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군세 차관 비서실의 연락을 받은 뒤.
로버트는 다른 비서와 보좌관의 연락을 받고 난 다음에서야 국무부 장관과 직통으로 연락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행사할 때 멀리서 얼굴을 보거나 지나는 길에 격려를 들은 게 전부였을 뿐.
직통 전화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군세 차관조차 일이 바빠서 대면 보고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하면 국무부 장관은 더더욱 어려운 사람이었다.
보통의 장관들과는 권한이나 책임의 급이 다른, 미합중국 의전 서열 10위 안쪽에 해당하는 인물.
하는 일도 그랬으니, 당연하게도 로버트 같은 실무 책임자와 얘기할 일은 없었다.
긴장하는 사이, 국무부 장관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엔더슨 국장?
“네, 대외협력국 국장 로버트 엔더슨입니다.”
-이제야 연락하게 됐군요. 평소에 만나긴 어렵지마는, 그대가 애쓰고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해낸 일들도 그렇고.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표해야지. 오늘 전화한 것도 그런 이유지요.
“아, 네. 비서실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듣긴 했는데, 자세히 어떤 건지…….”
로버트가 대답하면서 용건을 기다리듯 운을 띄우자, 곧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CAR(Central African Republic: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작전, 알지요?
“아… 이스라엘과 관련된 작전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그 작전 성과가 좋아서 요원들을 좀 치하하려고 합니다. 마침 다들 휴가 기간이던데요?
“아, 네. 그렇긴 합니다만… 직접 말입니까?”
-뉘앙스가 좀 부정적이군요?
“그게… 저 역시 장관님의 의도를 잘 알고, 요원들을 마땅히 치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계약직 비공개 요원들이라 공개된 장소에서의 만남이나 기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서조차 보존 기간을 연장해 가면서 평생 숨겨 놓는 곳이 대외협력국이기 때문이었다.
신원이 분명하게 드러난 국무부 장관과의 대면은 권할 일이 아니었다.
한데, 준비됐다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내 일정도 비공개로 잡을 거고, CIA에서 접대용으로 관리하는 깨끗한 안가가 있으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슨 말을 하나, 귀를 기울일 때였다.
-대통령께서 직접 지시하셨습니다. 해당 수행 팀에게 각별히 관심 갖고 신경 썼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대통령께서요……?”
미합중국의 일인자까지 언급되자, 로버트가 움찔하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안 그래도 국무부 장관이 직접 치하하는 것도 상당히 이례적이라 당황스러웠는데, 거기다가 대통령이라니?
그렇게 로버트가 당황한 사이.
국무부 장관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CAR에서의 작전 덕분에 중요한 일 하나가 잘 풀렸다고, 그래서 치하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아…….”
-그럼 비서를 통해서 일정과 절차 전달할 테니, 팀 전원을 모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장관님.”
뚝.
전화가 끊어지자, 로버트가 뒤늦게 주춤했다.
장관의 직접 치하와 대통령까지 언급돼서 잠깐 머리가 굳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너무나도 잘됐기 때문이었다.
보안 같은 것도 해결이 됐으니, 나쁠 건 조금도 없었다.
‘수행 팀 처우 개선이나 예산을 지원받기에도 좀 낫겠군.’
물론 이번 한 번으로 원하는 걸 다 요구하거나 달라고 할 순 없을 터.
다만, 장관이 직접 치하하고 대통령이 언급했으니,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뭘 받진 못해도, 추후에라도 요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강태.
드디어 그의 중요성을 대통령 다음이라고 봐도 될 만한 국무장관의 면전에서 직접 언급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강조하거나 반복해서 말할 수 없는 서면 보고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리의 실제 가치를… 표면적으로도 높여야 해.’
그래야 지원이든, 후속 처리든, 뭐가 됐든 간에 그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될 터.
이내 로버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 * *
그로부터 보름이나 흐른 5월 중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해리와 함께 체육관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거리는 약 15㎞.
그것도 방탄복과 글록19, 대검을 휴대하고, 운동 가방을 멘 채로 뛰는 거였다.
조깅보다는 마라톤과 비슷한 빠른 속도로.
당연하게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명사수와 강철 멘탈 외에 특급 체력이라는 특성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안 뛰어도 됐다.
특성 덕분에 체력이 저하되는 일도 없어서 그랬다.
그러나 뛸 수밖에 없었다.
뛰는 만큼 뛰는 실력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그게 체력이 느는 건지, 달리는 노하우가 더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전보다 더 빠르고 오래 뛸 수 있다는 건 분명했다.
지난 6개월간의 기록과 통계가 그랬다.
이에 15㎞를 거침없이 뛰기를 잠시, 등록한 MMA 체육관에 닿았다.
동시에 주저앉은 소리가 들렸다.
철퍼덕.
해리였다.
마찬가지로 운동 가방을 멘 그가 숨을 토해 내다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서, 선배님… 흐악, 진짜로… 이걸 어떻게 휴가 내내 하십니까? 후우… 진짜 대단하십니다, 정말…….”
“너도 대단한 편이지. 진짜 2주 동안 붙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짧으면 하루, 길어야 1주일 정도 뒤에는 돌아갈 줄 알았었다.
한데 벌써 2주, 휴가의 절반 가까이를 나하고 함께 자고, 먹고, 운동하면서 보내고 있었다.
유산소, 무산소 가릴 것 없이.
보면서 새삼 느꼈다.
괜히 나이트 스토커 출신이 아니라고, 나라에서 인정할 만한, CIA에서 데려갈 만한 기재라는 사실을.
‘그래, 저 정도 끈기는 있어야지…….’
점차 정이 가는 해리를 일으켜 세워 주고, MMA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인사말들이 들려왔다.
