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이튿날, 워싱턴 D.C, 해리 S. 트루먼 빌딩, 국무부 대외협력국.
로버트가 부르키나파소 파견 작전의 최종 보고서를 확인하고 서명을 마쳤다.
상부 보고용으로 완벽한 내용이었다.
G&G Corp TF가 된 수행 팀이 임무를 수행했고, 그 대가로 얻어 낸 것들이 적잖았기 때문이었다.
물질적인 보상, 프랑스 외인부대, 주변국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까지.
그중에서도 외인부대를 파견한, 프랑코포니(프랑스어권 국제기구)의 중심에 있는 프랑스의 영향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에 침투한 중국 자본이나 러시아의 힘하고도 달랐다.
즉각 사용 가능한 무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데다가 화력 역시 막강했으니까.
더불어 프랑코포니 협력과 지하디스트 퇴치를 명분 삼아서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결집해 영향력을 공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분야별 정예를 투입시킨 미군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UN군도 적은 편인 데다가 중무장을 못 해서 강력하다고 보기 어려웠고.
즉, 아프리카에서는 프랑스가 손꼽을 만한 힘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프랑스의 힘을 쓰게 됐으니, 미국으로서는 작전 한 번에 큰 보상을 얻는 셈.
하나, 아쉬운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많았다.
연속된 작전 투입과 위험한 과정 그리고 향후 퍼지게 될 소문 등등.
“…….”
그 생각에 로버트의 표정이 흐려졌다.
전부 원치 않는 것들이었다.
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강태의 안전도 보장하기가 어렵고, 소문 역시 퍼질수록 강태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의뢰를 요구할 확률도 높은 탓이었다.
따지자면 이스라엘이 의뢰한 비공식 작전보다는 프랑스가 의뢰한 위험한 정찰이나 침투 같은 것들.
그중에 강태가 죽거나 다치길 바라는 적이 있을 수도 있는데,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강태의 의향.
가능성은 극히 드물지만, 그가 피로나 반감을 느껴서 일을 그만둘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염증을 느낄 가능성도 없진 않았고.
그러다가 못하겠다고 이탈하면 대외협력국이 아니라, 미국 자체가 어마어마한 손해를 떠안게 될 것이었다.
물론 협박이나 회유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됐다.
오히려 역효과를 낼지도 몰랐다.
강태는 버튼을 누르면 작동하는 기계가 아닌, 집중해서 능력을 십분 발휘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문제는… 윗선이 강태의 가치를 제대로 모른다는 건데…….’
로버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강태의 유능함에 대해 여러 번 보고하고 강조했었는데, 그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탓이었다.
정확하게는 강태를 보는 눈부터 차이가 있었다.
로버트가 그를 비대칭전력으로 봤다면, 위에서는 그걸 다소 과장된 비유로 여긴다는 거였다.
물론 유능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위험한 임무를 문제없이 해냈고, 그 임무 성과마저 훌륭했으니까.
중요한 건 정도의 차이였고, 로버트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니면 앞으로 더 번거로운 의뢰를 맡아야 할지도 모를 일.
“보고서로 안 된다면 세게 나가는 수밖에…….”
그가 의지를 다지듯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방법은 많았다.
정석으로 접근하려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을 뿐.
로버트 역시 한때 흑색 작전을 수행해 본 경험이 있고, 그 과정에서 모든 수단을 써 본 사람이었다.
뭘 해야 할지 가장 잘 안다는 뜻.
특히 지금은 중요한 때였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지원까지 받은, 콩고민주공화국의 작전을 앞둔 시기.
그것도 반군이 강제 점령 중인 금광 2곳과 우라늄 광산 1곳을 타격하여 소유권을 되찾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대외협력국은 그 작전 와중에도 개별적으로 피칼이나 지안드로에 대한 SSE(Sensitive Site Exploitation: 정보 수집)를 실시할 거였고.
물론 평소처럼 선두에 세우진 않을 거였다.
그간 연속된 작전으로 피로가 누적된 탓에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또한 경험 많은 프랑스 외인부대 1개 대대까지 올 예정이니, 굳이 강태가 앞장서지 않아도 됐다.
