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허억……!”
“깼나? 이름은?”
제이크가 거친 숨소리를 듣고서는 확인하듯 물었고, 동시에 움찔한 답이 돌아왔다.
“루, 루이스 몬테로입니다.”
대답한 루이스는 금세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렸다.
양팔이 등 뒤로 묶이고, 발도 포박되었으며, 땅에 배를 깔고 엎어진 상태.
완전한 인질이었다.
그런 루이스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힘겹게 시선을 돌리다가 움찔했다.
“……!”
그저 제이크의 체구나 외모를 보고서 놀란 게 아니었다.
교전 중에 항복 선언을 했었는데, 갑자기 날아들 듯 돌진했던 존재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사람인지도 몰랐었다.
워낙 갑작스럽기도 했거니와, 제이크가 너무 빠르고 큰 탓에 고릴라나 곰, 호랑이 따위가 공격해 오는 줄로 안 것이었다.
그리고 턱이 돌아가면서 의식을 놨는데, 눈을 감기 직전에서야 알았었다.
자신을 덮친 게 사람이라는 걸.
흡사 야수와 같은 덩치에 금빛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진, 바로 눈앞의 제이크였다.
예의 걸걸한 목소리가 다시금 루이스의 귀로 훅 끼쳐 들어왔다.
“출신은?”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출생이고, 경찰특공대였습니다.”
“명예로운 직업이었군.”
“…….”
차마 대답하지 못할 얘기라 입을 닫는 사이.
제이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루이스도 목을 움직여서 눈알을 움직였다.
마침 인기척도 느껴진 탓이었다.
터벅, 터벅.
가장 먼저 다가오는 베이지 컬러의 워커를 본 그가 이어서 녹색 카고바지와 플레이트 캐리어 그리고 얼굴을 힘겹게 올려다봤다.
동시에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고, 중얼거리듯 말이 튀어 나갔다.
“사, 사신……?!”
그 말에 다가오던 강태의 눈가에 구김살이 일었다.
“사신?”
“다, 당신이 전장의 사신 아닙니까? 타깃 1순위 아시안, 방금 내 팀을 모두 죽인 바로 그 사람…….”
“별명이 또 생겼네, 니미…….”
“오, 저는 사신 멋있는데요. 괜찮지 않습니까, 선배님?”
어느새 강태의 뒤에 있던 해리도 말을 보탰는데, 바라보던 루이스는 몸을 떨고 있었다.
“역시 사신이었어…….”
감탄과 두려움이 섞인 혼잣말까지 흐른 뒤.
강태가 루이스를 내려보다가 제이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새끼 이거, 아까 충격으로 병신 된 건 아니죠? 팀장이 엄청 세게 박지 않았어요?”
“크게 손상되진 않았을 거야, 턱을 때렸거든.”
“다행… 이겠죠, 예.”
강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항복 선언한 적을 습격하는 장면이 상당히 과격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탓할 건 없었다.
상대가 그냥 반군이어도 위험한데, 대외협력국에서 타깃으로 정한 불법 용병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항복한다고 해 놓고서 갑자기 소형 권총을 뽑아 쏘거나 자살 폭탄을 터뜨릴 가능성도 있었고.
살상과 관련 없는 신호를 보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걸 막기 위해서, 무전을 듣고 뛰어오던 제이크가 곧장 몸을 날린 것이었다.
강태도 충분히 이해했다.
반년 넘게 용병 생활을 직접 하면서 보고 깨달은 것도 있지만, 라레플의 결말에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미친 빌런도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심문 좀 하셨습니까?”
“이름하고 출신만 물었어, 방금 깼거든.”
“대답도 잘합니까?”
“이름은 루이스 몬테로. 콜롬비아 메데진 출생에 경찰특공대 출신이라더군.”
“경특? 아휴, 경특이나 한 새끼가…….”
강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국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루이스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태를 본 이래로 쭈욱 이어져 온, 제법 긴 잡념이었다.
‘하필 사신이 여기에… 아니, 사신이 정말로 실존할 줄이야…….’
풀밭 어딘가를 보는 루이스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후회가 밀려온 탓이었다.
‘정보 조사라도 제대로 했으면 이렇게까진 안 됐을 텐데…….’
발단은 1개월 전이었다.
