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명사수 특성이 만능이나 무적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체감했다.
아니, 일종의 마지노선을 파악한 셈이었다.
어디까지, 얼마나 통하는지.
‘악조건에서는 해 봤자 300미터… 그걸 넘어가면 10발에 1발도 못 맞힐 것 같네. 더 넘어가면 탄창 하나 다 비워야 맞힐까 싶고…….’
내 상황을 되짚으며 조건을 따져 봤다.
200~300M 내에 있던 타깃들을 전부 맞혔던 시가전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인데, 돌아보면 환경이 그럴 만했다.
야간 작전, 완전한 비포장 산길, 50~60㎞/h의 속력, 이동 중이고 흔들리는 타깃 등등.
두 발이 지면에 붙어 있던 시가전이 아주 편했던 거구나 싶을 때였다.
“와아, 드디어 아스팔트가 나옵니다.”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바뀐 승차감이 엉덩이를 타고 전신으로 전해졌다.
확실히 산지의 흙길보다 훨씬 평평하고 고른 길이었다.
물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기준일 뿐, 내가 운전해 봤던 한국이나 미국의 포장도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실상 선진국의 비포장도로와 비슷한 수준.
그러나 지나온 길이 있기 때문에, 해리는 물론이고 뒤에 탄 마커스도 한결 낫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계속해서 달릴 무렵, 새 무전이 도착했다.
-여기는 요나단, 계속해서 소등 유지하겠습니다.
원래라면 이제부터 전조등을 켜고, 좀 더 안전하고 빠르게 주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매복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탓이었다.
물론 주변에 숨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비교적 매끈한 평지라서 금방 들킬 것이었다.
거기다 길도 좁지 않았고, 옆에 흙으로 된 갓길과 마을로 빠지는 골목도 있어서 도주도 용이했다.
외길만 있는 좁은 산길과는 차이가 크다는 뜻.
그래서 전조등을 켜기로 되어 있었는데, 계속해서 소등한다는 소리였다.
이에 이유를 물으려는데, 마침 같은 내용이 들려왔다.
-여기는 2호차, 소등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걸걸한 목소리의 제이크였다.
-적 추격이 지속 중이고, 방기(Bangui)시 외곽의 도로 일부를 차단하거나 정찰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마냥 겁먹은 게 아니라, 나름의 정보를 취했다는 소리.
길만 안내한다더니, 역시나 아예 손을 놓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동시에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은 편해졌는데, 좀 더 위험해지겠네요.”
긴장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야투경을 쓴 그가 내 쪽을 쓱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럼 선배님만 믿겠습니다.”
“믿기는…….”
“믿어야죠, 지금까지 접근해 오는 걸 다 선배님이 막아 주셨잖습니까?”
“…앞이나 봐.”
비행기 태워 주는 말을 가볍게 밀어낼 때였다.
-여기는 레이첼.
때가 되었다는 듯 레이첼의 음성이 묵직하게 전파됐다.
-전방 1.2킬로미터 앞에서 접근 중인 테크니컬 차량 2대 발견. 특이 사항으로 차량 저속 운행 중이며, 랜턴을 이용해 수색 중인 것으로 보임.
“…….”
차내 분위기가 가라앉는 사이, 요나단의 음성이 뒤따르듯 이어졌다.
-전 차량 전방 200미터 앞 골목으로 들어가서 시동 끄고 대기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없는 것처럼 조용히 숨어서 적을 지나치겠다는 뜻.
괜찮은 방법이었다.
정면으로 지나쳤다가는 무조건 발각될 거고, 그렇다고 우회하기에는 돌아갈 길이 좋지 못하거나 너무 멀 테니까.
곧 제이크의 걸걸한 음성이 나왔다.
-2호차, 수신 양호.
그 뒤로 뒷좌석의 마커스까지 대답한 뒤.
선두에 있던 요나단의 차가 골목으로 들어갔고, 제이크의 2호차와 우리 3호차까지 나란히 흙길로 따라 들어갔다.
마모된 아스팔트와는 다른 덜컹대는 소음이 다시금 전신을 타고 들려올 무렵.
곧 완전히 정차했고, 시동도 꺼졌다.
그리고 차 내에 습기 먹은 숨소리가 퍼지고, 바깥에서부터 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즈음.
힘이 들어간 레이첼의 음성이 전파됐다.
-테크니컬 차량 접근 중 600미터… 500미터…….
정보가 귀로 들려왔는데, 곧 육안으로도 보였다.
어느새 테크니컬 차량 라이트가 보이더니,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손전등 불빛까지 보였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이 말했듯 두 대였고, 정찰하는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어디 즈음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이에 혹시 몰라서 교전 준비를 하는데, 마침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제이크. 전원 하차해서 교전 대비하고, 유사시에 선두 차량은 2호차가, 후미 차량은 3호차가 제압하도록 한다.
역시나 베테랑다운 깔끔한 명령이었다.
겁먹은 요구조자들에게 엎드려서 기다리라고 했고,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엄폐한 채로 총구를 내밀었다.
혹시 공격당해도 빠르게 제압할 수 있을 터.
