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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97화 (97/185)

97화

이튿날, 이른 오후의 켄터키 동부.

몇 시간을 내달려 해리 삼촌의 땅에 들어선 순간, 입이 절로 벌어지더니 감탄이 나오고 말았다.

“이야아… 미쳤네, 이게 개인 소유라고……?”

사격장으로도 쓴다던 휴경지가 너무나도 넓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2.5마일(4㎞)이라는 단위를 미리 듣긴 했지만, 그것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느낌이 달랐다.

흡사 바다 같았다.

풀밭의 파란 구릉이 마치 오르내리는 거대한 파도처럼 보였다.

어딘가에 있을 표적은 가늠조차 되지 않았고.

감탄하는 사이에 새빨간 오프로드용 지프 한 대가 가까이 다가왔고, 금세 정차하더니 사람 한 명이 내렸다.

보통 키에 비만 체구를 가진 중년 사내, 해리의 삼촌이었다.

“해리!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그럼요. 선배님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해리가 인사도 거르고 나부터 소개시켜 주듯 말하자, 해리의 삼촌도 잘 안다는 듯 웃으며 악수를 청해 왔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군요. 해리가 그토록 존경한다던 우상이자 동료.”

“아… 하하, 소개를 미리 해 놨군요. 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렇게 해리의 삼촌과도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사격 장소로 안내받았다.

정확히는 입구 쪽의 언덕배기에 지어진 오두막.

그 앞에 ‘엎드려 쏴’가 가능하게 평탄화 작업이 되어 있었고, 옆에는 앉아서도 쏠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웬만한 전문 사격장과 다를 바 없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데, 오두막 안쪽은 상상 이상이었다.

발전기를 시작으로 선풍기와 커피 머신, 아이스박스, 각종 식음료와 접이식 침대, 소파까지 구비되어 있는 완벽한 휴식처였다.

거기다 예비 탄약과 망원경, 관측경 같은 장비도 마련되어 있었고.

그야말로 꿈 같은 사격 장소였다.

해리의 삼촌이 그런 내 속을 안다는 듯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다시 악수를 건네왔다.

“자, 미스터 리. 나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전부 편하게 사용해도 좋습니다.”

“…아아, 예. 감사합니다.”

반사적으로 고개까지 숙여 가며 인사한 뒤,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와아… 무릉도원이 따로 없네…….”

모든 게 완벽한데, 심지어 풍광까지 좋았다.

돈 벌어서 이런 거나 하나 마련할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방금 한국말이었습니까?”

“어? 어어, 좋다고. 근데, 여기 또 와도 되냐? 아니지, 내가 비용은 넉넉하게 낼 테니까…….”

“하하하, 아닙니다. 선배님은 아무 때나 와도 됩니다.”

“그래도 돼? 민폐 아니고?”

“민폐요? 우리 사이에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 사이?”

“전장 한복판에 고립되어도 목숨 걸고 구해 주러 갈 동료 사이죠. 이 정도면 가족만큼 진한 사인데, 민폐 같은 걸 따져야 하겠습니까?”

“아, 그래… 역시 배운 놈이라 그런지 말을 좀 하네.”

반사적으로 끄덕거리며 답할 무렵.

해리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돈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쓰십시오. 저는 솔직히 선배님의 사격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거기에 또 영광이 붙고… 알았으니까 사격부터 해 보자.”

대충 대답하고서 바로 사격할 준비를 했다.

처음으로 개시할 총기는 어제 새로 산 MK.20 SCAR SSR.

가스 피스톤식 반자동 방식으로 격발과 함께 노리쇠가 후퇴하고 전진하기 때문에, 정확도 문제로 초장거리 저격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화기였다.

작은 오차로도 저격에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다만, 나한테는 명사수 특성이 있어서 어느 정도 잡아 주지 않을까 해서 일단 갖고 온 것이었다.

이게 안 되면 차에 실어 온 다른 저격 소총을 써도 그만이었고.

“오, 반자동으로 장거리 사격을… 역시 선배님답습니다.”

어느새 내 총을 본 해리가 늘 그러듯 입에 발린 말을 한 뒤.