강태의 소문이 콩고 내에서 돌기 시작하고, 고용주로부터 용병 사살이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무렵.
루이스는 들려오는 얘기를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반군들은 스스로의 악행을 부풀려 말하는 족속이고, 제대로 익힌 군사 교리도 없어서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용병 사살 역시 종종 하던 거라 당연한 거라고 여겼을 뿐.
심지어 상대는 아시안이었다.
콜롬비아에서 마약 밀매 조직과 수백 번의 실전을 치렀던 자신과는 상대도 안 될 터.
그런 이유의 반군을 몰살시켰다는 아시안에 대한 소문은 과장으로 여기고 굳이 더 알아볼 생각도 안 했었다.
한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반군 학살자니, 도살자니 하는 말이 들려오고, 끝내 전장의 사신이라는 말까지 들리는 상황에서 맞이한 이 사태.
콩고군, 미군, 프랑스군, UN군, 거기에 민간 용병들까지 참여한 연합 작전이었다.
당연히 썩 위험하고 부담 가는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마냥 무서운 건 아니었다.
반군들이면 몰라도, 웬만한 특수부대 출신인 용병들은 빠져나갈 자신과 능력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규모 작전인 만큼 보안도 허술해서 정보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대략적인 작전 지역, 규모, 배치 등등.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안에 바로 도살자이면서 사신인 아시안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었다는 거였다.
그러나 이를 떠올리는 루이스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예상 타깃들이 빌어먹을 사칭범일 줄이야.’
둘 다 금광에 배치됐다고 했었고, 루이스도 그 사실을 철석같이 믿진 못해도, 어느 정도는 신뢰했다.
출처와 정보원만큼은 확실했으니까.
의도인지, 우연인지 모를 일이지만,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그래서 퇴각하던 와중에 강태를 못 알아보고 덤빈 것이었다.
‘알았다면… 제기랄, 이쪽으로는 아예 오지도 않았겠지. 진작에 항복했든지…….’
다시 생각해도 전투 과정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동료 한 명의 어깨가 수박처럼 박살 나듯 터져 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줄줄이 죽어 나갔었다.
총성 한 번에 하나씩.
가슴 한가운데, 머리통 그리고 얼굴까지 족족 구멍이 뚫리거나 찢기듯 날아간 것이었다.
그야말로 돌격 소총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
그렇게 몇 초 사이에 6명이 2명이 되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고, 루이스는 응사 대신에 검지를 빼고 무전을 했었다.
사신이 온 것 아니냐고, 항복해야 할 것 같다고.
그리고 희미한 프로펠러 모터 소음이 들리는 사이, 주춤했던 동료도 순식간에 죽었다.
거기서 루이스가 내릴 수 있는 결단은 단 두 개뿐이었다.
죽음 혹은 항복.
당연한 일이었다. 6명이었을 때도 당했으니까.
그렇게 상념에 잠겼을 때였다.
강태가 발치에 있는 루이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제이크를 쳐다봤다.
“그래서 인계는 어떻게 한답니까? 기지 복귀해서 하는 겁니까, 아니면…….”
“곧 온다더군.”
“여기로요? 복귀 안 하고 바로 넘겨요?”
“그래, 그 편이 좀 더 간결하지.”
“아… 알겠습니다, 그럼 교전 기록은 어떻게, 수정해야 합니까?”
“아냐, 그대로 보고하면 돼. 절차와 형식은 평범하니까.”
“아, 그렇네요. 교전하고 포로 잡아서 UN군에 인계한 거니까… 알겠습니다.”
두 사람 간의 대화에 루이스가 움찔했다.
인계나 교전 기록 수정 따위의 예상하지 못한 단어가 들려온 탓이었다.
설마 하는, 불안감이 가슴속에서 피어나올 무렵.
그 말이 왜 나왔는지 금세 알게 됐다.
짧은 무전이 이어지고, 인기척과 함께 새 인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흰색의 UN 스티커가 붙은 하늘색 방탄 헬멧을 쓴 이들.
UN군이었다.
평화 유지나 단순 지원을 주력으로 삼는 국제연합군 소속.
그러나 루이스의 눈동자는 다시금 흔들렸다.
보자마자 깨달은 탓이었다.
‘UN군이 아니야…….’
