가 해리에게도 말을 돌렸다.

“해리, 자네도 함께 가는 게 어때? SOAR(Special Operations Aviation Regiment: 제160특수작전항공연대) 출신이라면 다들 반길 거야. 함께 훈련한 적도 많고.”

“아! 네! 선배님께서 가신다면, 당연히 저도 가겠습니다.”

역시나 힘 있는 대답이 들려오고, 몇 마디의 잡담을 더 나눌 무렵.

덜컹.

문이 열리고, 우릴 데려다줬던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다시 들어왔다.

왜 왔는지도 잘 알았다.

귀가.

예상했듯 돌아갈 때가 됐다는 말이 들려왔고, 이에 팀원들과 가볍게 인사할 무렵이었다.

레이첼이 가볍게 포옹을 마치고 물어왔다.

“리, 혹시 해리는 아직도 함께 사는 건가요? 휴가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음… 아마도요.”

해리가 들러붙는 느낌이긴 하지만, 나도 함께 지내는 게 생각보다 괜찮았다.

같은 남자라서 아쉬울 뿐.

사람 자체가 똘똘하고 싹수가 있어서 그런지, 눈치껏 알아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 지내기 편했다.

불편한 일을 알아서 했고, 불편할 일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같이 있다 보니 외롭지도 않았고.

물론 종종 여자 친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모습이 괜히 부럽긴 했지만, 나도 못 할 건 없었다.

핵전쟁만 막으면, 그럼 편하게 놀 생각이었다.

부담을 좀 덜고.

그런 상념 끝에 레이첼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에 못 마신 맥주는… 또 못 마시겠네요.”

“아?”

나도 모르게 주춤했는데,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께서는 맥주 안 드십니다. 저하고 있는 동안에는 술이라고는 전혀…….”

“아냐, 잘 마셔. 내가 소맥을 얼마나 말았는데…….”

“예?”

“그러니까 좀 조용하고.”

말하는데 레이첼의 웃음이 들려왔다.

“푸흐흐, 그럼 버지니아로 갈 때 연락할게요. 괜찮아요?”

“안 괜찮을 리가…….”

그렇게 답하는 사이, 어느새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와서 마지막으로 남은 레이첼과 나도 갈라서 데려갔다.

출발할 때처럼 돌아가는 거였다.

앞 좌석과 분리되고 밖이 안 보이게 코팅 된 벤츠에 앉아서.

이내 차가 움직이는데, 해리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

해리가 미간에 주름까지 잡기에 고개를 기울였다.

“왜?”

“레이첼과는… 동료 사이 아닙니까?”

“동료 사이지.”

“왠지 분위기가 남녀 사이의 오묘한 느낌이 좀 들어서 그랬는데… 제가 예상한 게 맞습니까? 선배님은 그쪽에는 관심 없으신 거 아니셨습니까?”

“아니… 뭐?”

인상이 찌푸려졌다는 걸 뒤늦게 느끼는 사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성욕자다, 이 말이야?”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 선배님께서 오직 작전과 훈련에만 매진하는 줄로 알고…….”

바쁘게 나온 설명에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오직’도 아니야. 이게 누굴 고자로 보고…….”

고개를 젓는 사이.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 듯 해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역시… 대단하시군요, 그럼 본능도 억누르고 절제하면서 작전과 훈련을 반복해 오셨던 거군요.”

그 말에 웃음이 나오고야 말았다.

“흐흐흐, 너도 참 한결같다.”

“네?”

“얘기가 꼭 그쪽으로 새냐? 보통은 이성적인 걸 물어볼 것 같은데…….”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선배님의 존재 자체가 대단한데.”

“어우, 이건 영 적응이…….”

그러다가 불쑥 놓칠 뻔한 게 떠올라서 말했다.

“아, 델타 모임에 가서는 그런 말 하지 마라. 괜히 어그로 끌라…….”

그렇게 집에 도착해서 예정된 등 운동과 유산소까지 하고, 비슷한 나날을 며칠이나 더 보낸 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제이크가 말했던, 가슴 뛰는 델타 모임이 있는 날.

미리 준비한 짐을 챙겨 들었다.

“자,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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