그나마 가까이 있는 표적을 찾아서 스코프에 접안했는데,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

가까운 것부터 이미 초장거리에 해당될 만큼 먼 탓이었다.

심지어 나도 쏴 본 적이 없는 거리였다.

0.8마일.

대략 1.28㎞에 해당하는, 연습조차 못 해 본, 개인 기록을 세울 만한 거리였다.

총기 유효사거리보다 길었고.

물론 나름 먼 과녁을 맞힌 적은 있었다.

실작전에서는 800M가 넘는 장거리 저격을 성공적으로 여러 번 했고, 전에 휴가 나왔을 때는 1㎞ 정도 되는 장거리 사격장에서 연습하기도 했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거리에 따른 급격한 변화였다.

풍향, 풍속, 습도, 온도, 중력, 지구 자전 따위가 모두 고려되는 탓에 거리가 조금만 늘어나도 변수는 크게 적용되곤 했다.

즉, 초장거리부터는 고작 100M만 늘어나도 쏘기가 상당히 번거로워졌다.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계산하진 않지만, 각도는 정비례보다 급격하게 바꿔 줘야만 했다.

에임으로 가운데를 봐선 소용이 없었다.

오조준을 하던지, 그만큼 스코프의 터렛을 돌려서 일단 맞을 수 있게 조정해야만 했다.

“일단 표를… 아?”

저격에 필요한 크리크 수정값을 기록한 표를 보다가 주춤하고 말았다.

표에 기재된 마지막 거리가 유효 사거리의 한계인 1㎞였기 때문이었다.

주춤했으나, 걱정이 되진 않았다.

유효 사거리가 좀 넘어간다고 해서 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내게는 표보다 나은 게 하나 있었다.

어제 로버트에게 받았던 탄도 계산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것도 개시해 볼까?”

이미 조작법은 집에서 익혀 뒀다.

해리가 호세에 버금갈 정도로 떠들기는 했지만, 충분히 집중해서 암기하고 숙달까지 해 뒀었다.

실전에서 처음 사용할 뿐.

탄도 계산기를 꺼내어 작동하는 사이,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사격 끝나면 저도 자세 한번 봐주십시오.”

“널? 아냐, 내가 저격 자세 볼 짬은 안 돼.”

“네?”

“한 지 얼마 안 됐어. 입문용으로 총을 거창하게 뽑아서 그렇지, 너하고 비슷해. 그거 말고 전술 사격이나 뭐, 오전에 MMA 체육관 가서 빡세게 하자.”

해리도 날고 긴다는 나이트 스토커 출신이었다.

미국에서 인정해 준다는 3대 패치 중 하나를 딴 셈인데, 거기다 CIA에 스카우트되어 온갖 실작전을 경험했었고.

물론 군 생활은 내가 10년이나 했다지만, 그것도 오래된 얘기였다.

저격에 대한 수준은 나하고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해리가 더 나을 수도 있고.

거기에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1마일 이상도 처음 쏴서 봐주고 자시고 할 게 없어.”

“아닙니다. 거리 같은 건 선배님 앞에서 숫자에 불과할 겁니다. 수백 미터 거리의 움직이는 사람에게 항복까지 받아 내시지 않았습니까? 두 손과 워커를 맞혀서… 거기다가 전에는 달리는 차에서도…….”

“그래, 내가 해 놓은 게 존나 많긴 많지.”

업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사격부터 해 보고.”

“알겠습니다!”

해리의 경쾌한 대답을 끝으로 소음 차단용 헤드셋을 꼈고, 스코프에 접안했다.

표적지는 1마일 거리의 가로세로 60㎝의 정사각형 쇳덩이.

바로 터렛부터 돌려서 스코프의 배율을 높였고, 오조준까지 마친 뒤 총기에 결합한 비장의 아이템까지 확인했다.

로버트에게 받은 국방고등연구계획국의 탄도 계산기.

아직은 빈 화면만 떠 있었다.

총구 탄속 측정도 이뤄지지 않았고, 오조준값도 기록하지 않은 탓이었다.