로버트가 보고서 옆에 놓인 작전 계획서에 서명하며 얕게 숨을 흘려 내었다.
‘이번 작전은 좀 편하기를…….’
* * *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에서 며칠을 쉬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콩고의 남서부 반둔두주(州).
아직 정확한 이유까지 전파되진 않았으나, 이유가 뭔지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저번에 언질 받았던 그 작전일 터.
나뿐만이 아니라, 팀 모두가 그 정도로 짐작하고 부대로 향했을 때였다.
입구의 바리케이드에 닿았는데, 낯익은 차림이 보였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대 단위.
일전에 부르키나파소에서 봤던 프랑스 외인부대였다.
그것도 사막색 전투복이 아니라, 외인부대가 원래 입던 얼룩무늬의 전투복 차림.
그들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나 때문에 왔을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바쁠 외인부대가 한가해서 왔을 리는 없고, 최근에 내가 그들을 도운 적이 있었으니까.
‘위에서 적당히 쇼부쳤겠지.’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개인적으로도 440만 달러를 받았는데, 외인부대 1개 대대가 통째로 들어왔으니까.
무엇보다 외인부대 1개 대대는 내가 어쩌지 못할 만큼 강한 부대였다.
반군이나 민병대면 몰라도, 거친 정규군 훈련부터 비정규전 교육까지 제대로 받은 인재들이었으니까.
물론 1개 대대가 아니라, 소대 정도면 해볼 만하겠지만, 그것도 붙어 보지 않고서는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대로 들어가고, 막 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리!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당신을 도우러 돌아왔습니다.”
내 짐작을 소리로 듣게 됐다.
그것도 부르키나파소에서 가이드 겸 통역 등을 맡았던 담당자, 유수프 은데르망의 말이었다.
그가 까만 피부에 비해 유독 하얘 보이는 눈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군요, 리.”
“예, 좋습니다. 그쪽도 얼굴이 며칠 전보다 좋아 보이는데요?”
“하하하, 그럼요. 중요했던 작전을 당신이 잘 끝내 준 덕분이죠. 그건 그렇고… 한국 출신이라고 했었죠? 우리 부대에도 한국인이 두 명이나 있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오, 부대에 한국인이 있어요? 그런데… 뭐, 만나기까지야…….”
신기하긴 했지만, 고개를 젓고 말았다.
국적도 미국으로 넘어간 지 오래된 상황이어서, 진즉에 검은 머리 외국인이 됐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한국 국적은 포기했고.
국정원에서도 그때 몇 번 전화했었는데, 이제는 연락도 뜸했고, 하더라도 미국인 대우를 해 주고 있었다.
“그럼 같이 안으로 가시죠. 지휘 통제실에 가는 길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제이크 팀장이 갈 겁니다.”
“아아, 그렇군요. 그럼 조금 이따 다시 만나기 바랍니다. 아니… 이렇게 된 김에 연락처나 하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과 알고 지내고 싶은데…….”
“하하, 이거 참… 예, 전화기 주세요.”
쓴웃음과 함께 그의 핸드폰에 내 번호를 입력해 줬다.
우습긴 한데, 이제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상형인 여자들보다 우락부락하고 강인한 현역 군인들에게 번호를 따이는 일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그렇게 유수프를 보내고, 천막 아래 앉아 총기와 장비를 재정비할 때였다.
스윽.
우리 팀 사이로 사람 형체가 들어왔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채로 올려다보자, 이번에는 새로운 흑인이 손을 내밀어왔다.
외인부대 전투복을 입은 한 병사.
“아아, 여기 있었군요.”
“……?”
“저는 부르키나파소에서 당신을 태운 QRF 일원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내와 악수를 나눴다.
야간이고 짧은 순간이라서 지나왔지만, 어쨌든 QRF 덕분에 잘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당신이 퇴출하면서 보여 준 사격 실력에 더 감탄했었는데… 아! 그게 아니라…….”
병사가 얼른 말머리를 돌리더니, 부대 내 한쪽 천막을 가리켰다.
“저쪽에 당신을 사칭하는 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 사칭이요?”