물론 교전 소음이 퍼지면서 위험해질 가능성은 커지겠지만, 고비를 넘기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꽤 많이 이동해서 남은 구간도 얼마 안 됐다.
조용히, 그게 어렵다면은 최대한 신속하게 이동해서 목적지인 공항으로 달려야 했다.
어차피 공항으로 들어가는 시내 진입 구간부터는 안전했다.
UN군 기지와 각국 영사관들도 있으니까.
그렇게 몇 가지 상념을 정리하는 사이, 테크니컬 차량의 모습이 선명히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골목 바로 옆, 거리상으로는 약 70M.
2대의 테크니컬 픽업트럭은 정말 천천히, 어린이 보호구역을 지나가듯 움직이고 있었다.
기관총 사수가 손전등을 여기저기 비춰 보면서.
이에 숨죽이고 기다리던 때였다.
“…염병.”
욕이 절로 나왔다.
테크니컬 차량이 골목 옆에 멈추면서, 손전등을 비춰 봤기 때문이었다.
발각되기 직전.
이에 약속한 대로 후미 차를 겨누고, 조정간 단발로 바꾸며, 동시에 사격 타이밍을 기다릴 때였다.
이러다 더 늦으면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발포해.
시의적절한 순간에 제이크의 허가가 떨어졌다.
당연히 응답할 틈은 없었다.
기다리고 있던 검지에 힘을 주는 게 전부였다.
텅텅텅텅텅텅!
투두두두두두두―!
돌풍처럼 총탄 세례가 쏟아졌다.
순식간이었다.
유리창이 박살 났고, 기관총을 잡고 있던 사람이 넘어갔으며, 타이어가 터져 차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탄창 하나가 증발한 순간.
-사격 중지.
제이크의 명령 뒤로 총성이 멎고,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시금 벌레 소리 따위가 들려올 즈음.
-교전 소음으로 현장 발각 및 추격 예상됩니다, 즉시 전원 탑승하세요.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요나단의 목소리였다.
이에 경계를 마치고 서둘러 차에 탔는데, 다행히도 레이첼이 확인 사살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 왔다.
-열 영상에서 체온 저하와 움직임 없는 거로 봐서는 전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이크의 수신 양호 소리를 듣는 사이, 차가 다시 움직였다.
아까 달리던 아스팔트 위.
흙바닥과는 달라서 최고 시속으로 달릴 수도 있었다.
물론 전조등을 끄고, 야간 투시경을 착용한 상태라 그만큼 빠르게 이동할 순 없지만, 그래도 느리진 않았다.
어느새 방기시까지 남은 시간은 약 10분.
잘 풀리나 싶었는데, 이어지는 말에 결국에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약 1킬로미터 전방, 오토바이와 소형 차량이 도로를 가로막고 있어요.
“가는 길마다 초를 치네…….”
이로써 방금 요나단이 말했던 게 전부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정찰과 방기시 도로 외곽 차단.
그중 정찰 차량을 방금 마주쳤으니, 이제 차단된 도로를 마주할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생각하는 순간.
요나단의 음성이 뒤이어 들려왔다.
-적에게 중화기가 없다고 파악되므로… 위협 사격 후 돌파하겠습니다.
예상한 것 중의 하나였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자세한 설명도 덧붙어 나왔다.
-방기시 초입의 그린존(안전지대)까지 약 10킬로미터밖에 안 남았습니다. 우회나 정차 대신에 신속하게 이동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합니다.
짐작보다 가까운 거리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원 사격 준비.
이어서 레이첼이 차단선과의 거리를 전파했고, 곧 차창 너머에서 도로를 가로막은 광경이 드러났다.
오토바이와 소형차 따위가 비스듬히 선 모습.
-발포!
명령이 떨어지고, 사격하는 사이.
갑작스레 레이첼의 무전이 헤드셋을 타고 끼어들었다.
-진행 방향 우측에서 적 발견! 테크니컬 차량 3대! 빠른 속도로 접근 중!
“우측이면…….”
진행 방향 기준에서 우측이라면, 후방과 운전석 쪽이 아닌 조수석 쪽으로 온다는 소리.
즉, 내 옆이었다.
차단선 사격을 멈추고, 총구를 돌려 측면을 겨누었다.
동시에 왼손으로 마지막 남은 탄창을 갈아 끼우는 사이, 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이제 탄약 다 쓰신 겁니까? 없으면 제 걸로…….”
“아냐, 이거면 되겠어.”
“예?”
“속도나 좀 줄여 봐.”
여유나 허세 같은 게 아니었다.
전과 비교해서 모든 게 사격하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산지 흙길과는 전혀 다른 아스팔트 도로, 곡예 사격이 아닌 편안한 자세, 구불구불한 산등성이 대신에 평평한 지형까지.
물론 완벽할 만큼 좋은 건 아니지만, 조금 불편한 것 정도는 감안할 만했다.
여긴 훈련장이 아닌, 실 작전지였으니까.
철컥.
노리쇠를 전진시키면서 탄알 장전을 한 뒤.
짧게 무전하며 총을 들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총구의 흔들림이 거의 멎어 있었다.
“자, 3시 방향 적 제압하겠습니다.”