겉모습은 특이할 게 없지만, 그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와 언행은 보통의 군인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하는 말도 마찬가지.
“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소문 속의 전설을 드디어 만나게 됐군요. 저격 임무로는 생포가 어려웠을 텐데, 역시 대단합니다.”
“아뇨, 뭐…….”
강태가 가볍게 대꾸하는 사이, UN군이 루이스를 내려다봤다.
마치 다뤄야 할 도구를 쳐다보듯.
“포장을 꼼꼼하게 해 두셨군요. 혹시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까?”
“예상대로 개인별 소지품 같은 건 없었고, 이름과 출신은 말하더군요.”
“그렇군요.”
여기서 알 필요도 없다는 듯한 대답 뒤.
루이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냈다.
“눈깔이… 약이라도 한번 빤 것처럼 생겼군. 도핑하고 전투에 임했나. 흐음… 알아들으면 뭐라고 대답이나 해 보지 그래?”
이윽고 자신을 향한 말까지 오자, 루이스가 주저하듯 입을 뗐다.
“혹시 CIA입니까……?”
그래야 모든 게 설명이 됐다.
자신을 두고 나눈 대화나 보인 태도, 눈빛까지.
설령 CIA가 아니라면, 관련된 비밀 요원이나 훈련된 특수부대원일 것이었다.
돌아오는 답도 긍정에 가까운 말이었고.
“오, 눈썰미가 좋군.”
“……!”
“대화가 잘 통하겠어.”
그러면서 허리를 굽혀서 루이스의 팔뚝 하나를 부여잡았다.
다른 병사도 마찬가지.
“이봐, 힘주고 똑바로 서. 아니면 그냥 앉은뱅이로 만들어 줄까?”
“…….”
루이스가 움찔했다.
방금 말에서 단순한 협박이 아닌, 정말로 실행 가능한 공포가 물씬 풍겨 온 탓이었다.
“…저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블랙 사이트로 가는 겁니까?”
블랙 사이트(Black Site: 비밀 감옥)는 CIA가 전 세계에 운영 중인 위장 건물이나 장소였다.
괴담 같은 게 아니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비슷한 시설을 암암리에 운영하고 있었고, 심지어 미국은 2006년도에 조지 부시 대통령이 연설을 통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도 있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통용됐다.
협박이나 고문, 심지어 살인이나 암매장까지.
심지어 이곳은 미국 본토와 대서양을 사이에 둔 아프리카 한복판, 콩고민주공화국이었다.
더한 짓을 해도 덮일 게 분명했다.
애초부터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땅인 데다가 CIA가 쓰는 비밀 기지일 테니.
살인을 수십 번, 수백 번 해도 평생 드러나지 않을 것이었다.
루이스의 표정이 굳었을 때였다.
“쉬잇, 이제 입 닥쳐. 아니면 영영 닥치게 해 줄 테니까.”
“…잠깐, 작전은 끝난 겁니까?”
“말이 계속 나오는 걸 보니, 정말 혀가 잘리고 싶은가 봐?”
“그게 아니라… 오다가 은닉한 배낭이 있습니다.”
그 말에 제이크와 강태를 비롯한 모든 인원의 시선이 모였다.
끌고 가려던 위장 요원도 마찬가지.
“배낭? 뭔데?”
어느새 합류한 호세가 묻자,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생산물 출하 일자와 출하량 등을 손으로 적은… 기록물 초본입니다.”
“생산물?! 설마 우라늄?”
해리도 놀란 듯 불쑥 묻자, 루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뭔지는 잘 모릅니다, 우라늄을 듣기만 해 봤지 실제로는 본 적도 없고…….”
“여기가 우라늄 광산이잖아?”
호세가 궁금한 걸 못 참겠다는 듯 말하고, 루이스가 얼른 대꾸했다.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용주가 시킨 일만 해서…….”
“그럼 너희 말고도 운영한 놈이 있을 텐데? 그놈이 보스야? 어디 있는지 알아?”
“아, 아닙니다, 이곳에 보스는 없습니다. 다들 비슷합니다. 각자 시킨 일만 해서… 시계에 있는 톱니바퀴처럼 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이곳에 지휘관이 있다면은… 굳이 따지면 총을 든 사람이죠.”
그 말에 강태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지안드로 스타일인 것 같은데… 세르게이보다 더한 놈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