뭔 소린가 싶었는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반군의 도살자라는 아시안이 자신이라고 떵떵거리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쪽으로 갔는데 영 아닌 것 같아서…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당신을 찾아온 겁니다.”
“아시안이요?”
“네, 그가 중국인이라던데… 당신도 중국인입니까?”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아, 미국인이라면… 역시……!”
내 사격술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더 열을 내듯 말했다.
“제가 그 중국 놈에게 안내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작전이 코앞인데 괜히…….”
“아… 역시……! 사격술만이 아니라, 생각도 대단히 깊군요. 당신의 연락처를 좀 받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예, 전화기 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전화기도 받아 번호를 입력해서 돌려보냈을 때였다.
근처에서 MK.13을 확인하던 호세가 불쑥 목소리를 냈다.
“리, 그 중국 놈… 작전 끝나고 내가 손봐 줄까? 아니면 제이크라도 슬쩍 데려갈게. 그의 주먹이면 한 방에 죄를 뉘우칠 수 있을 거야.”
“뭐? 흐흐흐흐.”
호세의 말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날 생각해 주는 것도 고맙고, 제이크를 데려간다는 발상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아냐, 그냥 둬.”
“왜? 아까 그 에트랑제 병사의 말처럼 네 위상이…….”
“위상은 좀 깎여도 돼. 아니, 그게 더 나아.”
“낫다니? 무슨 소리야?”
“그래야 적이 좀 방심이라도 하지. 염병할 도살자가 알고 보니 허세 가득한 병신이라면……? 아니면 저러다 나 대신에 저격 맞고 뒈질 수도 있는 거고.”
그 말에 마커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했다.
“맞는 말이군, 리의 이름값이 높아진 만큼… 굳이 바로잡지 않아도 되겠어.”
마흔이 될 때까지 살면서 배운 지혜였다.
나대지 않는 것.
라레플 속에 들어온 이후로 작전마다 어쩔 수 없이 앞에 나서고 있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허세를 떨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어디 가서 과시하거나 오버한 적도 없었다.
능력은 보여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상념을 날리려는데, 옆에서 해리의 감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선배님은 대단하시네요, 괜히 인기남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기남? 어디서 그딴 소리를…….”
“아앗, 죄송합니다.”
되지도 않는 인기남에 선을 그어 준 뒤.
어느새 지휘 통제실을 나온 제이크를 바라봤다.
그가 묻기도 전에 본론을 꺼냈다.
“출발까지 한 시간 남았고, 우리는 작전지에서 800미터 이상 떨어진 고지점에 침투해서 저격과 원거리 수색을 맡게 될 거야.”
“오… 저격…….”
선두도 좋지만, 저격도 나쁘지 않았다.
근래 저격 경험을 쌓은 덕분에 실력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작전도 내 자양분이 될 터.
HK416을 내려 두고 하드 케이스에서 TAC-50을 꺼내는 사이, 제이크의 말이 이어졌다.
3개로 나뉘어서 내가 해리와 한 팀이 됐다는 사실부터 침투 경로가 어느 방향인지, 통신 음어가 뭔지, 예비 집결지가 어디인지 등등.
걸걸한 목소리로 필요한 것들을 알려 준 제이크가 말을 덧붙였다.
“리, 대만인 용병 한 명이 널 사칭한다던데…….”
“대만? 중국 말고요?”
“…중국인? 내가 들은 건 대만인인데… 중국인도 있나 보군.”
“아, 예. 저쪽에…….”
한쪽을 바라보는데, 헛웃음이 났다.
사칭범이 둘이라니?
마침 고개를 돌렸던 제이크가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그냥 두는 게 어떤가? 아시안에 대한 소문이 난 만큼 혼란을 유도하기도 쉬울 것 같은데.”
“흐흐흐, 마침 그 말 했었습니다. 놔두려고요.”
좋은 판단에 수긍하며 웃을 무렵.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콩고를 떠나기 전에 한번 손 봐 줘야겠지.”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쳐다보자, 제이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솥뚜껑 같은 손을 흔들었다.
“금방 반성할 거야, 다들 그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