* * *
반군의 간부이자, 지역 대장인 젊은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최초의 교전과 사고로 아직 몸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작전이 들어맞은 덕분이었다.
바로 방기시 외곽 도로 차단과 정찰조 투입.
그것도 마구잡이로 한 게 아니었다.
오토바이를 탄 반군들이 몰살당한 뒤로 예상 경로와 지나치게 될 지점을 예측해서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남은 3대의 테크니컬 픽업트럭을 끌고 예상 지점 근처에 숨어 있었다.
일종의 매복 작전인 셈.
결과는 사내가 바랐던 것처럼 일찍, 또한 재확인할 필요 없이 분명하게 돌아왔다.
어마어마한 총성으로.
텅텅텅텅텅텅텅!
투두두두두두두두두―!
수백 미터의 거리를 뚫고, 돌격 소총의 격발음이 사내의 귀를 찔러 왔다.
그것도 소음기를 거쳐 나온 총성.
또한 방금 사내를 덮쳤던, 그래서 뇌리에 남은 그 소리였다.
그가 미소와 함께 명령을 내렸다.
“당장 출발해, 당장! 놈들을 잡으라고!”
그가 욱신거리는 몸으로도 총을 고쳐 잡으면서 차창 너머를 내다봤다.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반군이 당하는 것이었다.
3대의 SUV가 오토바이를 들이받으면서 그대로 도로를 질주하는 광경이 막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분노하진 않았다.
딴 곳으로 샐까 봐, 일부러 오토바이와 소형차만 세워 놨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경보 역할일 뿐.
핵심은 사내가 타고 있는, 중기관총을 설치한 테크니컬 픽업트럭들이었다.
사내가 뒤에 달린 차창을 열며 소리쳤다.
“준비해! 가까이 안 가도 되니까, 그냥 갈겨 버리라고! 알겠어?!”
조금 전의 교전으로 교훈을 얻은 것이었다.
사격술을 배운 상대에게 거리를 내줘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상대보다 먼저 쏴야 한다고.
그래서 아까 사용했던 중국제 망원 야간 투시경을 들어 바라봤을 때였다.
“……?!”
사내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조수석에 사람이 나와 있진 않았는데, 작은 섬광이 번쩍 스쳐 간 탓이었다.
설마 하는 순간.
묵직한 격발음이 울려 퍼졌다.
터엉─!
아까 들었던 총성이었다.
창밖으로 몸을 반 이상 꺼내어 놓고 공격해 온 상대.
직감적으로 깨달을 때였다.
쨍그랑─ 퍼석!
차창에 총구멍이 생겼고, 운전수의 머리가 홱 꺾였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
고작 한 발의 총성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차의 핸들이 틀어지면서 사내가 황급히 낚아채듯 팔을 뻗자 다시 유리가 깨져 나가면서 섬찟한 소리가 났다.
쨍그랑─ 퍼석!
동시에 이가 꽉 물렸다.
그의 어깨가 피격당한 탓이었다.
“으윽……!”
쿠웅!
신음과 함께 부여잡은 핸들을 놓치고, 차량이 그대로 나무와 충돌했다.
단 두 발에 일어난 일.
“으으… 아, 안 돼……. 이 씨발…….”
사내가 욕설을 흘리면서 가까스로 어깨를 부여잡았다.
나무에 박은 충격으로 대시 보드에 눈두덩이가 부딪히긴 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오른쪽 어깨의 고통이 상당한 데다가, 묵직한 총성이 계속 들려온 탓이었다.
반격해야만 했다.
사내가 피 묻은 손으로 놓친 무전기를 찾으려 발밑을 짚으며 더듬거리기를 잠시.
가까스로 찾아내 움켜쥐고서 끙끙대듯 상체를 세웠다.
이어서 무전을 하려던 순간.
“…….”
사내가 주춤했다.
뒤따라오던 다른 테크니컬 한 대가 차창 옆으로 슬슬 굴러가는 것이었다.
기어만 들어가고, 핸들을 놓은 듯.
그다음 광경은 뻔했다.
쿠웅─
사내의 픽업트럭이 그랬듯 맥없이 나무를 박았는데, 한 대가 아니었다.
뒤에 하나가 더 굴러오고 있었다.
쿠웅.
이번에는 멈춰선 차를 받았는데, 두 차량 모두에서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옅은 엔진음만 들릴 뿐.
무전기 버튼을 채 못 누른 채, 두 차량을 보던 사내는 그제야 깨달았다.
상대 혼자서 전부 몰살시켰다고.
그것도 소총 한 자루로, 모두 조준 사격으로 사살한 것이었다.
앞 유리창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이 그 증거였다.
자신은 핸들을 잡으려다 살았을 뿐, 그대로 있었다면 운전석의 부하처럼 얼굴이 뚫렸을 것이다.
그제야 사내의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일순 추위도 몰려왔다.
과다 출혈로 인한 저체온 증상이었는데, 사내는 죽는 순간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두려웠을 뿐이었다.
무전기를 떨어트리고, 고개가 꺾이듯 기울어지며, 결국에 숨을 거둘 때까지.