“리, 오늘도 일찍 왔군.”
UFC 선수를 길러 냈다던 대머리 코치와 주먹을 맞부딪혔고, 이어서 프로를 지망하는 아마추어 선수들과도 인사했다.
여전히 데면데면하거나 불퉁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개 괜찮았다.
군 출신이고 현역 용병이라 그랬다.
함께 다니는 해리도 백인이고 나이트 스토커 출신이었으니.
이윽고 내게 바로 미트부터 잡아 주려던 코치가 생각났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이런, 오늘로 날짜가 절반밖에 안 남았군. 다음 휴가에도 우리 체육관으로 올 수 있겠나, 리?”
“와야지, 집이 근처거든.”
“다른 체육관도 많아서 한 말인데… 네가 와 준다면 좋지.”
학원비 때문인가 싶었는데, 코치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다음 휴가 때는 아마추어 대회 준비를 해 보면 어때?”
“아마추어 대회?”
“그래, 평균 체중인 미들급으로 나가도 좋고, 조금 감량해서 웰터급으로 출전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여기 다닌 지 이제 2주인데? 정말 괜찮겠어?”
흥미가 조금은 있는 분야라서 조심스레 물었는데, 코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복싱은 전부터 배워서 기초가 괜찮았고, 아시안치고 큰 체격에 동체 시력이나 반응속도도 되게 좋았잖아? 거기다가 근력도 우수한데, 가장 중요한 건…….”
이어질 말을 기다리자, 코치가 강조하듯 악센트에 힘을 주며 얘기를 덧붙였다.
“바로 네 괴물 같은 체력… 그건 정말 형언할 수 없는 능력이야. 3분 5라운드를 전부 소화해도 코로 숨을 쉬잖아? 전설적인 선수… 아니, 사람은 그 누구도 그렇게는 못 해. 오직 너만이 가능한 거야.”
“아…….”
다 이해되는 거라서 고개를 끄덕거리자, 코치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어왔다.
“며칠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혹시 프로는 어때? 내가 너와 어울리는 링네임까지 만들어 봤는데…….”
“……?”
“피닉스. 죽지 않는 새, 알지? 구글링 해 보니까, 동양에도 비슷한 게 있더라고. 너와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비슷한 미사일 이름이 하나 떠오르긴 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흰소리를 내진 않았다.
해리가 감탄하면서, 나 대신에 소리를 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역시… 제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선배님은 만능이시군요. 프로 선수 제안이라니? 그리고 피닉스도 정말 잘 어울리네요. 선배님은 정말로 죽지 않는…….”
“…….”
그런 해리를 놔두고 바로 화두를 돌렸다.
“근데 아마추어 대회는 그렇다고 쳐도, 프로까지 나가긴 좀 그래.”
“왜? 네 실력 때문에 그래? 그건 걱정하지 마, 너 정도면 반드시 성공할 거야. 내가 책임지고 UFC나 ONE 챔피언십에 보내 줄게.”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코치가 언급했던 내 괴물 같은 체력은 인간을 초월한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일반인들에게 쓰고 싶진 않았다.
심지어 대중화된 스포츠 종목이고, 돈까지 엮인 일이었다.
거기다 초능력을 뿌려서 엎어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양심이 찔렸다.
물론 내가 선인이나 현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마음 한 곳이 불편할 것 같았다.
전장에서야 편하게 쓰고 있긴 하지만, 그건 대상부터가 달랐다.
테러범이나 테러 사주범들.
반면에 MMA 대회에 나오는 프로 선수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죽어 마땅한 적과 달랐다.
“말은 고마운데, 원래 체육관에 다닌 이유가 프로나 아마추어 선수보다는 일 때문이거든. 현장에서 생존하려고.”
“아… 그래, 너 용병이었지. 으음, 아쉽군.”
코치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다시금 말을 던져 왔다.
“그래도 데뷔할 거면 우리 체육관에서 해야 해, 알지? 네가 다른 곳에서 상대로 나와서 내 선수들과 붙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거든. 얼마나 힘들지 말이야.”
“흐흐흐, 알았어.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그거라도 대답해 주니 고맙네.”
그렇게 웃으면서 말을 마치고, 바로 훈련을 시작했다.
약 30분.
미트를 받아 주던 코치가 휴식을 선언하고, 내가 습관적으로 탈의실에 있는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였다.
“……?”
화면에 번호 하나가 남아 있었다.
대외협력국의 번호.
그것도 평소에 갖가지 작전 따위를 하달해 주는 릴리 모건이 아닌, 국장인 로버트의 직통 연락처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금방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잠깐만요, 오늘이요?”
-네, 앞으로 3시간 뒤 자택으로 차량 한 대가 갈 겁니다. 그거 탑승하고 지시대로 따라 주면 됩니다.
“병기… 아니, 작전이 뭔데 그럽니까? 뭘 준비해야 하는 겁니까?”
-작전은 아니니까, 마음 놓아도 좋습니다. 일정을 보면 알겠지만, 보안 때문에 말하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힌트를 주자면… 좋은 일입니다.
“음… 그럼 해리는요?”
-해리도 함께 타면 됩니다.
“다른 전파 사항은 없고요?”
-없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럼 이따 만나겠습니다, 미스터 리.
“알겠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역시도 라레플에 없던 내용이었다.
진즉부터 싹 다 변해서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예상할 순 없는데, 일단 로버트는 믿을 만했다.
이에 다시 핸드폰을 넣어 두면서 시간을 헤아렸다.
“뭐… 3시간이면은 오늘 운동은 다 하겠네. 갈 때 뛰어가도 충분하겠고.”
그렇게 손목시계 알람을 설정하면서 탈의실을 나갔다.
어떤 좋은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마저 운동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