몇 발 쏘게 되면 이용하기 쉬워질 터.

상념을 날리면서 격발했다.

터어어엉─!

동시에 볼트 액션식과는 확연히 다른 반동이 어깨를 치면서 전신으로 가해졌다.

거기다 노리쇠까지 후퇴, 전진하면서 흔들림이 생겼고.

이어서 스코프를 들여다볼 무렵, 착탄까지 확인했다.

표적이 아닌, 옆의 흙더미.

“좌로 1미터 정도 빗나갔습니다. 표적지 부근의 풍속이 더 센 것 같은데… 아마 MK.20의 유효 사거리를 초과한 영향도 큰 것 같습니다.”

해리의 말을 들으면서 스코프의 터렛을 돌렸고, 총구를 살짝 들어서 다시 오조준을 했다.

노리쇠를 후퇴하고 전진할 필요가 없어서 확실히 편했다.

그만큼 유효 사거리도 짧고, 정확도도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내가 커버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 조준점은 비포장 산길을 타지 않는 한 흔들리지 않으니까.

터어어엉─!

격발한 순간 명중임을 깨달았고, 예상한 말이 그대로 돌아왔다.

“명중!”

자신감이 붙었다.

총기의 유효 사거리를 넘어간 1마일을 고작 2번 만에 맞힌 덕분이었다.

더욱이 탄도 계산기에 필요한 데이터가 쌓이고 있으니, 더더욱 쏘기 편해질 게 분명했다.

MK.20으로 더 먼 거리를 쏘기에는 어려울 것 같지만, TAC-50 정도면 최장거리 기록을 다시 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연습을 많이 해야겠지만, 그건 더 자신 있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현역 때 진정한 주특기가 노력이라는 말도 여러 번 들어 왔었다.

지금도 꾸준히 살기 위해 노력 중이었고.

* * *

어느덧 5월 초순,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관광지 인근 리조트.

발코니에 있던 훤칠한 이탈리아계 장년 남성, 지안드로 바시카날이 북대서양 방향을 쳐다보며 바람을 쐬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따르는 유일한 보스, 피칼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에게 받을 지시가 있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우라늄 반출을 명령하고, 배후에서 지원해 주었듯 새 명령을 받을 예정이었다.

물론 그때의 일은 마무리가 좋지 않았지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일은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한참을 굴러가면서 불어나기 시작한 눈덩이처럼, 아프리카의 정부군이나 용병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안에 범주 외의 유능한 아시안이 있긴 했으나, 자신을 막을 순 없었다.

그는 영화 속의 히어로나 초능력자가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건 진행 중인 피칼의 과업이었다.

‘모든 건 그분의 뜻대로…….’

피칼을 떠올리는 지안드로의 얼굴에 경외심마저 어렸다.

그에게는 흡사 숭배의 대상이었다.

유럽 중세 왕족의 혈통으로 막대한 부를 갖추고서도 떵떵거리며 살거나 사업 따위를 일구는 게 아니라, 신조와 철학에 따라 혁명을 계획하고 진행한 사람이 피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사상과 부합하다 못해 더 뛰어난, 완벽한 이념 아래.

어쩌면 결말은 적화사상에 다다를 수도 있고,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지만, 끝이 그렇게 된다면 이는 모두 적의 책임이었다.

바로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패권국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 선진국들.

기득권의 배를 불리는 자본주의와 거짓된 자유를 앞세워 정의를 행하는 척 기만을 행해 온 게 그들이었으니까.

러시아의 특수부대 출신인 세르게이가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 미국의 고위직인 월터 그레이슨이 고향을 저버린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피칼이야말로 이 세계를 구원할 구도자니까.

그렇게 지안드로의 눈에 광기가 어리기 시작할 무렵, 벨 소리가 울렸다.

삐이─ 삐이─

흡사 경고음 같은 소리.

그러나 지안드로는 자연스럽게 벽돌처럼 두꺼운, 보안 처리한 큼직한 무선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피칼.

어느새 전화를 받은 지안드로가 이탈리아식 억양의 영어로 정중하게 응대했다.

“지안드로 바시카날입니다, 보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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