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일주일 뒤, 점심 무렵.
미국 버지니아주 셰넌도어(Shenandoah) 국립공원 근처, 외진 단독주택 차고지에 차량 한 대가 들어왔다.
그것도 묵직한 남색을 띤 포드 F350 픽업트럭.
강태가 주택 공사를 진행하면서, 콩고로 떠나기 전에 주문해 뒀던 차량 중의 한 대였다.
B6(7.62㎜탄 방어) 등급의 방탄이 가능한 데다가 크기 역시 일반 차량보다 훨씬 큰, 흡사 험비에 버금갈 정도로 큰 모습.
이를 차고지 카메라로 지켜보던 로버트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혼잣말을 흘렸다.
“차도 듬직하군, 제이크의 포드처럼.”
말끝에도 웃음이 달렸다.
워낙에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강태는 칭찬거리만 한가득 가지고 돌아온, 성공한 아들과도 같기 때문이었다.
콩고에 가기 전부터 그리고 콩고에서도 작전 수행을 훌륭하게 해냈었고.
더불어 오늘은 그간 미뤄 두었던 검사도 진행할 예정이었다.
CQB(Close Quarters Battle)나 전술 사격, 근접 격투 등등의 다양한 전투 테스트들.
오늘부터 강태의 능력을 수치화해서 분석하거나 보고하기 용이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 끝에 강태와 해리가 함께 들어왔다.
“미스터 리! 그리고 해리 톰슨, 어서 와요. 둘 다 오랜만이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귀국 직후일 텐데, 컨디션은 좀 괜찮습니까?”
콩고의 작전이 끝나고, 출국 전에 미리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대강의 계획도 일러 줬었고.
로버트가 말과 함께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는 사이, 강태가 내부를 휘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아, 예. 저야 뭐… 근데 여기가 그 테스트 시설이네요. 와… 실제로 보니까 장난 아니네요.”
말속에 야트막한 감탄도 끼어 있었다.
밖에서 확인 가능한 외딴 건물의 모습과 다른, 널찍한 지하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다.
그의 반응 안에는 회상이나 반가움 같은 감정도 스며 있었다.
많이 봤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차를 타고 온 건 아니었으나, 지난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왔던 곳이었다.
강태가 즐겼던 유일한 게임, 라레플 속의 장소 중 하나.
사격술과 격투 능력 따위를 주로 테스트하는 곳으로 관련한 소소한 미션도 있는 곳이었다.
‘이것도 느낌이 다르네…….’
미처 잊고 있었다.
주어지는 작전을 수행하고, 몰려오는 적과 싸우느라 생각도 못 했었다.
게임 속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지 오래 됐을 정도.
한데 이 비밀 시설이 다시금 강태의 추억을 들춰내는 것이었다.
그사이, 미소를 지은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요.”
“아아… 예, 아주 좋습니다. 편안한 것 같기도 하고요.”
강태가 감상하듯 답할 무렵.
로버트가 기다렸다는 듯 손안내를 했다.
“그럼 들어가시지요.”
로버트가 말하며 앞장섰고, 몇 개의 보안 시설을 거쳐서 금세 응접실에 도착했다.
창문만 없을 뿐, 웬 빌딩 속 공간 같은 디자인.
‘여기도 라레플하고 똑같네…….’
강태가 처음과 같은 감정으로 내부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이곳 역시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은, 라레플의 시네마틱 영상에 등장했던 공간이어서 그랬다.
주로 테스트 결과를 통보하거나 미션 결과를 알려 주는 자리.
이윽고 로버트가 커피를 권하며 서두를 꺼냈다.
“테스트하기 전에 앞서… 해 줄 말이 있어서 이렇게 부르게 됐습니다.”
“네, 말씀하십쇼.”
“먼저 미스터 리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특히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부르키나파소의 갑작스러운 작전을 맡아 주어 고맙습니다.”
“아, 그거요. 빡세긴 했는데… 해야죠. 일이잖습니까?”
“그렇게 말해 주니 더없이 고맙습니다.”
로버트가 지그시 바라보며 답했다.
진심이었다.
이미 페어팩스에서 진행했던 각종 검사 기록에 따르면, 강태의 국가관이나 애국심이 그리 좋지 못한 탓이었다.
보통의 특수부대원들이나 요원들에 비하면 절반 수준.
아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다.
로버트 역시 이해했다.
평생을 한국인으로 살았던 강태가 미국인이 된 지 몇 달 안 됐으니까.
그런데도 주어진 일을 군말 없이, 그것도 훌륭하게 수행해 주었으니, 로버트로서는 아주 달가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강태가 임무를 왜 수락했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범세계적인 평화를 지향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테러를 혐오했다.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사상으로 국가를 전복하거나 세계를 뒤흔드는 부류를 싫어했었고.
그것만 있으면 애국심은 좀 부족해도 됐다.
변절하지도 않을 테니까.
곧 로버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미스터 리가 생포한 포로들 덕분에 추가 정보도 특히 많이 얻었습니다.”
“아휴, 잘됐네요.”
“그중 확실한 사실을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로버트가 어느새 웃음기를 지우며 말을 이었다.
“미스터 리가 놈들의 타깃 리스트에 올랐습니다.”
“타깃? 암살 같은 걸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저번처럼 습격하는……?”
강태가 설마 하며 물었다.
뭐가 됐든 간에 이미 한 번 겪어 봤었고, 상당히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다행히도 로버트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교전 시에 우선 사살할 대상으로 분류된 수준입니다. 저격수가 지휘관이나 중화기 사수 등을 먼저 사살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아… 그거. 예, 압니다.”
강태 역시 교전 수칙과 우선순위를 미리 하달받아서 가급적 골라 맞혔었다.
암살이나 습격과는 다른 내용.
강태도 한숨을 뱉는 사이, 로버트가 말을 이었다.
“다만 주의할 필요는 있습니다. 조금 과하긴 하지만, 평시에도 방탄복 같은 걸 입는다면 좀 더… 아, 설마 입은 겁니까?”
방탄복 착용을 권유하려던 로버트가 멈칫하면서 강태의 상체를 쳐다봤다.
얇은 재킷 안이 제법 두툼해 보인 탓이었다.
그가 예상했듯 강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얇은 걸로 하나 입었어요.”
“…준비성이 정말 철저하군요. 아주 좋습니다.”
로버트가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답했다.
이 역시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강태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뭐라고 지시할 게 없는 완벽한 요원이었다.
글록19와 예비 탄약은 차 키나 핸드폰처럼 상비하고, 방탄복은 일상복처럼 입는 데다가, B6 등급의 방탄 차량을 끌고 다니고, 숙식하는 거처는 대구경 탄과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 급조폭발물)에도 멀쩡한 벙커와 다름없는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집과 차량에 제대로 된 병기도 수두룩하게 배치되어 있을 터.
‘리가 위험하면… 미국에 안전한 사람은 없겠지.’
로버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듣고 있던 해리가 불쑥 목소리를 냈다.
“혹시라도 선배님께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가 목숨 바쳐 지키겠습니다.”
“음?”
“선배님은 미국의 전략자원으로 취급될 만한 분이잖습니까? 제가 이번 휴가 기간에 함께 있는 동안 근접 경호를…….”
말이 다 나오기 전에, 강태가 끼어들었다.
“저기 국장님? 이제 슬슬 테스트 받으러 가고 싶은데요.”
“아, 그럼 선물부터 드리겠습니다. 제가 테스트 중간에 다른 일정 때문에 가 봐야 해서 말이죠.”
“선물이요?”
강태가 묻는 사이.
잠깐 일어난 로버트가 한쪽에서 척 봐도 묵직해 보이는 007 스타일의 까만 가방을 가져왔다.
달칵.
잠금장치를 열면서, 로버트가 알아서 설명을 붙였다.
“우선 이건 휴가 중에 사용할 만한 보안 처리한 노트북과 태블릿입니다. 보안 강화된 거라, 사용 방법은 다른 기기와 동일하고… 다음으로 이건 특별히 구해 온 겁니다.”
로버트가 그러면서 가방 한쪽에 완충재와 함께 담긴 소형 하드 케이스를 꺼냈다.
“미 국방고등연구계획국에서 상용화 계획 중인 휴대용 탄도 계산기입니다.”
“……!”
탄도 계산기라는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강태의 눈빛이 빛났다.
“일선 교관에게 지급되는 장비인데, 레일이나 내비게이션 보드에 장착할 수 있게 만들어진 버전입니다.”
“크… 좋네요. 마침 저격 연습을 좀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강태가 어느새 웃는 낯으로 선물을 챙겨 놓고서 몸을 일으켰다.
아까와 다르게 활기찬 모습으로.
“자, 가시죠.”
* * *
테스트를 마치고서 돌아오는 길에 총포상에 들러서 미리 주문했던 총기를 받았다.
바로 FN사의 MK.20 SCAR SSR.
정확히는 민수용인 S20을 커스텀 해서 군용보다 더 낫게 개량된 버전이었다.
이 MK.20에만 쓰일 전용 소음기와 뺨받이, 총기 손잡이까지 모두 추가했고, 7.62×51㎜ 고급 저격탄까지 함께 사들인 것이었다.
전부 다 해서 3만 달러를 웃도는 수준.
한화로 4천만 원을 넘는 돈인데, 번 게 많다 보니 별로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냥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어서 좋을 뿐.
“와… 근사하네요, 선배님.”
해리도 잠깐 열어 본 MK.20의 자태에 감탄했다.
내가 봐도 디자인이 볼만했다.
생긴 것 자체가 묵직한 데다가 미래형 느낌이 물씬 풍긴 덕분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산 건 아니었다.
당연히 성능 역시 좋지만, 그것도 큰 이유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총의 작동 방식이었다.
노리쇠를 일일이 장전하는 볼트 액션식이 아닌, 알아서 한 발씩 장전시켜 주는 가스 피스톤 반자동식.
이게 필요했다.
TAC-50으로 얼떨결에 근중거리 교전을 하면서 느낀 거였다.
물론 볼트 액션식으로도 싹 다 해치우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해리의 방탄 헬멧이 돌아갈 만한 도비탄을 맞았었다.
다른 용병들처럼 정글모나 야구 모자 같은 걸 썼다면, 아마 죽었을지도 몰랐다.
살았어도 머리 수술을 해야 했을 거고.
그래서 정확도나 신뢰도 대신, 근중거리까지 빠르게 커버할 만한 총기를 새로 구입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하드 케이스에 총기를 잘 담아 움직이는 사이,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저도 한 번만 써 봐도 됩니까?”
“되긴 되는데, 하나 주문해. 너도 그 정도는 되잖아?”
케이스를 실으며 답하자, 해리가 멋쩍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아직 제가 번 건 얼마 없습니다.”
“그럼 사 달라고 해. 취미가 아니라, 목숨하고 직결되는 거잖아? 안 그래?”
가볍게 대꾸했다.
존스홉킨스 의대를 나왔다는 해리의 집이 꽤 유복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곧 그 덕을 볼 예정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그 집안의 땅.
사격하기 좋은, 사격장으로 쓰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휴경지를 해리의 삼촌이 갖고 있다고 해서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서 헛소리를 해대도 그러려니 하고 놔뒀고.
“목숨과 직결이라…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못했는데, 맞는 말씀이십니다. 역시 선배님은 생각도 깊고 넓으십니다.”
“아… 면역이 안 되네, 그거.”
“네?”
“아냐, 그래서 그… 사격장은? 어떻게 됐어?”
과한 칭찬에 화두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해리의 답이 돌아왔다.
“아, 2.5마일(4㎞)까지 표적 세워 주신답니다.”
“2.5마일?”
잘못 들었나 해서 되물었는데, 해리의 목소리가 당연하다는 듯 이어졌다.
“네, 장거리로 알아보라고 하셔서 준비했는데… 부족하십니까? 그것보다 더 긴 코스는 없어서… 한번 부탁해서 다른 땅을 알아볼까요?”
“아니, 이 미친놈이 4킬로……?”
절로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2.5마일이면 세계 최장거리 저격 코스보다 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내가 부탁한 것도 그냥 장거리였지, 세계 최장거리 코스가 아니었다.
당황했다가 얼른 말을 바꿔 물었다.
“잠깐만, 그것보다 짧은 건? 없냐?”
“아, 있습니다. 1마일(1.6㎞)부터 0.4마일(640M) 간격으로 표적 추가해 달라고 했습니다.”
시작이 1마일이라는, 다소 기가 차는 말을 들었으나, 결과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연습은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
‘…휴가가 좀 빡세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